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니 꽃 밭에 예쁜 무궁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소개 합니다.
400만불 이상 주택거래 캘거리 75% 폭증 이민자 증가에다 주 사이에 이주가 늘어나면서 캐나다 주요 대도시의 고급주택 시장도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더비 부동산(Sotheby's International Realty Canada)은 올해 상반기 고급 부동산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캘거리 주택시장은 인구 증가와 함께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토론토를 비롯해 밴쿠버, 몬트리올 등 인구 증가가 정체된 주요 도시에서는 시장이 상대적으로 더 잠잠했다. 토론토에서는 올해 상반기 400만 달러 이상에 팔린 주택의 수가 4% 증가한 반면 100만 달러 주택거래는 7% 감소하면서 고급 부동산이 상당히 탄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총 3채의 주택이 1,000만 달러 이상에 팔렸다. 밴쿠버도 2024년 상반기 400만 달러 이상 주택의 주택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6% 감소했고, 1000만 달러 이상 주택의 판매는 50% 줄었다. 반면 캘거리는 6%에 달하는 인구 증가가 주택 공급에 '전례 없는 압력을 가했다'고 밝혔다. 2024년 상반기에 캘거리에서 100만 달러 이상에 판매된 주택의 수는 46% 증가했고, 400만 달러 이상에 판매된 주택은 75% 폭증했다. 캘거리는 또한 캐나다의 다른 주에서 2만6,662명이 이주했으며, 반대로 토론토(-9만3,024명), 몬트리올(-2만624명), 밴쿠버(-1만8,399명) 등은 각각 순손실을 경험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 등장인물의 캐릭터, 인상적인 대사, 주제음악 등이 어우러져 코미디, 로맨스, 서스펜스가 완전 균형을 이룬 전설적인 명화 (지난 호에 이어) 마이클 커티즈가 만든 작품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을 언급해 보면, 'Santa Fe Trail(1940)'에서 에롤 플린과 함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미국 제40대 대통령 역임)이 주연했고, 'Life with Father(1947)'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 'Romance on the High Seas(1948)'에서 도리스 데이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또 '열정의 무대(King Creole•1958)'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월터 매타우(Walter Matthau, 1920~2000)가 공연하기도 했다. 마이클 커티즈 감독은 평생토록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1944년 3월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카사블랑카'로 작품상, 각본상을 비롯하여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연설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그는 어눌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So many times I have a speech ready but no dice. Always a bridesmaid, never a mother." 또 한번은 '카사블랑카' 촬영현장에서 '푸들(poodle)'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사실 그의 의도가 '조그만 물웅덩이(a puddle of water)'였다는 것을 알고 세트디자이너가 당혹해 했다고 한다. 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은 자신의 비망록 두 번째 책의 제목을 'Empty Horses'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커티즈 감독의 말실수 중에서 사실은 '기수 없이 말만 가져와라(horses without riders)'는 의도였는데 '속이 비어 있는 말을 가져와라'라고 말한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금발 벽안(碧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큰 키의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은 17세 때인 1932년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 왕립연극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연기를 배웠고,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1936년 '간주곡(Intermezzo)'에 출연한 것이 헐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어 1939년 미국으로 오게 된다. 그해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이별(Intermezzo: A Love Story)'에 출연하며 헐리우드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영어도 못했고 키가 너무 크고 높다란 코와 짙은 눈썹을 가진 외모에 독일식 이름을 가진 그녀였지만 결코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끼 없는 자연미 그대로의 순수하고 신선한 미모와 개성 때문에 헐리우드의 성형미녀들을 제치고 성공하는 비결이 되었다. 그런데 버그만 자신은 '카사블랑카'를 그렇게 썩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인 1943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그 다음해 '가스등(Gaslight)'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1945년 '세인트 메리의 종(The Bells of St. Mary's)'에서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3년 연속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캐서린 헵번이 세운 4번 연속 기록이 최고이다. 그밖에 2개의 에미상, 4개의 골든글로브상과 토니상을 수상했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도 인연을 맺어 '백색의 공포(Spellbound•1945)', '오명(Notorious•1946)' 그리고 컬러 작품인 '염소자리(Under Capricorn•1949)' 등 3편에 출연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영화 '이수(離愁•Goodbye Again, 1961)'에 출연 당시 그녀는 45세였다. 