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윤경남의 기획 연재

knyoon
05D438FF-7BEB-44BA-8A28-EB8E01679B37
58416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260
,
전체: 543,854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메뉴 열기
knyoon
윤경남
113060
9209
2024-03-21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124. 만레사 동굴의 이냐시오 성인

 

 


만레사 동굴 앞에서 ‘이냐시오 성인의 적극적인 명상’을 생각하며-                           
스페인, 만레사의 거친 바위 동굴 속. 성모님이 성자와 더불어 성부님께 간구하는 신비한 환상을 보고 참회와 시험 받는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이냐시오 성인의 모습이 작은 제단 위 돌벽에 조각되어 있다. 이 동굴은 이냐시오의 ‘영성수련’Spiritual Exercise의 산실이기도 하다.
문 닫기 전 겨우 십오 분의 시간을 남겨놓고 들어갔기 때문에, 더 깊은 묵상의 기도를 할 새가 없이 이냐시오의 초기 마음처럼 허둥대고 망설이다가 짧게 주의 기도만 드리고 나왔다. 그 대신 동굴 밖의 벽화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기념카드를 살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만레사의 까르도네르 강물이 흘러 내리는 강둑 위에 기대서서 한숨 돌리며 멀리 몽세라 산의 연푸른 산봉우리들을 바라 보았다. 검은 성모님과 아름다운 소년합창단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 몽세라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이곳 종점까지 15킬로미터, 그리고 이냐시오 성인의 동굴 위에 세운 교회를 찾아 10분정도 걸어 왔으니까 그리 먼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이냐시오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몽세라의 성모님 발치에서 참회의 밤샘 기도를 올린 후에 이 만레사까지 험한 산길을 걸어오긴 쉽지 않았으리라.
십자가가 서 있는 이 근방 어딘가에 앉아 그는 까르도네르 강물을 내려다 보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일생을 두고 배우고 실천하게 될 영성에의 깊은 이해가 마음 속에 섬광처럼 비추어왔다고 한다. “그의 이해심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그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주어진 듯 밝아진 빛의 사건”이었다. 이어서 그는 동굴로 돌아와 계속해 뱀의 환시로 시달리면서도 ‘영성수련’의 틀을 이곳에서 완성한다.

 

후에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이 된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젊은 시절을 기사도로 성장한다. 전쟁 중에 다리를 다쳐 로욜라성에 돌아와 쉬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 이 시기에 그에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누린 영예와 영웅심의 허무감에 빠져,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 받으려는 자각심에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결심한다. 
이 시기는 그가 만든 영성수련 Spiritual Exercise에서 ‘영성식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522년 2월, 그는 예루살렘을 순례하기 전에 몽세라의 검은 성모님 앞에 그의 단검과 군복을 벗어서 바치고 참회의 기도로 밤을 지새운다. 몽세라 산길을 오르는 중에 종교논쟁을 벌이던 회교도를 찔러 죽이고 싶었던 그가 단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서약한다.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음’의 시기이다.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까르도네르 강을 내려다 보며 ‘영적일기’와 그의 영혼이 주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영성수련’에 쓴다. 1529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예수회’ 수도회를 만들고, 종신 총장에 선출되어 ‘영성수련’을 주로 가르치고 설교한다. 영성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그는 선종 후 1622년에 시성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그의 영성수련의 기도 방법 중에 ‘적극적인 명상’ Active Contemplation, 즉 상상을 통해 기도하는 방법에 마음이 끌린다. 20세기 스위스의 심층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 의사인 구스타브 융이 이 원리를 기초로 ‘적극적인 상상’Active Imagination 이라는 새로운 학설에 적극 활용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커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극적 명상이란, 무의식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기는 심상mental image에 대해 철저히 의식을 집중하고 내적인 상에 주의를 기울여, 의식에 유효한 정신에너지 libido가 무의식으로 이행하여 무의식의 리비도가 증가하고 이를 자극하여 일련의 연관된 상이 내안inner eyes에 나타난다. 이때 의식적 자아가 이 무의식적 상에 적극적으로 참여 함으로서 상호간의 대면이 이루어지고 이 양자를 통합하는 개성화 과정에 이르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이런 현상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캐나다에 와서부터 해마다 부활절 아침기도에 촛불을 켜고 성경읽기-기도-묵상-적극적 명상을 통해 성취감을 맛본다. 꼰솔라따 수도원의 스테파노가 보내주는 ‘사순절묵상집’ 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예수부활 아침까지 그날의 말씀들을 묵상했다. 지금은 텍사스대학의  큰아들 민동하 장로가 완벽한 LENT 묵상집을 사순절 메시지로 매일 보내주어, 사방에 퍼져 사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기도한다.
 융의 적극적인 명상은 강한 대면이 아닌 경우 ‘어둠’을 겪게 되지만, 이냐시오의 명상은 참회의 단계-조명의 단계(깨달음과 환상의 신비체험)-일치의 단계에 이르며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적극적인 헌신을 한다.
이 두 가지를 가능한대로 도입하여, 영성이 불타는 계절인 부활절 특히 수난절의 기도에 적극 참여시켜본다. 

 

오감(五感)으로 마신다는 우리나라 전통차의 물 끓이는 소리 귀로 듣고, 눈으로 다구를 보며, 입으로 차 맛을, 손으로 찻잔의 감촉을 그리고 코로 향기를 맡듯이, 부활절 새벽 뿐만 아니라 어느 때라도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해서 ‘그의 사건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어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다 하고,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며 그 안에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삶을 위해 기도한다.’
이냐시오의 다음 기도를 생각하면서.
주님, 저를 택하시어 받아주소서.
저의 모든 자유로움, 모든 추억, 모든 지식 그리고 나의 모든 의지를,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부름 받은 나 자신을.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주신 분, 
주님, 당신께 그 모든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의 뜻대로 써 주소서.
오직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은총만을 내리소서.
이 몸은 그것으로 만족하나이다.  (이냐시오의 기도/윤경남 옮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2904
9209
2024-03-14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123. 몽세라의 검은 성모님

 

 
 
   
 
 
올해엔 이화문인회 원고를 안 쓰려고 했으나, 원고를 보내기로 마음을 고친 것은 올해 원고의 주제가 ”어머니”라서다.
나를 낳아 길러 주신 육친의 어머니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 사랑의 원형이며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서다.

