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기(歸鄕記)

 


김영곤 수필
(University of Waterloo 교수, 세종학원 한국문학 교수)

 

이번 여름에 한국에 가면서 나는 무슨 해결해야 할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구를 꼭 찾아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대구가 내 고향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태어난 곳으로 고향을 말하라면 함경남도 함흥이요, 또 어떤 사람들처럼 본적지로 이야기한다면 경상남도 마산이다.

공교롭게도 함흥이나 마산이나 다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나는 경우에 따라선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와 점철(點綴)된 고향의 기억을 가질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인 대구가 내 고향이 된 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대구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일제시대에 전기회사에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타향살이를 하던 우리 가족이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대구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장난 심하던 유년 시절과 생각 많던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니 그곳에 얽힌 추억과 사연이 아련하지만, 지금까지 애써 찾지 않았던 것은 그 아련한 그리움만큼 마음의 상처가 컸던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속해서 문학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된 연유를 만약 유전적인 요소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그때 동아일보에 장래에 촉망되는 어린 문학가라고 소개된 적도 있었으며, 지극히 보수적이던 우리 아버지 집안에 시집와서도 틈틈이 글을 쓰시던 분이었다.

그 어머니가 내가 중학교를 입학하던 봄에 그 당시 이미 병환에 계시던 아버지를 두고 돌아가시자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열네 살짜리 소년이던 나에게 준 충격은 말로 표현 못할 지경이어서 옛 문자 그대로 하늘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중학 시절 삼 년은 번민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당시 내게 닥쳐온 현실적인 어려움도 헤쳐나가야 했지만, 그 무렵 나는 한창 관념의 세계를 헤엄치고 있을 때라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누구나 그 시절을 통과하려면 상당한 대가는 지불해야 하는 거지만, 그 기간의 어떤 부문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나한테는 혹독했다고 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이젠 그 시절도 기억도 아스라한 옛일이 되고 보니 그 어려웠던 부분조차도 내 인생에 있어서 버릴 수 없는 소중한 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만, 나에게 그 중학 시절은 참으로 고독했고 삭막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당시의 나에게는 책 읽는 것만이 구원이었는데, 때로는 책들을 잔뜩 구해가지고 벽장 속에 수북이 쌓아놓고 정말 밤낮없이 읽어댄 적도 있었다. 그럴 때 잠시 책을 놓고 환한 바깥에 나오면 현실과 책 속의 세계가 혼동되어 몽유병 환자와 같은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독서 시절에 있어서 “폭풍 노도(怒濤)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계통도 없이 무질서하게 닥치는 대로 읽어서 그 당시의 내 머릿속은 가히 무정부상태라 할 만했다.

그것은 체홉, 헤르만 헤세, 토마스 하디, 투루게네프, 까뮈, 어네스트 헤밍웨이, 생 떽쥐베리, 죤 스타인 벡, 잭 케루악, 등등의 개성과 사상이 다른 여러 작가가 큰 응접실에 편리한 대로 둘씩 셋씩 여기저기 모여 앉아 있는 묘한 풍경과 흡사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헤르만 헤세를 정말 줄기차게 읽었는데, 그만한 나이에 당연하다고도 생각되지만, 헤세의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정적에 잠긴 수도원이나 안개 낀 전원의 모습은 나에겐 더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였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나 “데미안”을 빼놓고 어떻게 내 소년 시절의 정신적 순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는 그 어려운 중학 시절을 헤세를 읽으면서 넘겼다고 할 수 있다.

