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기고 코너

gigo
5A354B95-E387-4A7D-894B-232918D8CCAC
60684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87
,
전체: 169,054
부동산캐나다

기고코너
메뉴 열기
gigo
기고
113041
10675
2024-03-21
달맞이꽃의 신비/최문애숙

 

땅거미가 내리면 우리 부부는 뜨거운 대낮을 피해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시간에 산책한다. 달빛 아래 우리 집 안뜰에 노란 꽃 한 송이가 솟아오르는 것이 눈에 띈다. 수많은 꽃봉오리가 몇 초마다 꽃잎을 열며 팍팍 소리를 낸다.

우리 집에는 매해 여러 가지 꽃이 피고, 지고 또 핀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이 많은 꽃 중에 밤에만 피고 지는 달맞이꽃의 신비에 푹 빠져 산다. 새벽에 일어나면 물주며 꽃들에게 안녕 인사 나누고 저녁에는 새로 태어날 달맞이꽃 맞이로 바쁘다. 달맞이꽃은 이름대로 달이 뜨면 꽃이 피고 달이 지면 꽃을 닫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달맞이꽃은 해질 시간에 꽃을 피우고 해 뜰 새벽녘에 꽃을 닫는다. 그러나 비 오는 날과 바람 부는 날은 예외로 더 일찍 꽃을 피우고 더 늦게 꽃을 닫는다. 내가 본 달맞이꽃은 시원하고 어둑한 날씨를 좋아한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자 남편은 가장 먼저 잡초 제거 작업을 했다. 먼저 민들레꽃의 솜털이 사방에 날지 못하게 그것을 뿌리부터 뽑았다. 뽑아낸 잡초 중에 놀랍게도 이 식물만은 제발 뽑지 말라고 부탁한 것까지 죄다 뽑았다. 아마 남편은 이 식물을 민들레로 착각한 모양이다.

언뜻 보면, 이 식물은 민들레처럼 생겼다. 그러나 달빛에 하늘거리는 노란 달맞이꽃의 신비를 보았다면 결코 남편은 뿌리째 뽑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잘 살펴보면, 달맞이꽃의 잎새는 민들레보다 길고, 가늘고, 끝부분은 피침처럼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많이 나 있다. 저녁 바람 따라 꽃대는 하늘로 치솟고 봉오리는 창검처럼 뾰족하다. 식물의 키는 손의 반 뼘 정도 작고, 땅 가까이 넓게 퍼지며 자란다. 식물의 너비는 손의 세 뼘쯤 넓고, 원형 중심으로 각기 잎새가 다섯 겹쯤 겹치며 큰다. 하트형의 꽃잎 4 개가 활짝 펴면 십자가 모양이 된다. 짙은 초록색 잎새 밑에 따닥따닥 많은 봉오리가 붙어있다. 5 월 중순부터 늦여름까지 많은 꽃을 피운다. 해 질 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꽃봉오리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병사들 같다.

 

‘그리움 또는 기다림’이란 낭만적인 꽃말을 가진 이 식물은 달을 기다리며 꽃을 피운다고 하여 달맞이꽃 또는 월견초라 부른다. 저녁 바람 따라 달맞이꽃은 신들린 무녀처럼 춤을 춘다. 어찌 보면 진통하는 산모 같다. 걸친 겉옷을 다 찢어내고 꽃잎을 열면, 가슴 한가운데 네 개의 더듬이를 가진 암술 하나가 우뚝 서 있고 그 둘레에 8 개의 수술이 은은한 레몬 향기를 내며 나방과 밤 곤충을 유혹한다. 짧은 여름밤에 종족 보존을 위해 고심 분투하다 새벽이 오면 누더기처럼 쭈글쭈글한 빛 바랜 꽃잎을 반쯤 접고 미수 지난 노인처럼 힘없이 그때를 기다린다.

 

꽃봉오리들이 소리 내며 새 생명이 탄생할 때는 너무 신비로워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작은 몸에 이렇게 많은 봉오리가 해 질 녘 거의 같은 시각에 꽃잎을 열고, 동트기 전 거의 같은 시각에 꽃잎을 닫는다. 인간에게처럼 식물에도 생체시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 꽃은 영어로 저녁에 피는 장미 Evening Primrose 라 한다. 어둔 밤에 나방이나 밤 곤충의 눈에 잘 띄게 이 꽃은 하얀색에 가까운 연노랑 색을 가졌다. 북미주 원주민들이 약초로 쓴다는 이 식물의 원산지는 북미주로 약 125 개 종류 중 하나가 나의 정원에서 자란다.