장로교 신자인 내가 성모님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몇 해 전에 이스라엘 성지와 튀르키예, 에페소에 있는 성모님의 집을 찾고 나서부터다. 내 친어머니를 모르고 살아온 듯한 허망함이 늦게 알게 된 성모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 것 같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마리아의 성상 Image표현이 검은 피부의 성모상과 하얀 피부의 성모상으로 전승되어 왔음을 요즘 와서야 알았다. 장로교 신자인 나의 늦깎이 사랑의 대상인 성모님의 유래가 단순치 않음을, 스페인 카탈로냐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몽세라 산에서 검은성모님을 보고서야 안 것이다.

 우리 부부는 바르셀로나에 들린 다음 그곳에서 동북쪽 30km 거리에 있는 몽세라에 갔다. 몽세라 역에서 전차를 내리면 수도원까지 끌어주는 케이블카를 만난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우리는 숨을 돌릴 겸 드높은 몽세라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오, 하느님!” 하는 탄성이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잡았다. 신기하게 그 산봉우리도 나처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1235m 높이에 온갖 모양을 다하고 솟아있는 이 산봉우리들은 천사들이 내려와 톱질해 놓은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산을 “기도하는 산 Praying Mountain”이라 부르고 싶었다. 바위산 절벽에 세운 수도원에서 더 높은 곳에 이름마저 붙어있는 봉우리들—미이라 같지만 내게는 그리운 할머니 얼굴, 코끼리, 고양이, 성 살바도르 봉우리 등이 모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세라에서 많은 전설을 안고 주후 718년에 발견된 검은성모상 원형은 산 위의 동굴경당에 보존하고, 12~13세기 사이에 흑단목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검은성모의 모형은 지금 이 성당에 있다.
 
   

(위에서부터)파리 노트르담성당의 하얀 성모님/몽세라의 검은 성모님 /이스라엘 성모기념성전의 푸른 성모님

 

검은성모는 구약성서의 아가서에 솔로몬이 연인으로 노래한 술람미 여인의 모습이다. 성서학자인 마이클 두레이시는, 검은성모님이 발견된 기독교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Song of Songs를 즐겨 불렀다고 말한다. 이 시에 나오는 아름다운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영적인 신부이며 그 여인이 “I am black but beautiful”이라고 노래한 것에 연유해서 검은성모님이 탄생한 것이라고.
 
 그러나 또 다른 학자는 black의 아람어는 sorrowful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연민하는 마리아를 통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몽세라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1시에 미사가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합창단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몽세라에 울려 퍼진다. 그래선지 평일에 천여 명의 신자와 관광객이 매일 함께 미사를 드린다.
 
 검은 흑단의 성모님은 제단 위 높은 곳에 작은 우주를 손에 쥐고 있는 아들 예수님을 안고 계셨고, 예수님의 십자고상은 제단 중앙에 높이 걸려 있다. 미사 후엔 사람들이 제단 뒤로 줄을 지어 성모님을 만져보며 지나가게 했다. 덕분에 나는 기도하면서 검은성모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찍을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
 
 우리는 일정상 오며 가며 파리에 들렀다. 세에느 강가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이 성당의 특이한 구조와 로즈 윈도우에 매료되어 찬양대석 입구 우편에 서 있는 하얀성모님 상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러나 몽세라의 검은성모님 덕분에 이곳이 톨레도 대성당의 하얀성모님과 더불어 그분의 본산임을 알고, 여행의 마지막 길에 다시 들렸다.
 
 Notre-Dame de Paris 대성당은 13세기에 “우리의 귀부인, 성모마리아” 에게 봉헌한 교회이다.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많은 사연이 가슴속에 스며드는 듯한 세에느강 옆에 서 있는 현란한 교회의 모습에선 유우고의 “노트르 담의 꼽추”를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 처절한 종각도 보수 중이어서 밖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콰지모도가 매달려 울려 보내던 종 소리는 저녁 미사시간을 알려주었다.
 
 서녘의 해가 붉게 물드는 로즈윈도우의 여명 속에, 하얀성모님은 핑크빛으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고, 발치엔 흰백합화가 하얀성모님의 일곱 가지 슬픔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사람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라 불러 주는 이의 도움은 꼭 들어주는 어머니의 원형임을 말해주며.
 
   신비스런 안개 속을 헤치고 다닌 듯 한달 만에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맞은 편 벽에 걸린 푸른성모님 사진이 나를 새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몇 해 전 이스라엘, 나자렛의 성모영보성전에서 내 카메라에 담아온, 푸른옷에 흰백합화 마저 푸르게 빛나는 ‘축복 받은 동산’의 성모님이었다.
 
   검은성모상과 하얀성모상에 가려 잠시 잊었던 푸른성모상의 마리아께 미안한 인사와 여행담을 해드렸다.
 
   사람들이 검은성모님과 하얀성모님께 신실한 마음 보다는 물리적인 의지를 더 지나치게 앞세우는 듯해서 송구스러웠다는 이야기도. 
영보성전에서의 성모님의 노래야 말로 ‘노래중의 노래’ Song of Songs가 아닐까요? 이 노래 하나 만으로도 나는 예수님의 어머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충분한걸요. 하면서 다시 일어나 앉아, 몽세라의 검은성모님의 원형인, 푸른성모님이 그곳에서 부르던 순명과 소명의 아름다운 노래를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았다.
 
   “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이제 아기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가복음서 1:28, 38)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2774
9209
2024-03-07
(포토에세이)122.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교회당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2)

 

(지난 호에 이어)
교회라기 보다 울창한 숲같이 보이는 외벽을 타고 십자가 모양으로 우뚝 솟은 큰 전나무위로 나르는 흰 비둘기떼가 ‘이 땅에 평화!’를 외치는 듯하다.  비둘기가 보여주는 평화의 상징 외에, 성 가족 교회는 포도열매로 ‘기적의 종교’를, 성가족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나팔수의 힘찬 고적으로 ‘승리’를, 로우즈윈도우로 ‘영원의 종교’를 상징하고 있다.
교회를 둘러싸고 높이 솟은 12개의 종탑 중에 여덟 개의 탑은 완성되어 유난히 반짝이는 카탈리안 햇빛을 받고 서 있다. 예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며 세운 종탑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며 적혀있다. “HOSANNA!”   “GLORIA!!”   “INEXCELSIS DEO!!!”라고 써있는 송가를 따라 부르다 보면 내 시선은 어느 듯 그 영광의 보좌를 향해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된다.