하지만 실제 나이보다 너무 젊어 보여 분장사가 오히려 이 배역에 맞도록 눈에 섀도우를 바르고 목에 주름살을 그려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모 뿐만 아니라 5개 국어에 능통한 재원인 그녀가 30대 초반에 이탈리아 유명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벌어진 스캔들은 너무나 유명하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Open City)'와 '전화의 저편(Paisan)'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잉그리드 버그만.” 버그만은 이윽고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로셀리니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만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고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으며 버그만은 결국 헐리우드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당해 배우 경력 최고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후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로셀리니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쌍둥이 딸을 두었다. 그러나 로셀리니와 헤어진 버그만은 다시 미국 영화계로 복귀한다. 6년의 시간이 흐르며 여론도 누그러져 1956년 '추상(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면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절친한 친구 캐리 그랜트가 대신 받아줬다. 분장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의 자연미와 웃을 때나 울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열의 하얀 이로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 1974년 추리소설의 대가인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8년 마지막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 4년 뒤인 1982년 영국 런던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런던에서 화장되어 스웨덴 서안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스톡홀름에 있는 부모님 납골당에 같이 안치되었다. '카사블랑카'에 출연한 배우 중 2008년에 조이 페이지를 끝으로 생존하는 배우는 없다. 하지만 코미디, 로맨스, 서스펜스가 완전 균형을 이룬 전설적인 명화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C칼럼- 200 (지난 호에 이어) 그 이후 로마황제 티투스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달래려 지금의 유명한 관광지인 당시5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세워 여러 무자비하고 잔인한 경기를 펼치며 백성들의 민심을 사려 했다. 하지만 결국 티투스 황제는 젊은 나이인 40세에 죽고 말았다. 한때는 유대인 여성을 지극히 사랑했고, 가족과 국민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Love Story도 있지만 결국 티투스 황제도, 그 유명하고 화려했던 로마제국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멸망 했고, 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는 아직도 다행인지는 몰라도 이곳저곳 모임을 참석하게 되는데,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보통 음식이 뷔페스타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헌데, 일부 손님들은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음식을 싸는 분들을 보게 된다. 특이한 점은 그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란 걸 알 수 있다. 식사량이 충분하고, 또 나중에 챙겨도 되는데 뭐가 그리도 급하신지 드시는 것보다 싸시는 게 급하신 분들을 본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던 이유인지, 아님 우리 모두 나이가 들면서 식탐이 더 생기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하긴 나와 함께 일하는 친구 하나도 식사가 나오면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먼저 좋은 것을 골라 본인 앞에 쌓아놓고 먹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보기에 추하고 역겨울 수밖엔 없다. 더구나 남이 식사를 살 때는 일부러 비싸고 고급음식을 시키는 모습은 미련하고 못나 보이는데 필자의 의견엔 이런 버릇 역시 우리 나이엔 꼭 필요한 포기를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행동 아닐까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포기를 안 하면 누군가가 포기를 시킬 것을 아는 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전에 ‘어떻게 포기하며 살까’ 하는 숙제는 꼭 풀어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언제 어떻게 포기해야만 옳은 것일까? 물론 자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증을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고 또 일부 사람들이 그런다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도 아니며, 또 포기란 말은 그런 뜻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병원 방문을 자주하게 되는데 왜 그리도 우리의 신체구조가 복잡한지 전문의도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을 볼 수밖엔 없다. 한국이라면 말이라도 잘 통한다 하지만 이곳은 전문의들이 말하는 의학용어는 잘 이해가 안 되고 더 어려운 것은 전문의를 한번 보려면 하루 이틀이 아닌 장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많은 경우에 기다리다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기에다 이곳 의사들의 사무적이고 무감각한 행동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의사들에겐 의료적 행동이 그저 하나의 직업일 뿐이고, 그들 역시 개인과 가정생활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행동이 당연한 데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아프고 급한 놈은 나 본인이지, 의사가 아니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노인들이 한국에 복수 시민권을 신청한다. 오래 살려 한다기보다 그저 죽을 때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삶은 고통이요, 불쌍한 것이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식탐이 동해서 과식을 하든, 욕심이 동해서 음식을 싸든, 평생을 화로에 불살라도 다 태우지 못할 돈을 죽을 때까지 움켜쥐고 죽으니 우리 모두가 한없이 어리석고 우매하고 불쌍한 피조물이다. 