책 읽기 말고 그 중학 시절의 나를 구원한 것은 친구들과의 어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창 장난스러울 수도 있고 한창 심각할 수도 있는 십 대 소년인 우리들은 근교의 과수원에 가서 사과 먹기 내기를 하는가 하면, 산사를 찾아가 그 고아한 분위기가 괜히 머쓱해서 절 앞 계곡에서 가재를 잡는다고 바위를 뒤집곤 했다. 때로는 같이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불을 싸 들고 돌아가면서 한 집에 모여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열을 올리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중학 시절을 마치자마자 나는 황황히 대구를 떠났다. 그 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러는 동안에 가끔 밤 기차를 타고 대구를 잠깐 다녀가곤 했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밤 기차를 타고 생각에 잠겨 어두운 밖을 내다보며 몇 시간을 달려가노라면 가는 동안에 기차를 올라타야 했던 그 감정의 앙금이 사라져서 다음 날 새벽에 대구에 도착하자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생활을 하다가 캐나다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던 외국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은 정말 모를 일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의 두 배나 되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캐나다에서 사는 동안 서너 번 잠깐씩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너무 급히 다녀오느라 느긋하게 대구를 찾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사실 마음의 여유보다 대구에는 벌써 오래 전에 나의 먼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이 거의 떠나버려, 이제 그곳은 내 어린 시절의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는 것과 그곳 어디에는 아직도 몇 명의 옛 친구들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개연성 외에는 내가 대구를 방문할 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야기가 좀 장황해졌지만, 하여튼 이번 여름 서울에 도착해서 몇 군데 연락만 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고속버스 정거장에서부터 영 길을 알 수가 없어서 누가 보아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고향에 돌아와 이미 흔적이 사라져버린 옛 고향의 모습을 보고 낭패해 하는 귀향객의 모습이 완연했는데, 이리저리 헤매다가 가까스로 희미한 기억이 나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니 이유도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기억을 더듬어 옛날 중학교를 찾아갔는데, 길 한 모퉁이를 돌아가니 저만치 내 기억보다는 조금 작기는 하나 눈에 익은 모교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거리를 떠난 지 꼭 35년 만이었다.

학교 앞길이 널찍하게 확장되는 바람에 학교 앞 마당은 좁아지고 정문은 옆으로 비켜나고 했으나 짙은 담장이에 둘러싸인 옛 건물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 담장이에 둘러싸인 학교를 삼 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드나든 때문에, 나는 그 후에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하여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는 학교란 모름지기 담장이 덩굴에 덮여야 한다는 엉뚱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현관을 통해서 건물을 들어서니 방학인데도 몇 명의 학생이 나와서 좀 어두컴컴한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옛날과 변하지 않는 풍경인가. 나는 지금이라도 내가 곧장 복도 끝에 있는 교무실에 들어가 청소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교무실 옆에는 글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시인 장만영의 “다시 만나는 날은”이라는 시였다.

 

이런 이별을 위해

우리 만난 것일까?

이런 아픔 주려고

만남을 준비했던가

 

다시 만나리란 생각을

하고 또 해 보지만

그저 멀리만 느껴지는 시간들

 

언제 다시 만나서

그 옛날의 추억들을 다시 만들까

다시는 못 만난다는 생각에

두 눈에 눈물 고이고

가슴엔 안개가 끼네

 

 

그 옛날 학교 졸업식에 읽혀질 만한 다분히 감상적인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 시가 그 시간에 참 걸맞은 장소에 걸려있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떠나서 나는 35년 만에 이렇게 혼자 돌아온 거라는 생각이 잠시 내 머리를 스쳤다.

어두운 복도에 서서 벽에 걸린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던 젊은 여선생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층에 있는 옛 교실까지 올라가 보았을 것이다. 밖으로 나와 교정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으니 아까 청소하던 녀석들 같은데 옆에서 저희끼리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친다.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그 중 한 놈을 불러 학교 교정을 배경으로 내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 하고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중학교 일학년이라고 한다.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저만할 때 그렇게 심각하게 삶에 대해 번민을 하고 착잡한 감정의 기복을 겪었던가 하고 생각하니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게 된다. 어쨌든 저 나이에 나는 이 교정에 있었고, 그리고 3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 머리에 흰 서리를 얹고 돌아와 그 교정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자기 친구가 웬 낯선 어른과 사진기를 들고 얘기를 나누는 걸 옆에서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곁눈질하고 있던 네댓 명의 아이들에게, “야, 너희들, 이 아저씨와 사진 한 장 같이 찍자.” 했더니, 입가에 장난기가 다닥다닥한 그 아이들이 싱글거리면서, “왜 우리가 아저씨하고 사진 같이 찍어요?”하고 반문한다.

 “야, 이 아저씨도 옛날에 이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하는 내 말을 듣더니 금세 고분고분해져서 내 주변에 둘러서 사진 찍을 자세를 잡는 것이 귀여웠다.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의 시구가 생각이 났다.

 

少小離家老大回

鄕音無改髮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젊은 나이에 떠난 고향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 사투리 한결같고 나는 백발.

아이들을 만나도 알 리가 없고

어디서 오는 나그네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나는 아이들과 작별하고 나오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8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고 있는 교정은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평화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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