 

가우디가 가장 높이 헌양하려고 한 곳은 교회의 중앙 돔이다. 170미터 높이에 아직 미완인 이 돔 위엔 크고 빛나는 십자가가 들리워지리라. 그 옆엔 예수님 살아계실 때처럼 ‘성모 마리아의 탑’이 가까이 서게 되며, 또 그 옆엔 ‘네 명의 복음전도자탑’이 서게 되리라.
또 하나 미완의 탑, 영광의 정면은 기도와 구속으로 얻는 은총의 과정--죄, 덕행, 죽음, 천상--을 보여주며,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기둥이 문 앞에 서리라고 한다. 탑 꼭대기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하는 작품을 얹어줄 가우디의 후예 건축예술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우디는 본당의 중앙회중석을 이십 년에 걸쳐 완성했다. 크기가 모두 다른 기둥들 사이로 빛이 들어와 마치 숲 속에 앉아 있는 듯이 느끼게 하고 싶었던 그는 그 기둥들이 온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교회들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달팽이 모습을 닮은 나선형 층계로 성전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면 둥근원형으로 덮인 천장에 찬양의 노래가 하늘까지 들릴 듯 가우디 특유의 음악적 에코의 효과를 느끼게 한다. 층계를 빙 돌며 하늘을 우러러 순례자의 여정을 체험할 수도 있고. 꼭대기에 올라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내 옛날 이야기가 들려 오는듯한 창문의 불빛들이 내려다 보인다.

 

한 작가의 숭고한 정신이 작품 속에 완성 되려면 주위의 많은 후원자 그리고 그 지방의 협조가 중요한 것 같다. 속죄의 뜻으로 짓는 이 교회는 헌금과 기부금으로만 건축하느라, 여러 번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찾아 오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 일년에 1백만 명가량의 방문객과 순례자들이 줄을 이어 헌금하는 것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교회 지하층의 박물관에서 ‘성 가족교회당’을 스틸화로 그린 성경책 꽂이를 식구들과 교회 친구들에게 주려고 많이 사왔지만, 후원 헌금을 미처 생각 못한 것이 가우디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조각한 정면 양 옆으로 난 울타리 위엔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자라는 과일-포도, 석류, 귤, 호두 열매들을 색색으로 조각해서 먹음직스럽게 얹어놓았다. 그리고 지중해에 사는 생물들-자라, 뱀, 올빼미, 다람쥐들이 조각작품이 아닌 진짜 생물처럼 주위를 돌아다니고 그 사이사이로 따뜻한 나라의 나무와 꽃들이 향기를 전하며 자연의 교향악을 울리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가 교회중심의 대지를 공원으로 마련 해준 ‘성가족교회 공원’ 푸른 잔디엔, 진달래와 장미꽃들이 화려한 무대장식처럼 이 조각작품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운 한낮의 찬양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밤도 낮처럼 환하게 빛내 주는 교회당의 야경이다. 낮보다 더 밝고 아름다운 밤의 성가족 교회당은, 황금빛 사도의 옷을 입고 온 세상에 궁극적인 평화를 알리려고 하얀 비둘기들을 하늘 높이 날려보내고 있었다.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시편139)고, 노래하면서.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2624
9209
2024-02-29
(포토에세이)122.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교회당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


 

 

  옛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상, 오며 가며 프랑스 파리에
 들렀으나, 스페인에서 제일 먼저 발을 내디딘 곳은 바르셀로나이다.
(이 도시는 원래 주전 1세기엔 바르키노 마을이었고, 4세기에 들어와 바르셀로나라 부르면서 인구가 2백만을 넘는 스페인 제2의 대도시가 되었다.   이 Gotico지구엔 대성당 및 의사당, 시청, 왕의 광장, 로마 시대의 성벽, 피카소의 미술관등이 예술의 거리임을 보여준다.)
바르셀로나에 들어서자, 어머니인 대지에서 솟아나와 아버지인 하늘을 향해 가슴 떨리는 기도를 올리는 듯한 교회 모습이 먼저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하는 바르셀로나 성가족교회당’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가까운 몽 세라 수도원에 갔을 때, 기도하는 두 손을 닮은 산봉오리를 보고 놀랐는데, 그곳에서 자주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는 가우디가 몽 세라에 은둔하며 성 가족 교회당을 구상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사백 년을 두고 짓는다는 이 교회로 인해 세상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이 교회 설계와 건축을 맡았던 안토니오 가우디 코르네는, 세공업으로 대를 잇는 아버지의 성 Gaudi와 어머니의 성 Cornet를 이어받아1852년 레우스에 태어나 아르누보 건축의 거장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 관절염을 오래 앓았던 그는 학창시절에 학문에 몰두하기 보다는 치료를 위해 걷기운동을 하면서 동물, 식물, 자연의 모습들을 늘 가까이 관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레우스에 있는 Escola Pia에서 공부할 때 기하학과 시와 그리이스어에 뛰어났다. 그의 종교적인 성품과 ‘성 가족교회당’같은 작품은 이곳에 있는 학자 신부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희생의 역사와 성모 마리아의 세계를 배운 데서 비롯한 것이란다.

 

 


가우디는 1873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사하여 주립 건축대학에서 공부할 때, 스케치와 기획에서 그의 광적인 천재성을 보여준다. 그 후로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그의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부수적으로 따라다닌다. 그는 중세기의 고딕양식의 예술에 영감을 받아 자연 속에서 구조의 형태를 발견한다. 또한 몽세라, 토우로우세, 피레네 산맥 등지를 찾아가 선배 건축가들과 함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연구하고 조각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하여 ‘성가족교회당’ 내부에 에코를 전달하는 둥근 천장을 올렸고, 교회당 외벽엔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는 듯 수금과 비파와 나팔 같은 악기로 찬양하는 모습들을 실물처럼 빚어 놓았다.
영국 미술비평가인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교회장식은 건축의 기원”이란 신념으로 교회당 안팎의 장식과 조각작품에 마음을 쏟았다.
성스러운 가족인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에게 바친 이 성당에서, 1883년부터 설계 및 건축의 정식 감독을 맡아 43년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 하다가 74세에 어느 날 새벽길에 전차에 치어 운명하고 만다. 그의 유해는 교황청의 배려로 그가 짓다 만 지하경당에 편안히 모셨고.
그는 짧은 인생의 덧없음을 미리 알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남길 작품이 아니라 몇 세대 후손들과 제자들이 이어갈 ‘영원한 도성’같은 성전건축으로 기획했기에 그가 가고 없는 지금도 그 교회는 가우디의 이름으로 앞으로 백 년 이상 건축작업이 계속 되리라 한다.
성가족 교회당은 그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아주 많은 성서적 상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듯 동편을 향해 서 있는 ‘그리스도 탄생의 정면’엔,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과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생명과 기쁨을 상징하는 이곳에 성 가족의 생애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인이 걸어 들어가야 할 세 개의 문-‘믿음의문’, ‘희망의문’, ‘사랑의문’ 이 활짝 열려 있고, 서편 정면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무런 장식도 없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 앞에 앙상한 가시나무가 예수님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십자가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2327
9209
2024-02-15
(포토에세이)121. 알함브라궁의 영혼의 산책?Spiritual Walk in the Palace Alhambra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 위엔 흰 눈이 그대로 있는데, 사월의 훈풍에 라일락 향기가 이역에서 찾아 온 우리부부에게 다정하게 스며든다. 참 멀리도 찾아왔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 치고는 많은 시간을 이곳에 나누고 있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다는 뜻이며 알함브라궁은 붉은 성채를 의미한다.  이 성을 붉은 에머랄드 성이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가보면 알게 된다. 낮에는 올리브나무와 전나무, 아이비 덩굴로 덮인 에머랄드 빛 성채가 밤이면 붉은 횃불같이 타오르는 모습을 보게 되므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 후보에 든 스페인 땅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성. 그나마 호텔에서 예약해주지 않았다면 들어가지도 못할 뻔했다.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는 3,300명, 오후엔 2,100명, 저녁엔400명만 입장시키기 때문이다.