싸놓은 돈을 쓰지를 않는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나 돈을 움켜쥐고 매일 더, 더하며 안달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안타깝고 불쌍하긴 마찬가지란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기억하고 또 회계를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살면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은 기억과 회계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며 필자의 생각엔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해서 그것이 끝이 될 순 없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25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 있었다. 어떤 사건을 취재할 때, 일의 과정이나 결과를 추정하거나 예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정보만 갖고 미리 판단하거나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충고였다. 한두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 전언을 조심하라는 선배도 있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어디에선가 살이 더 붙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오보를 내고, 정정보도를 했다. 기사를 쓰면서 결과적으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취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은 고위직 공무원으로부터 A정부기관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준비 중인데, 내용이 아무리 살펴봐도 엉터리라는 제보를 받았다. 관련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에게 물었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는 답을 들었다. 여러 행정기관 간담회 자료도 입수했는데, 그 정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던 중소기업 관련 A기관에 질문을 했다. 담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제일 먼저 문제를 귀띔했던 고위 공무원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더니, “언론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워 일단 발뺌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가 나갔는데 아침부터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왔다. 정책을 준비하던 곳은 A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B였던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사실 확인을 게을리 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A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정정보도를 냈다. 이름을 달고 나간 기사를 정정하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론보도를 위한 취재는 어떤 사실을 알아내려 하는 행위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는 행위에 100% 완벽하기는 어렵다. 예를 든 사례는 사소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무언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늘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서는 ‘앎’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이야기가 1~13절에 소개되고, 16~30절까지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사람들과 엮인 에피소드가 적혀 있다. 31절 이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연달아 나온다. 4장3절에서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다. 34절로 가 보면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또 41절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뜬금 고백을 내놓는다. 그러니 악마가 광야시험에서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서두를 꺼낸 것은 예수님의 실체를 잠시 헷갈렸거나 전혀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고도 능청을 떨었던 것뿐이다. 악마의 속셈은 뻔한 거짓말로 속이고 넘어뜨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예수께서는 이들 마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사람 안에 들어가 더러운 짓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앎’의 초점은 빗나가 있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특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성경 이사야 61장의 첫 대목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셨다. 이것은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할 일, 즉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회당에 있던 자들이 다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또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한다.(4장22절) ‘놀랍게’ ‘기이하게’라고 번역된 ‘다우마조’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상하게 여기다’는 뜻도 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다음 대목에서 파악된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신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형제까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웃 청년이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여기서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직격하셨다. 