알제리 배경 영화(I)-‘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1)

 

 1945년 5월8일은 프랑스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프랑스는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며 춤을 추었지만 같은 날, 식민지 알제리에서 해방을 부르짖는 민간인 4만5천 명이 살해되는 피로 강을 이루는 이른바 '세티프 대학살(Setif massacre)' 참극이 벌어졌다.

 

 애초 이 학살의 발단은 프랑스가 2차 대전 중에 알제리인들에게 제시한 약속, 즉 북아프리카의 연합군 작전에 참여하면 '해방'으로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때문이었다.

 

 한편 1883년 이래로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고 불렸던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이 이끄는 월맹(Viet Minh), 즉 베트남독립동맹이 소총과 권총, 소비에트제 낡은 대포만 갖고도 지형·지세에 뛰어난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여, 전차·장갑차·대포 등 군사적 절대우위의 프랑스를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이겨 독립을 쟁취하였다.

 

 베트남의 독립 사실이 똑같이 프랑스 식민지인 북아프리카의 알제리(Algerie)에 알려지자 알제리인들은 9년 전 세티프 학살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무장 투쟁 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1954년 11월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eration Nationale, FLN)을 결성하여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결사 항전의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베트남을 비롯하여 튀니지·모로코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철수한 프랑스군들(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중 북아프리카인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12만2,920명이었다), 심지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파견된 정예사단까지 긁어모아 알제리에 투입해 무력진압을 개시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수많은 해외식민지들이 죄다 독립해서 알제리는 프랑스 최후의 해외 영토나 다름없었기에 아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튀니지와 모로코는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고 민심 확보에도 실패하여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전하였으나,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보급과 병력 보충이 훨씬 쉬웠다. 80만 병력과 5조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했다.

 

 이리하여 1954년부터 1962년까지 FLN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이 이른바 '알제리 전쟁(Algerian War)'이다. 알제리 입장에선 독립 전쟁이고, 프랑스 입장에선 본토와 다름 없는 알제리 식민지의 반란군 진압 작전이었다.

 

 아무튼 알제리 독립전쟁은 현대 알제리 역사의 시작점이었으며, 8년 간의 전쟁의 결과로 알제리는 제국주의 시대의 프랑스가 1830년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알제리를 식민지화 한 후 132년 만에 독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중 약 2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알제리 전쟁은 드골 정권에서 진행되었고 종료되었다. 그렇기에 프랑스 영웅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알제리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이름이다.

 

 이쯤에서 영화를 살펴보자. 타이틀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 원제 La bataille d'Alger)"로 1966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흑백 작품.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 [註: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1919~2006)는 피사 대학 출신으로, 홀로코스트 영화 '카포(Kapo·1960)'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6~2015년간 이탈리아 대통령을 역임했고 2009년 9월14일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을 수상했던 조르지오 나폴리타노(Giorgio Napolitano·97)와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출연 브라힘 하쟈즈, 장 마르탕, 사디 야세프 등. 출연자 중 프랑스 공수부대 매튜 대령 역의 장 마르탕(Jean Martin, 1922~2009)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전문 배우들이며, 엘하디 자파르 역의 사디 야세프(Saadi Yacef, 1928~2021)는 실제 FLN 리더로 활약했던 인물로 1962년에 출간된 그가 쓴 '알제리 전쟁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그의 경험을 모델로 직접 연기했다.

 

 러닝타임 120분. 그런데 음악감독이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2020)이다. 그러니까 '황야의 무법자(1964)'보다 2년 후인 초창기 역량이 잘 배어있는 작품이다. 위기의 장면마다 갑자기 우리의 다듬이질 하는 방망이 소리처럼 효과음을 넣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는 5년 후인 1971년에서야 개봉되었고, 영국·미국에서는 고문 장면이 삭제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1957년 알제리(Algiers)의 수도 알제(Alger). 영화는 고문에 못 견뎌 마지막 남은 FLN 지도자의 은신처를 누설하고 후회하는 한 늙은 밀고자의 괴로운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심한 고문의 흔적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밀고자는 한 프랑스 군인의 위로인지 비아냥인지 "진작에 털어놨으면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험한 꼴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을 아랍인 밀집 지역인 카스바로 안내한다.

 

 여기서 오픈크레디트가 나오면서 중무장한 얼룩무늬 군인들이 트럭으로 운반돼 무수히 많은 희고 네모난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카스바 압드라메스 5번가의 어느 집을 완전 장악한다.

 

 마지막 혁명군 지도자 알리 라 프안트(브라힘 하쟈즈)는 매튜 대령(쟝 마르탕)이 이끄는 공수부대에 포위돼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순순히 나오면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주겠다는 매튜의 회유는 딱 30초의 여유밖에 없다.

 

 장면은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는 알리의 눈동자와 얼굴을 클로스업 하며 영화는 3년 전인 1954년 알제의 카스바로 되돌아간다.

 

 1954년 11월1일 민족해방전선(FLN)의 성명 1호가 발표됐다. 알제리 독립 전쟁의 개시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1966)' 영화포스터.

 

▲ 1957년 알제. "진작에 털어놨으면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험한 꼴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문에 못견뎌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을 카스바로 안내하는 늙은 밀고자.

 

▲ FLN 마지막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 중무장한 프랑스 공수부대가 무수히 많은 희고 네모난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카스바의 어느 집을 완전 장악한다.

 

▲ 마지막 혁명군 지도자 알리 라 프안트(브라힘 하쟈즈·맨우측) 일행은 매튜 대령이 이끄는 공수부대에 포위돼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딱 30초의 여유밖에 없다.

 

▲ 어느 날 야바위를 하다 경찰에 들켜 도망치던 알리는 자신을 넘어뜨리고 조롱하는 프랑스 남자와 드잡이를 하다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A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