 1492년, 기독교국토회복운동의 기치를 든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왕과 이사벨라 여왕부부가 알함브라성에 무저항으로 입성했고, 성채 입구엔 그들의 손자인 카를로스5세가 지은 궁전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마치 비싸게 주고 산 불후의 명작 그림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덧칠해 놓은 듯 어울리지 않았다.

기독교문화에 젖어 살아 온 우리에게 이 알함브라궁은 완전히 이질적인 무슬림 문화의 환타지에 빠지게 했다. 보라빛 등꽃이 신부의 화관처럼 늘어진 무지개문을 들어서자 맑은 하늘에 슬프게 울려오는 타레가의 클래식 기타가 내 마음의 줄을 타고 들려온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 받고 이곳에 와서 달밤에 작곡하여 부른 <알함브라 궁의 추억>은 이 궁의 뜰을 거니는 동안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고.

가슴이 떨리게 하는 타레가의 트레몰로 조(비브라토, 진동음조)는, 이 궁의 여름 별장인 헤네랄리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네바다 산꼭대기에서 지하수로를 따라 흘러 온 물들이 양편에서 열두 줄기의 분수로 내뿜는 대리석 십자가길 위에 넘쳐 흐르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가에 핀 온갖 꽃들과 새들의 교향악에 타레가의 기타 음율이 춤추는 듯 흐느적거린다. 

트레몰로, 샘물의 트레몰레!

 

 

     

이 영원한 샘물은 또한 이 나라의 성녀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에 나오는 제일궁실 같다. 그 궁실에서 올리는 묵상의 적극적인 기도의 고뇌가 마치 수원지의 물을 이 먼 곳에 있는 물통에까지 끌어들여야만 하는 힘겨움에 비길 만 하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물가에 피고 지는 꽃과 풀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트레몰로, 허무한 꽃들의 트레몰레!

 

그 고통을 이기고 수동적인 관상의 세계를 보이는 곳은 바로 ‘정의의 방’을 지나자 활짝 트인 긴 연못이다. 사막 시절에 그리던 오아시스를 인위적으로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으로, 직사각형의 못 둘레에 심은 낮은 키의 관목에서 이름한 ‘관목숲의 뜰’ 혹은 ‘코마레 궁전의 연못’이라고도 부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못 주위를 거닐어도, 궁전의 지붕과 야자수가 비취는 데도, 이슬람 전통건축으로 대칭과 비례를 정확하게 측정해 지은 건물이 다 들여다 보여도 수면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오아시스에 물을 끌어들인 환희와 자만을 감추고 관상의 기도 속에 잠겨 있는 듯.

트레몰로, 기도의 트레몰레!

 

 

 

성녀 데레사가 겪은 ‘영혼의 어둔 밤’은 열두 지파의 상징인 열두 사자의 입에서 각 궁실로 이어진 수로에 물을 대주는 사자궁의 분수를 지나 방마다 분수가 설치된 방들을 돌아볼 때이다. 한 귀퉁이가 헐겁게 흘러 내릴 듯 버티고 있는 아벤세라헤 궁실의 둥근 천장엔, 팔각형의 별을 두 개 겹쳐 놓은 벌집모양의 원형천장. 우주와 같은 둥근 천장에 박힌 보석들이 어둔 밤의 희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트레몰로, 별들의 트레몰레!

  

 

 

성벽 종탑 위엔 기마병 조각상의 풍향계가 적이 오면 방향을 알려주었다는 곳, 그 외에도 한없이 많은 전설을 다음에 풀어보기로 하고 알함브라궁을 나섰다. 너무 아쉽지만 저녁 티켓까지 구입하기엔 너무 비싸다. 그래도 어둠 속에 서 있는 알함브라궁의 모습을 보려고 해가 저문 후, 맞은편 알바이신 마을로 택시를 타고 올라갔다.  

   알함브라 궁은, 낮의 에머랄드 빛 옷을 붉은 빛으로 갈아입고 더 화려하고 처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알함브라궁을 바라보며, 이 신비에 쌓인 예술작품 같은 궁성을 떠나야 했던 나시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압딜의 마지막 한숨’이 들려온다. 보압딜은 왜 불타는 듯한 밤 사진처럼 이 궁성을 불태워 버리고 떠나지 않았을까?  

하기야 불꽃 속에 사라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붉은 영혼의 성을 산책할 수 있었고, 너무나 맑아 달빛처럼 슬픈 타레가의 기타 소리도 듣긴 했지만. 

영혼의 트레몰레, 영혼의 성 알함브라여!!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2125
9209
2024-02-08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120. 기도하는 산 PRAYING MOUNTAIN, 몽 세라에 오르며

 

 지난 봄에 미국을 방문 중인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다가 그곳에 있는 동안 한국교회를 나가면서 성경공부반에 참여한 얘기를 들었다. 한국보다 앞서야 할 미국에서의 성경공부는 10년 전쯤의 교재로 틀에 박힌 이론과 목회스타일이더란 것이었다.
이곳 토론토의 종교계 칼럼에도, 북미에서 만든 성경공부 교재를 한국에서 재편성한 것을 역수입해 가르치고 있는 한심한 현상에 대해 쓴 것을 보았다.

크고 작은 이민교회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얼마 후 나는 남편 민석홍 장로와 함께 스페인을 두루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원래는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있는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바르셀로나를 들른 다음 그곳에서 30km 거리에 있는 몽세라Montserrat의 베네딕트 수도원을 먼저 찾아갔다.

