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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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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존 로스 라요한과 우리말성경

 

-조선 땅에 말씀이 흐르고 흐르리라-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 태운 재를 입은 사람마다 크게 성장하리라!”

 이것은 만주 개신교의 초대선교사이며 조선의 기독교가 스스로 일어서게 만든 ‘예수 성교 전서’라는 신약전서를 우리말로 옮긴 스코틀랜드인 존 로스(1842~1915)의 외침이었다. 

 

 

그는 풍랑을 만나 압록강변에서 산동 해안으로 떠밀려온 의주 상인 이응찬과 그의 친구인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에게 세례를 주고, ‘아름답고 익히기 쉬운 언문’을 배운 다음,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런 다음 그들과 협력하여 1882년에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조선말로 번역한다. 

그런데 만주 땅에서 만든 귀한 조선말 복음서를 조선 땅에 반입하는 일은 늘 실패였다. 이성하가 복음서를 동족에 전해주지 못하는 울분으로 그 복음서를 압록강에 던져버리고 일부는 불에 태워 그 재를 압록강에 뿌리면서 통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과 같이 외친 존 로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가 파송한 존 로스의 마음은 더욱 뜨거운 그리스도에의 사랑과 조선인 전도에 불타올랐다. 

 라요한이라는 조선이름을 가진 그의 예언대로, 압록강 물을 마시며 사는 만주 쪽 강변의 조선인 마을에 교회들이 생겨났고 막을 수 없는 복음서 전파의 급한 물살이 조선 땅에 흘러들어 라틴어나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읽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어린이와 여인들도 읽을 수는 조선말 언문으로 번역한 배려가, 조상들의 언어를 소중하게 전승하는 스코틀랜드인답다. 

 희생을 각오하고 ‘오직 말씀만을!’ 깃대삼아 뛰는 여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로스 선교사도 1872년 2월27일 스코틀랜드 장로회 인버네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0세의 젊은 나이로 갓 혼인한 신부와 함께 중국 산동성 지부에 파송된다. 그 혹한의 땅에서 신부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을 낳은 후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만주선교를 마치고 1900년에 목사직을 은퇴한 로스는 에든버러의 메이필드 연합자유교회에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장로로 봉사했다. 그는 ‘동아시아 역사(1877)’ ‘코리아 역사(1879)’ ‘만주에서의 선교전략(1903)’ ‘중국의 원시종교(1909)’ 등을 저술하고, 1894년엔 글래스고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1915년에 소천한 라요한은 에든버러의 뉴잉톤 묘지에 안장된다. 

 지난 5월5일, 스코틀랜드의 대표일간지인 ‘스코트맨’에 “한국의 대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존 로스의 후손 등이 에든버러 뉴잉턴 묘지에서 한국말 성경 첫 번역자 존 로스 목사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는 기사가 났다.  

대한성서공회가 한글 신구약성경 완역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맞추어 라요한 존 로스 기념비를 만들어 그의 고향 땅에 가져와서 세운 것.

 작년에 우리가 에든버러선교대회가 끝난 후, 양승현 전도사님의 안내로 이곳을 찾았을 때, 조선을 사랑한 문서선교의 사도인 라요한 존 로스의 작은 묘석 위로 오뉴월 여름비가 겨울비처럼 차갑게 내리고 있었다.

 

 

압록강변에서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선교의 방편이 된 한글 성서번역의 동역자 중에 백홍준(1848~1893)은 한국 개신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다. 백홍준의 선친은 이미 로스가 한-청 양국의 유일한 관문인 만주 고려문을 방문했을 때 한문성경을 전도서로 받아 믿음의 가정이 되었다. 

백홍준은 1883년에 의주교회를 개척하고, 1887년에 장로가 된다. 복음서를 적극 선포 하는 그를, 이단 사상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영에서 잡아들여 형틀을 쓴 채 2년간 옥고를 치르다 병사하여 1893년 개신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여러 해 전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공개강좌에서 그의 순교역사를 처음 들었다. 그가 받은 핍박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한데, 기독교를 박해하고 순수한 믿음의 청년에게 형틀을 씌워 옥사하게 한 평양감사가 민병석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부끄러움과 분노마저 일었다. 

민병석은 나의 시댁 어른 중의 한 분이었으므로, 나는 KIST의 공학자이면서 한국역사에도 밝은 동생 창구에게 한 달음에 달려가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효자로 이름난 그분이 자기 아버님만 알고, 우리 하늘 아버지의 참 자녀인 백홍준을 한국개신교 최초의 희생자로 만들다니! ‘83세옹 시남 민병석’이란 서명이 든 그분의 유명한 12폭 병풍을 선물로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이젠 부끄러워 모두 태워버릴 거야!”하고 분개했더니, 동생 왈, “누나, 그 병풍은 국보급인데 버리지 말고 나 주구려. 그리고 어찌된 인연이건 바로 그분의 조카며느님이 민씨 댁을 기독교 가정으로 이끄신 것을 생각하고 참아요.“

 

 우리 개신교의 첫 순교자 백홍준 장로는, 갈릴리 바닷가의 거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갈릴리 베드로교회 지붕위의 나무십자가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가 부활하신 후 이곳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식사를 나누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자 베드로가 마음이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복음21:15)고 분부하신 자리.

 그리스도에의 사랑을 애타게 고백하는 베드로 같은 그 생명의 나무 십자가 위에 변함없이 비추는 햇빛처럼 위로가 되는 것은,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이의 조카며느님이 된 여성 선각자, 고 유진경 권사님이 민문을 믿음으로 이끌고 세 명의 손자와 증손자 한 명이 장로로 봉사하게 된 ‘한 알의 겨자씨앗’이 된 일이다. 존 로스 라요한과 조선청년 동역자 백홍준 등이 번역한 우리말 성경을 읽으신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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