예수를 돌팔이 의사쯤으로 취급하면서, 다른 동네에서 했던 것처럼 큰 기적이나 한번 베풀어 보라고 조롱하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면전에서 들추어 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엘리야 시대의 과부와 엘리사 때의 나병환자 나아만 장군을 언급했다. 구원의 은혜는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임했다는 말씀이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그들이 구원 밖에 있는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에 나사렛 사람들은 격분했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절)고 기록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는, 그 예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모세의 제자를 자처하며, 세상 진리를 통달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눈 먼 자들로 들통난 사건이다. 나사렛 사람들 역시 예수를 보았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리에 대한 눈은 멀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은 ‘앎’을 둘러싼 대립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를 ‘틀린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다. ‘선악과’가 낳은 고질 증상이다. 그러나 눈치가 있다면 곧장 그런 ‘앎’이 의미 없음을 알아차린다. 세상에서 쌓은 지식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거품을 물지만 실제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앎’의 출발점이다. 진짜 가치 있는 ‘앎’이란, 생명을 살리는 ‘앎’이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을 향해 예수께서는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나사렛 사람들의 속마음을 예수께서는 이미 꿰뚫고 계셨다. 다시, 나사렛 회당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눈 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일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장29~30절)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미세 플라스틱 입자 검출량 심코호수보다 7배나 많아 온타리오 호수에서 잡힌 물고기에서 검출된 미세플라스틱 수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캐나다통신 등에 따르면 토론토대학과 온타리오 환경부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잡힌 6종의 물고기 샘플을 분석하고, 미세플라스틱(Microplastics) 수준을 측정했다. 미세 플라스틱은 크기가 최대 5mm인 작은 플라스틱 조각으로 정의하는데, 이번 연구에서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잡힌 한 마리 물고기당 평균 138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발견됐다. 이는 심코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의 평균 17개 보다 7배 가량 많은 것이다. 2021년 토론토대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인 민물고기는 평균 8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바닷물고기는 평균 2.7개의 입자를 포함한다. 연구자들은 내장과 생선 살을 모두 조사했기 때문에 이번 연구 결과가 민물고기의 미세 플라스틱 함유 문제와 관련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만약 소비자가 험버 베이에서 잡힌 생선을 먹는다면 한 끼에 평균 123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섭취할 가능성이 있으며, 일주일에 두 끼를 먹는 경우 연간 약 12,800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섭취할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물고기에서 발견된 미세플라스틱의 양은 큰입선농어에서 2개부터 흰빨판돔에서는 1,503개까지 다양했다. 소화관에서는 고무조각이 가장 흔하게 발견되었으며, 생선 살에서는 고무가 아닌 성분 조각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이런 미세플라스틱 함유량은 알래스카에서 잡힌 물고기의 평균보다 12배나 많았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미세 플라스틱이 생물 축적의 증거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인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4년간 210만 달러를 지원할 예정이다. 맥길대와 뉴펀들랜드 메모리얼대 등이 협력해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캐나다인들은 매년 300만 톤이 넘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버리며, 9%만이 재활용된다. 연방 정부는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을 제로로 만드는 목표를 설정하고,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며, 재활용 비율을75% 이상으로 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2022년 12월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금지 조치가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에 들어가면 심장마비, 뇌졸중 또는 사망 위험이 높아질 수 있으며, 플라스틱의 분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 플라스틱은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과 공공 인식 제고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아카디아, 프렌치 캐네디언 편- 캐나다에 산 지 50년, 이민 초기 몬트리올에 5년간 살았고 그 후에도 자주 퀘벡주의 동쪽 퀘벡시티 부근까지는 갈 기회가 있었으나 그 너머 대서양 연안까지는 갈 기회가 없었다. 이후 한 일주일간 간격을 두고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시아 그리고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여행을 하였다. 캐나다 인구는 4천만 명을 겨우 넘었지만 땅덩어리를 놓고 보면 대서양과 태평양을 관통하는 세계 제 2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은 강대국이다. 캐나다의 웅대한 자연을 생각하면 서부 로키 산맥을 떠올리기가 싶다. 