몽세라역에서 전차를 내리면 수도원까지 끌어주는 케이블카를 만나게 된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우리는 숨을 돌릴 겸 드높은 몽세라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오, 하느님!” 하는 탄성이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잡았다. 신기하게 그 산봉우리도 나처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어떤 시인은 1천 미터가 넘는 이 산꼭대기에 여러 가지 자태로 솟아 있는 이 산봉우리들은 천사가 내려와 톱질해 놓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산을 “기도하는 산” Praying Mountain이라 부르고 싶었다. 바위산 절벽에 세운 수도원에서 더 높은 곳에 이름마저 붙어 있는 봉우리들-- 엄마봉우리, 코끼리, 고양이, 성 살바도르 봉우리들이 모두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세라에서 많은 전설을 안고 주후 718년에 발견된 ‘검은 성모상’ 원형은 산 위의 동굴경당 Holy Grotto에, 그후 12~13세기 사이에 흑단목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검은 성모님의 모형은 지금 이곳 성당에 카탈로니아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검은성모님은 구약성서의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연인으로 노래한 슐람여인의 모습이다. 성서학자인 Michael Duracy는, 검은성모님이 등장하던 기독교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Song of Songs를 즐겨 불렀다고 말한다. 이 시에 나오는 아름다운 슐람여인은 솔로몬의 영적인 신부이며, 그 여인이 “I am black but beautiful”이라고 노래한 것이 검은성모님의 유래라고 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사랑의 원형이며 순명과 소명을 받아들인 지혜의 어머니를 늦게 나마 뜨겁게 만난 것은, 몇 해 전에 성지 이스라엘의 성모영보성전과 터키, 에베소에서 성모님의 집을 찾았을 때부터이다.  
천주교에서는 성모님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걱정스럽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장로교에서는 너무 제쳐 놓는 분위기여서 절름발이 신앙생활을 해온 듯한 느낌이었다. 

 

몽세라 성당엔 매일 오후 1시에 미사가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합창단의 청아한 산울림 같은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선지 평일에 천여 명의 신자와 관광객이 매일 함께 미사를 올린다.
신비스럽게 빛나는 검은 흑단의 성모님은 제단 위 높은 곳에 작은 우주를 손에 쥐고 있는 아들 예수님을 안고 계셨고, 예수님의 십자고상은 제단 중앙에 있었다. 미사 후엔 사람들이 제단 뒤로 줄을 지어 성모님을 만져보며 지나가게 했다. 덕분에 나도 성모님의 아름다운 영보송을 외우며 검은성모님의 프로필을 가까이서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

“기도하는 산” 속에 하룻밤이라도 머물며 내 영혼에 그 산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Manresa에 들를 시간이 없어질세라 급히 산을 내려왔다.

돌아보고 또 올려다보며 마음에 짚이는 것은, 기도 만이 우리들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살 길이란 것이었다. 몽세라의 산봉우리들처럼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는 양떼들이 속세에서 천방지축 헤매지도 않을 것이며, 오직 고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이 깃든 교회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기독교회의 부패는 처참한 암흑기를 겪었으며 동시에 많은 영성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영성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 중 하나인 로욜라의 이냐시우스는 이 몽세라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떠나기 전날 밤 1522년 3월25일에 성모님상 앞에서 참회의 지샘을 했다. 그리고 그가 차고 있던 검을 성모님 앞에 바치고, 앞으로는 국가의 군대가 아닌 십자가의 군사가 될 것을 서약했다. 그는 Manresa로 돌아가 성모님으로부터 은사를 받는 환시를 본 다음, 예수회를 창설했다. 그가 만든 ‘영성수련’ Spiritual Exercise는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훈련의 기틀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이냐시우스 수도원이 있는 곳엔 이 영성수련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토론토의 성 이냐시우스 수도원에서도 4주간의 이 훈련을 받는 목사님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는 많은 개신교회들이 앞으로 닥칠 마귀의 암흑기에 대비하려면 이러한 ‘영성수련’을 쌓아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내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관상 기도의 경지를 맛보게 될 때, 양떼를 인도하는 섭리와 방법은 절로 해결되리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와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사랑을 펴나가는 새로운 길이 열릴 터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1936
9209
2024-02-01
(포토에세이)자연의모자이크를따라서-119. 공평한 간칭(桿稱)과 명칭(皿稱)


 
   
                                                           

