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곡의 주옥같은 노래로 1960년대의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가방을 든 여인'(2)

 

 

16곡의 주옥같은 노래로 1960년대의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가방을 든 여인' (Girl with a Suitcase) (2)

 

 

 이윽고 목욕가운을 걸치고 머리에 줄무늬 수건을 두르고 마치 오페라 속 에티오피아 공주 '아이다'처럼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에 휘둥그레한 눈으로 넋을 잃고 쳐다보는 로렌조. 그의 마음엔 어느새 사랑이 움튼다.

 

 로렌조는 파이나르디 가문의 부잣집 아들로,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숙모 마르타(루치아나 안젤릴로)에게 거짓말로 돈을 얻어내어 아이다를 호화 호텔에 묵게하고 물방울 무늬의 최고급 이브닝 드레스 등을 선물하는데….

 

 아이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들킬까봐 소파에 얼굴 반쪽만 드러내 놓고 비스듬이 기대 누워 받는 로렌조의 앳된 모습은 청순한 사춘기 소년의 풋사랑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명장면이다.

 

 그날 밤 영화보러 가기로 약속하고 아이다가 있는 호텔로 찾아간 로렌조. 하지만 그가 선물한 옷을 입고 오일 딜러라는 부자 사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술 마시고 춤을 추고 있는 아이다. 그녀는 로렌조를 사촌이라고 그들에게 소개시킨다.

 

 이때 오일딜러 프란시아(레나토 발디니)가 자기가 한턱 쏘겠다며 '성욕을 촉진하는 랍스타를 주문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이다를 데리고 춤을 추러 간다.

 그러자 로렌조는 "영화보러 가기로 한 게 맞지요?"하고 아이다에게 확인하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며 "그러나 식사는 해야 될 게 아니냐, 사준다는 데 거절할 거야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여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이다가 프란시아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을 때 트럼펫 연주로 처연하게 흐르는 곡이 유명한 "엘 데구엘로(El Deguello)"이다.  [註: 영화 '리오 브라보(1959)', '알라모(1960)'에 삽입되었던 디미트리 티옴킨 작곡의 '데구엘로'는 스페인어로 '목을 벤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 '적군을 모조리 섬멸함'을 의미한다. youtube.com/watch?v=cJ5z1f7mIis ]

 

 수영장 옆 그네에 홀로 쓸쓸히 걸터앉아 배신과 분노에 가득찬 모습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어린 로렌조의 가슴은 이 음악처럼 죽이고 싶도록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그때 시끄럽다는 주변 아파트 사람들의 항의가 들어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자 판이 깨지는데, 아이다가 로렌조에게 다가갈 즈음 다른 여자가 새 음악을 틀어놓고 나간다. 그 노래가 바로 로렌조의 심경(心境)을 대변하듯 아드리아노 첼렌타노가 부른 '난 당신한테 미쳐 있었어 (Impazzivo per te)'라는 팝송이다.

 

 "난 당신한테 미쳐있었어. 그렇지만 난 그때 알았어. 당신은 나를 위한 사람이 아니란 걸. 당신이 그렇게 나를 배신했던 그 날부터 말이야. 당신은 사랑을 갖고 있지 않았어.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한 로렌조는 "먹고 마시고 놀았으니 이제 영화 보러 가야죠? 우리가 카니발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보니 당신은 즐거워하던데… 난 바보가 아니에요."

 

 기가 찬 아이다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당신이 다 잘못 안 거에요. 내가 즐거웠던 줄 알아요? 지루했어요… 그 자는 불쾌했어요."

 

 이때 화가 나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로렌조. 그러자 "당신은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있어요."라며 로렌조의 잔을 빼앗아 쏟아버리는 아이다. 이에 "촌놈같으니라구!"라며 자조하는 로렌조.

 

 로렌조가 아이다에게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해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하면서 하품을 하며 여기서 자고 싶은데 5분만 노래해 주면 집에 가겠다고 아이처럼 조른다.

 

 이윽고 아이다가 노래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자기 손보다 더 크다."며 "코도 잘 생겼고, 몇 년 지나면 여자들이 당신한테 미쳐 날뛸 거에요."라고 말하자 "내가 왜 나중 일에 신경써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로렌조. 또 아이다가 노래를 이어서 부르는 동안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고 있는 로렌조!

 이 장면은 사춘기의 순수한 소년이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으로 가득찬 어른들의 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충격적인 순간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이상향의 정결한 여성으로 여겨 악과 수치심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감,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고통을 느끼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아주 예리한 통찰력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압권의 장면이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로렌조는 숙모 마르타로부터 세차게 뺨을 얻어맞는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편지를 쓸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한다. 그러고는 하인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라고 경고하고 절대 돈을 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때 전화가 걸려 오지만 마르타가 전화를 받자 끊긴다.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이다.

 

 다음 날 아이다가 기차역으로 간 사실을 호텔에서 알고 그녀를 뒤쫓아 가는 로렌조. 역 구내 식당 페티오에서 리치오네에서 이곳 파르마에 온 피에로 베노티(지안 마리아 볼론테)와 얘기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註: 지안 마리아 볼론테(1933~1994)는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1964)'와 '속(續) 황야의 무법자(또는 석양의 건맨)'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인 악당으로 나왔던 이탈리아 배우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리치오네에 있는 피에로 베노티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는 마르키오리라며 아이다를 찾아달라고 협박하는 로렌조. 그러나 무위로 끝난다.

 

▲ 목욕 후 오페라 속 '아이다'처럼 보이는 아이다의 이 모습은 어린 로렌조의 마음에 어느새 사랑의 불길을 지피게 한다.

 

▲ 목욕 후 출출하다며 부엌을 둘러보는 아이다. 이런 모습을 계속 넋을 잃고 쳐다보는 로렌조.

 

▲ 로렌조는 아이다를 호화 호텔에 묵게하고 물방울 무늬의 최고급 이브닝 드레스 등을 선물하는데….

 

▲ 아이다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고 있는 로렌조!

 

▲ 로렌조에게 전화를 하지만 그의 숙모가 받자 아이다는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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