하지만 캐나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동부 대서양으로 향해야 한다. 고대 유럽문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 초기의 배는 선원들이 노를 저어서 가는 크기가 작은 형태였고, 그런 배로는 육지로부터 멀리 벗어나기 어려워, 지중해를 떠나 대서양의 넓은 바다로 나갈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개념과는 다르게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콜롬부스였다. 그는 출항하기 전 지도제작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바다 서쪽 끝에는 인도나 중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왜, 콜럼버스는 육로가 아닌 바다로 인도나 중국에 가려 하였을까? 그 이유는, 15세기 유럽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비단, 향신료 등이 유럽으로 전해져 중요한 시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육로가 아닌 해로를 찾게 되었는데, 1492년 8월3일 콜롬부스는 스페인 가디스를 떠나 같은 해 10월12일 두 달여 만의 항해 끝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했다. 당시 콜롬부스는 이곳을 인도라고 오인하고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을 실제로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콜롬부스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캐나다는 그보다 500년 더 앞선 AD 1000 년경에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니까 천 년쯤 전에 바이킹족의 어부들이 물고기 떼를 쫓아 캐나다 동북쪽 변두리 지역까지 왔었다. 당시에는 물고기가 넘쳐나 그물 광주리만 바다에 던지면 물고기가 그물 가득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물고기들은 주로 대구(COD)라 불리는 생선이었는데, 바이킹들은 여름 동안 바다에서 퍼낸 생선을 소금에 절이기도 하고, 가을에는 햇빛에 말리기도 하다가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고향으로 간 흔적이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를 비롯해 캐나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지역을 5백 년 후 영국의 존 캐벗이 발견해 새로 찾은 땅이라 하여 ‘Newfoundland’라 부르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간 캐벗은 새 대륙과 대구(Cod)어장을 발견했다고 자랑하였지만 두 번째 항해에선 실종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도 루이 14세의 명을 받은 ‘자크 카르치에’가 신대륙의 탐험을 위해 항해를 하게 된다. 1535년,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현재의 몬트리올에 도착한 그는 캐나다 원주민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묻는 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이 땅의 주인들은 어떻든 '카,나,타'라 말하게 되었으며, 그 후 카르티에는 이 땅을 ‘캐나다’라고 명명(命名)했다. 그후 1604년, 프랑스의 가톨릭신자이며 경략가인 ‘샤플레인’이 100여 명의 첫 번째 이민자들과 함께 프랑스를 출발해 이 지역을 탐사하며, 그에 의해 처음 정착촌이 들어선 곳이 현재의 노바스코시아의 ‘포트 로얄’이다, 당시 캐나다와 미국 동북부 해안에 정착한 사람들을 아카디안(Acadian)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PEI를 비롯한 캐나다 동부연안을 여행하다 보면 프랑스 삼색기에 별이 하나 박힌 아카디안 국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먼저 정착하여 원주민들과 평화롭게 살던 아카디안들에게는, 1753년 이후 이 지역이 프랑스령에서 영국령으로 넘어가면서부터 비극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755년 7월28일 영국정부는 14세 이상의 남자를 교회로 불러모아 프랑스를 겨냥해 총을 들던지 아니면 이 땅을 떠나라고 최후 통첩을 했다. 그러나 아카디안들은 자신들과 같은 피를 나눈 프랑스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들지 않겠다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게 된다. 결국 아카디아인들 중 3분지2인 1만 6천 명이 강제로 추방되며, 2년여에 걸쳐 그들은 영국인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북미 13개 주에 여러 차례 분산 퇴거를 당하게 된다. 나는 50여 년 전인 1975년, 약 5년간 몬트리올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다. 내가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던 당시 퀘벡주는 한국전쟁 기간 중 캐나다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한국과 인연이 있었던 ‘르네 레벡’(Rene Le ‘Vegue)의 퀘벡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급진적인 프랜치 캐나다인들은 1760년대 이래 그들이 영국의 통치 하에 있고, 그 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불어 문화가 영어에 잠식당하여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등장한 퀘벡당의 르네 레벡은 불어만의 헌정법을 발표하게 된다. 거의 50여 년이 지났다. 많은 외국인들은 지금의 퀘벡이 프랑스보다도 더 프랑스 같다고 한다. 실제로 모든 것이 불어로 되어 있다. 앵무새도 영어만하면 고발되는 곳이 퀘벡이라고 한다. 옛날 50여 년 전 퀘벡에서는 영어만 해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퀘벡에선 생존하기에 힘든 곳이 되었다. 퀘벡의 분리주의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퀘벡주의 독립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국가인 ‘O Canada’ 가사는 1880년 프랑스어로 작사된 후 영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쓰여지고 있다.~~~~~The True North strong and free! From far and wide,~~~~~ (“진정한 북쪽의 강함과 자유여! 저 광활하고 넓은") ‘오! 캐나다’ 캐나다 국가의 가사의 의도처럼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캐나다가 분열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4년 7월22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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