요즘 나의 남편은 개역성경에 나오는 기묘한 한문 수색전에 골몰해 있다. 그이는 시력이 약해지신 94세 어머님을 위해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는 시편과 복음서 중에서 붓글씨로 성경구절을 써 드리기 시작하다가, 어려운 한자들을 수 없이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몇 번씩이나 읽었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구절들이 실제로는 어려운 라틴어나 다름 없는 한문자에 가려서 뜻도 모른 채 덧없는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그 중에도 생전 처음 보는 재미있는 한자를 만났다. 그것은 잠언서 16장11절의 말씀이었다.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표준새번역엔, “정확한 저울과 천평은 주님의 것이며,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고, 알기 쉽게 번역되어 있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자인 정하은 박사는 인간의 고통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째로 물리적인 아픔(Pain), 두 번째로 감정적인 슬픔(Sorrow), 세 번째로 재난과 전쟁에서 오는 비극(Tragedy), 그리고 운명의 장난 같은 아이러니(Irony) 단계로 고통이 심화하는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승화된 고통이 네 번째의 아이러니인데, 이것이 바로 욥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닉한 고통을 본다. 그는 좌옹 윤치호 선생님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현행 애국가를 작사한 분이며, 한국남감리교회를 이 땅에 들어오게 한 분이며,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육과 선교에 백년대계를 세우고 실천한 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 숨겨진 한문자처럼 그분의 뜻을 헤아리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그를 친일파로만 몰고 있다.
나는 올해 들어서야 창립한 좌옹 윤치호문화사업회의 한 임원으로서, 교회사적으로나 우리 역사의 인물로 보나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그의 존재를 밝혀내는 일을 작은 일이나마 거들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다. 이제야 깨달은 것은 묵묵히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하는<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윤치호 선집2)를 비롯해 60 여 년을 두고 쓴 그의 세기적인 영문일기 12권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는 날은, 예수님과 욥처럼 아이러닉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좌옹 선생을 새롭게 제대로 평가하는 기회가 되리라 굳게 믿는다.
주님은 언젠가 “정확한 저울, 천평(桿稱)과 명칭 (皿稱)으로” 역사를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영어의 Scale과 Balance가 그것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저울은 모두 밸런싱 기능을 가진 것들인데, 쉽게 말하자면 긴 막대기 중앙에 끈을 매고 양쪽의 밸런스를 맞추는 원리이다.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맞저울인데, 막대기 양쪽 끝에 접시를 하나씩 매달아 이 쪽에는 물건을 올리고 저 쪽에는 추를 올려서 표준 추 무게로 물건의 무게를 재는 방식이다. 이 맞저울을 천평칭(天平秤)이라 하고 줄여서 천칭(天秤)이라고도 하는데, 천장에 끈을 매달고 막대가 평평해지는 것을 보고 무게를 재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저울 ‘펠레쓰’는 ‘평평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천칭의 이러한 기능을 한마디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천칭은 BC 5000년 무렵의 이집트 분묘에서 출토된 적이 있고, BC 3000년 무렵의 파피루스 그림에서도 저승 사자가 영혼(심장)의 무게를 다는 모습으로 나온다.
천칭(천평칭, 맞저울)은 매우 정확하게 무게를 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분동(分銅)이라는 무거운 추(錘)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고 또한 짐과 추를 함께 들거나 천장에 매달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개량된 것이 상명천칭(上皿天秤) 즉 윗접시 천칭이다. 이것은 막대기 중앙에다 지렛대를 받쳐 저울을 땅에 놓고도 무게를 달 수 있도록 개량된 것이다. 
간단하게 명칭(皿秤, 그릇명-저울칭)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저울은 공정한 접시나 추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속이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천칭은 더욱 발전하여 간칭(杆秤) 즉 대저울 또는 막대저울이라 불리는 ‘로마저울’을 탄생시켰다. 저울대 1개와 추 1개만 있으면 웬만한 물건을 다 잴 수 있는 편리한 저울이다. 막대기 한쪽 끝에 물건을 걸 수 있는 갈고리나 접시가 달려 있고, 그 부근에 저울을 드는 끈이 달려 있다. 그리고 끈 반대편의 긴 막대기에는 눈금이 그려져 있으므로 추를 움직여 수평을 이루는 지점의 무게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공의 또는 심판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저울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한 곳들이 나온다. 바벨론 벨사살 왕은 저울에 달려서 모자랐고(단 5:27, 메네 메네 데겔 우 바르신), 계시록 6장 5절에는 “검은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라고도 나온다.
성경에는 저울이라는 단어가 매우 어려운 중국 단어들로 번역되어 있고, 번역 내용도 혼란스럽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잠언 16장 11절의 ‘펠레쓰’와 ‘모젠’이 여러 가지 다른 말들로 번역되었고, 동일한 단어가 이사야 40장 12절에서는 서로 뒤바꾸어 번역되기도 하였다.

인간이나 저울이나 정확하게 자기 자신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은 간칭이나 명칭이나 내 마음의 저울눈과 일치할 때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우선 순위를 하나님과 그 말씀과 하나님 나라에 두고, 영혼이 그 은혜의 말씀에 충만해지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삶으로, 거룩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저울추)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라.(잠언 16:11)
누가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이사야 40: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1677
9209
2024-01-18
(포토에세이)<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서문-(2)

(지난 호에 이어)

그리스도의 영겁의 날개 밑에 돌아온 어거스틴은, 그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전기적인 참회의 ‘고백록’(401년)을 썼고, 15년에 걸쳐 ‘삼위일체론’(400~415)을,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 속에서 영원한 평화와 성스러운 안식을 동일시한 ‘신국론’(413~426)과 ‘하느님의 도성’ 등을 남겼다. 성자 어거스틴에게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가 그의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되었다.

 

밀라노에 다시 한번 오게 된다면, 5월4일에 열리는 모니카 기념예배에 참석해서 위대한 여성이며 대지와 같은 어머니 모니카의 모습을 꼭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가서 성자 어거스틴을 탄생시킨 타가스테의 산과 냇물을 바라보면서 그가 연구하고 이룩해 놓은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더욱 알고 싶다.

어거스틴을 생각하는 짧은 시간의 교류가 아쉬워 문밖에 나와 더 오래 서성이며 어거스틴이 성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 반달모양의 모자이크 그림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다시금 느끼면서.

 

 

 

 

***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정의채 신부 씀- 길-1984.3.)

 

354년 타가스테에서 출생

380~381년 [미와 적합론] 저술

386~387년 [아카데미아 학파의 논박], [행복한 생활], [질서론], [독백] 저술

387년  개종

391년 수도회 창설하고 [하느님의 종들을 위한 수도규칙]을 냄

396년 히포의 주교로 선출

401년 [고백록] 저술: 어둠과 빛, 선과 악, 육과 영, 죄와 은총, 혼란과 평온의         처절한 갈등의 자서전적 표현.        

400~415년 [삼위일체론] 저술

413~426년 [신국론; 하느님의 도성] 저술: 어거스틴의 사상의 정화(精華). 그의 풍부한 신학적 내용을 담은 것은 물론이고, 그의 넓고 깊은 문화사적 역사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희랍철학과 인간문화를 그 역사적 과정에서 파악하며 이로 정연하게 내면을 투시하여 그 한계를 제시하고 자연스럽게 역사신학과 합체시켜 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즉 역사 안에 이룩된 고귀한 인지(人智)의 발전을 계시 안에 원숙시켜 간다. 이 책 안의  어거스틴의 사상은 미래지향적이다. 그는 아득한 흐름의 지평에 시간과 영원의 합체를 보며 영원 안에 시간이 흡수되어 감을 봄으로서 종말론적 세계관을 피력한다.

인류사의 같은 행적을 더 넓은 시야에서 묘사한 것. 즉, 신국의 요인인 지상도읍과 천상도읍의 발생, 성장, 종국으로 표현 됨.

어거스틴은 인간이란 본래 영육을 막론하고 허약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제시함. 그는 현대의 실존철학자들을 훨씬 앞지른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영육의 한계를 명쾌하게 그리고 체험적으로 제시하며, 인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가능성 즉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을 제시한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에 우리 마음이 당신께 쉬기까지 안정치 못하더이다.”

어거스틴은 죽음에서 인간의 숙명적인 비극을 보는 데 있어 현대인들을 앞지른다. 그는 욥 성인의 성구 “이 지상의 삶은 시련이 아닌가?”(욥7:1)라는 말씀을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죽음을 치유할 수 있는 방도는 달리 없고 오직 그리스도교의 신앙만이 큰 위안과 극복의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의 죽음관과 이교세계에서 가장 고상한 윤리관을 갖고 있다는 스토아파의 죽음관(자살 예찬설)을 대비시킨다.

어거스틴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에게 절제덕, 용기덕 즉 강의덕, 정의덕 등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희랍 윤리사에 흐르고 있는 사원덕(四元德) 사상을 답습하고 있으나 무엇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의가 실천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정의가 결여될 때 로마 제국의 정복이라는 것을 산적행위로 몰아세운다

정의 문제의 일화; 붙잡힌 해적과 알렉산델 대왕과의 대화이다. 대왕이 그 해적에게 그렇게 바다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느냐고 하자, “그것은 왕이 세계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작은 배로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큰 함대로 하기 때문에 황제라 불리운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의는 각 사람에게 그의 것을 주는 것(빼앗는 것이 아니라)이라고 정의함.

어거스틴의 ‘전쟁과 평화론’; 전쟁의 참상도 인간의 모든 불안. 소란도 결국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평화의 희구는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발로, 인간생존의 근본요인이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승리를 통한 영원한 평화에 도달하려는 것이지 평화를 통해 전쟁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전쟁 없는 평화는 성립되지만 평화 없는 전쟁은 성립되지 못한다.

또한 평화는 질서에 성립된다. 사물의 평화는 사물의 평온이다. 인간사회의 평화는 정의의 질서의 요청이다. 이런 정의 질서의 요청은 벌과 상의 변증법적 프로세스로 나타난다. 이 요청은 이 지상에서 충족되지 않으므로, 지상의 평화는 즉 여기의 평화는 불완전한 평화이며 그것은 하느님께 근거하는 저기의 평화, 인류정복(淨福)을 내포하는 평화를 지향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지배하는 정의 위에 이루어지는 평화이며 즐거움이 충만한 평화이다. 이런 정복의 평화 혹은 평화의 정복은 인간의 모든 바람을 세우는 최고선이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 삶의 종국 목적인 최고선과 평화를 연결시킨다. 행복과 평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희랍사상의 중심개념인 최고선을 그리스도교적 관념으로 승화시키며 모든 존재의 근거 존재인 하느님 안에서 최고선과 정복, 영원한 평화, 영원하고 성스러운 안식을 일치시키면서 신국론의 대단원을 내린다.

430년 힙포의 주교로서 사망하기까지 주교로서의 사목직무에 열성적이었고 시민들의 상담역인 시민법관도 담당했다.

(이 외에도 그의 젊은 시절의 사념들을 사로 잡았던 사상들에 대한 반박과 호교론적인 저술들이 있다.)[마니케이즘에 대한 논박], [도나스타파에 대한 논박], [펠라니안파에 대한 논박])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1533
9209
2024-01-11
(포토에세이)<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서문-(1)

옮긴이의 글

헨리 코레이 지음,  유니스 윤경남 옮김

 

 

---최근에 차동엽 신부와의 대담집에 “모든 것이 은혜였을 뿐이다”라고 자신의 인생관을 적었던. 가톨릭교회의 거성 정의채 몬시뇰님이 올해 정초에 선종하셨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그를 생명의 시냇가에 인도해 주셨으리라 믿으며, 새삼 몬시뇰님에게 빚진 마음으로 기도하며,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서문”을 정리해본다.--

 

성자 어거스틴 연구가이며 이 책의 가톨릭 용어를 일일이 가르쳐 주셨던 정의채 신부님을 흰 눈이 덮인 가톨릭대학교로 찾아가 뵈었을 때, 향기로운 커피를 손수 끓여 주시던 일이 얼마 전의 일 같기만 하다.

 

지금 새삼스레 떠 오르는 일은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밀라노를 찾아갔던 일과, 우연찮게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여러 번 여행하게 되었던 나는 오랜만에 부드럽고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밀라노 대성당The Duomo가 시간대로 변하며 빛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성자 어거스틴 성당을 찾게 되었다.

어두운 성당안의 빈 의자에 잠시 앉아 기도하는 동안, 미국의 헨리 코레이 목사가 쓴 전기소설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을 번역하던 때의 뜨거운 감동이 되살아났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긴 했으나 도저히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복잡다단한 열정의 화신인 타가스테 사람, 북아프리카의 성자 어거스틴의 일생을 부드럽고 알기 쉽게 묘사한 코레이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는 동안, 너무나 극적인 여러 장면에 감동되어 내 원고지는 ‘눈물의 원고’가 될뻔했다.

 

신학자 어거스틴 보다 어머니 모니카의 입장에서, 그리고 어거스틴을 사랑하는 여인 멜라니의 처지에서 더욱 그러했다. 모니카가 겪는 가정생활의 습관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남편과의 갈등을 아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승화된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더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관료적이고 정열적인 아버지를 닮았으나 늦게야 어머니의 영적인 성품을 찾은 어거스틴. 그의 깊은 마음 속에서 진리로만 알고 헤매며 쌓아 올린 지성의 탑이 참된 진리를 만나며 무너져 내리기까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얼마나 피땀 어린 눈물을 흘렸을까.

특히 이곳 밀라노에 왔을때 모니카는 아들 때문에 암부로시우스 감독과 여러 차례의 상담을 하곤 했다. 당시 밀라노 교구 감독인 암부로시우스는 쟁쟁한 수사학 교수로서 비판적인 태도로 이따금 교회에 참석하는 어거스틴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모니카를 위로해 주었다.

“당분간 그를 혼자 놔두십시오. 스스로 잘못된 믿음을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이 함께 하실 겁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함께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하기 위해 드린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를 하느님은 마침내 들어주셨다.

12년을 함께 살아 왔으나 결혼도 못하고 헤어진 멜라니와의 사랑의 종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 그리고 그와 함께 마니교의 길을 걷고 있는 줄로 믿었던 절친한 친구 스펜디우스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자기 어머니가 원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충격적인 일들이 그에게 한번에 몰아닥쳐왔다.

드디어 마음 속에 줄곧 타올랐다가는 스러져 버리는 진리에의 방황도 밀라노의 한 작은 집 뒤뜰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흐느끼는 어거스틴의 오열과 함께 폴발해 버렸다. 그때 담너머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천사의 음성처럼 그에게 이상한 영감을 주며 마음의 눈을 뜨게 했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하는 듯한 소리에 따라 그는 친구와 함께 앉아 있던 의자로 뛰어가 좀 전에 꺼내 온 성경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로마서13:13~14)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찾은 그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완숙 시키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어거스틴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와 온갖 감회가 어두운 제단으로부터 내가 앉아 있는 이 맨끄트머리 의자에까지 출렁이며 넘쳐 흐르는 듯했다. 

어거스틴이 그의 깊은 상념에서 마음 속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참한 허무와 고통에 울부짖었고 드디어 그의 양심의 소리, 즉 하느님의 음성을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 

그후 그는 알프스산의 카시키아쿰 농장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보내다가 387년 3월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으려 밀라노로 다시 돌아와 암부로시우스 교회에 나갔다.

그 당시 로마교회는 혼란기에 있었고, 교회의식 가운데 찬미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때였는데 암부로시우스 감독은 자신이 손수 신앙시를 지어 교회 안에서 부르게 했다. 젊은 시절에 자작시를 낭송한 적이 있고 음악에 조예가 있던 어거스틴이 교인들이 찬미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하여 지은 시가 있다.

 

당신의 앞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 나올 때,

그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 노래는 경건한 시냇물이 되어 

내 좁은 마음에 흘렀습니다.

나는 한 아름의 위로를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요. 

얼마나 울었는지요.

 

암부로시우스가 그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는 시편 42편을 읽었다. 암부로시우스는 그 ‘목마른 사슴’의 얼굴 위에 입김을 불고, 그의 이마와 입술에 십자가를 긋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나도 학생시절에 찬양대에서 부르던 ‘목마른 사슴의 노래’(시편42편)를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다.

 

오-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함 같이

당신 사모하나이다, 주여…

 

나도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처럼, 그 때의 어거스틴처럼 목이 마르고 메어온다. 그러자 나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그 무엇이 이 성당안에 함께 있음을 느꼈다. 그 순간 사랑하는 님을 만난 듯한 안도와 평온함이 갈증으로 갈라진 내 심장에 단비처럼 적셔주며 치유해 주는 듯했다.

어거스틴은 천사와 같은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나는 어거스틴이 부르는 찬미소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느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nyoon
윤경남
111357
9209
2024-01-04
(포토에세이) 은빛인생의 보금자리 Silver Life in Shalom


  
 


요즘 신문에서 토론토 한국노인홈 “무궁화의 집”이 5월쯤 기공식을 하리라는 이야기로 많은 노인들의 마음을 부풀게 하고 있다.

우리가 노년이 되어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여러 해 전에, 한국의 샬롬노인문화원에서 노인복지사업에 종사하는 분들 약 40명을 모시고 일본의 세이레이 노인복지사업단 (聖隸老人福祉事業團)을 둘러보았던 일이 생각난다.
 
일본 중의원을 7번 역임하면서 1952년에 일본의 노인복지법 제정에 앞장 선 하세가와 다모쓰 장로가 설립한 세이레이복지사업단은 마치 그의 혼(魂)과 백(魄)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승화되어 강물같이 흐르는 곳임을 느끼게 했다.
지금은 일본 전역에 130여 사업단으로 발전한 세이레이사업단의 출발지인 하마마쓰에 나는 두 번이나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첫번 ‘93년엔, 노인복지시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편과 함께 샬롬노인문화원 복지사업을 위한 견학 겸 하세가와 장로를 방문했다.
91세인 그분을 만났을 때의 충격적인 인상으로 인해 나는 그의 자서전 두 권을 (제1권 “밤도 낮처럼 환하게 빛나리”, 제 2권 “주님, 나의 잔이 넘칩니다”) 번역해서 노인복지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책들은 지금 절판이 되었지만 누군가가 다시 만들어 보급한다면 노인복지사업을 위한 투지와 성공의 비결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방문은 2000년에 샬롬노인문화원에서 ’은빛계절대학’ 학생들이 그곳을 견학했을 때였다
7년 만에 다시 찾아 간 그곳에 하세가와 장로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지만, 바쁜 우리의 교육일정 속에서도 네기 과장님은 나의 부탁대로 하세가와 장로님의 유골이 전시된 의과대학 실험실에 안내해주었다.
 
고희 생일 아침을 맞은 하세가와 장로부부가, 그들이 설립한 하마마쓰 의과대학에서 해부용 시신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들의 사후 유체를 의과대학에 헌납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들의 유해가 의과대학에서 해부실습을 마친 후 시신을 황산에 용해하여 유골표본을 만들어 기증하면, 죽은 다음에도 그들은 쓸모 있는 헌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한 뜻을 알고 찾아 왔는 데도 하세가와 장로는 다시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그의 유해는 유리표본실 안에 보통 유해처럼 가로누워 있질 않고, 씩씩하였던 하세가와 장로답게 그 큰 키가 우뚝 서서 나를 맞아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그분의 앙상한 손과 악수할 듯이 마주 대보며 인사를 했다.
“장로님, 우리 한국의 노인복지를 위해 기도해주시더니, 이제 우리 은빛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어요. 계속 기도해 주셔야 해요.”하면서 눈물대신 미소를 보여드리고 나왔다.  
 
1993년에 미우라시의 아브라쓰보 에덴원을 방문했을 때의 감동과 부러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7년만의 이번 방문엔 무언가가 심상찮게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보아 온 현대식 복지시설 건물과는 아주 다르게, 회색지붕과 지붕들이 정답게 잇대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사업단이라기 보다는 이나사라는 동네의 ‘공원 같은 마을’, 그리고  ‘내 집 같이 느껴지는’ 이나사 아이코엔 (引佐愛光園)이었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노인들은 내 집 혹은 내 집같이 느껴지는 데서 노년기를 보내고 싶어한다.  아무리 최신장비와 시설을 갖춘 곳이라도 수용소 같이 느껴진다면 불행하기만 하다. 적어도 내 집 혹은 자신의 본향에 가는 터미널같이 느껴지는 시설이 필요한 시대에 이르렀음을 이나사 아이코엔 (引佐愛光園)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 했다.

이곳엔 완전히 입실한 분 들과, Day Care형식으로 자기집에서 매일 다니는 분들이 있다.  식사, 의료시설, 교육 프로그램 등을 무료로 제공 하고, 그 경비는 세이레이 사업단과 하마마쓰 시가 분담한다. 특히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천사 같은 미소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죽음 뒤에 오는 다음 세상에 대한 희망의 빛이 되고 있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원하면 가족이 옆에 머물도록 숙소도 배려하고 있다. 주위에 빼곡하게 심은 나무와 철철이 피게 마련 한 꽃들이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원예치료 역할을 하며, 가는 곳마다 조용하게 흐르는 선율은 아마도 음악치료실에서 들리는 듯 지나가는 우리 나그네 마저 편안하게 해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인시설이라고 하는 미국 안에도 몇 군데 둘러 보았지만, 너무나 개인취향에 맞추어 화려한 것이 동양적인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이나사 아이코엔은 우리가 활용하기에 아주 알 맞는 시설이다. 일본의 노인시설이 성공하는 공통적인 이유가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 유치원교육 같은 것이지만, 우리나라 노인들이 이것만 지킬 수 있다면 어떤 시설, 어느 동네에 살든지 성공적인 노후가 될 수 있고, 내 은빛인생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