 

달맞이꽃은 왜 많은 꽃처럼 꿀벌과 나비가 일하는 대낮에 피지 않고 달과 별이 뜨는 밤에만 꽃을 피울까? 뜨거운 대낮에는 어떤 미동도 없다가, 저녁 바람이 불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여기저기 불끈불끈 꽃송이들의 잔치가 열린다. 아기 손만큼 큰 꽃송이들이 색과 향기로 밤 곤충을 유혹하여 씨앗을 맺는 일이 이들의 생존 전략이라니 얼마 전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받았던 한인 여배우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이혼 후, 홀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니 돈이 필요해서 어떤 배역도 마다하지 않고 다 맡아 연기했더니 감사하게도 이런 상까지 받네요.’ 얼마나 진솔한 말인가! 달맞이꽃의 생존 전략을 듣는 것 같다. 종족 보존을 위한 이 꽃의 치열한 분투가 바로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우리 모든 어머니의 분투가 아닐까? 경쟁이 심한 대낮보다 선선한 밤을 택해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이 꽃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이야기다. 고작 몇 시간 한 송이 꽃을 피워, 씨앗을 맺는 달맞이꽃의 생존법은 곧 자식을 위한 우리 어머니들의 헌신적 삶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달맞이꽃이나 우리 어머니들은 삶의 경쟁에 승리자며 말 없는 영웅들이 아닐까? 차세대를 준비하는 이들의 지혜로운 전략이야말로 어떤 시상이나 악상이나 철학을 초월한 자연법칙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새벽이 오면 찢기고 빛바랜 달맞이꽃의 주름진 처연한 모습은 인생의 모든 고초를 다 이겨낸 우리 어머니들의 지친 바로 그 모습이다. 초저녁에는 그리도 곱고 빛나더니, 옛적에 나도 너처럼 그렇게 곱고 빛났던 시절이 있었다. 어두운 밤에 하얗게 지붕을 덮었던 박꽃처럼 나도 어두움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리란 꿈도 꾸었다. 그러나 너의 새벽처럼 이제 나의 그때가 오고 있다.

달맞이꽃의 신비는 알면 알수록 끝이 없다. 비록 왜소하고 천덕꾸러기 민들레처럼 보여도, 이 꽃의 무궁무진한 신비는 아마 오래오래 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것 같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2901
10675
2024-03-14
제자리-허정희(문협회원)

                                                        허정희(문협회원)

 

 

먼 길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자리 밴쿠버로 돌아오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3년이 30년처럼 느껴질 만큼 도시는 변해 있었고,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 도시 속으로 걸어가 보았다.

하루아침에 코로나가 세상을 뒤흔들었고, 밴쿠버에 살고 있던 나도 흔들렸다. 홀로 계신 시아버님이 걱정되어 온타리오주 워털루라는 도시로 남편과 함께 떠났다.

워털루에 봄이 오면 수선화에서 히아신스, 목단화로 정원이 바뀌었고, 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울 때면 자리다툼이 시작되었다. 잔디 사이로 솟아난 민들레는 뽑을수록 땅속 깊이 뿌리를 감추었고, 해마다 수를 늘려 돌아오는 정원의 꽃이나 풀도 자리가 있었다. 풀들이 제자리를 고집하고, 옮겨 심은 꽃들이 시들어 갈 때면 내 욕망도 함께 사라져갔다. 꽃 속에서 오는 계절을 느끼고 숲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배웠다. 긴 겨울이 되면 흰 눈이 가을을 덮어 정원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여름날의 관심은 나에게 집중되어 겨울나기가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이 주는 단절된 외로움에 더운 위로를 찾아 사우나로 향했다. 뿌연 연기가 가득한 습식 사우나의 문을 열고 자리를 찾아 누웠다. 벽에 붙은 관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텅 빈 방을 채웠고, 얼어있던 몸 위로 내려앉았다. 후끈한 열기가 뿌연 연기 사이로 내려와 흘러내린 땀과 습기가 하나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장되었던 근육을 풀어 놓으니, 몸이 흐느적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긴 호흡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갈 길 잃은 수증기가 워털루와 함께 사라져갔다.

 

밴쿠버는 비 오는 날이 많고 안개가 자주 내린다. 바닷가 근처에서 피는 해무, 가시거리를 크게 줄이는 연무, 그리고 안개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로 옅은 박무가 있다. 해무와 연무 그리고 박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 도시를 안개의 도시라 부른다. 안개의 도시 밴쿠버에서 마주한 새벽은 화려한 건물도, 차량의 복잡함도, 모두 안갯속에 가리어 나와 안개뿐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호흡이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침묵하는 한겹의 안개에 덧대어있다. 새벽안개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서서히 사라지는 안개는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고, 그 선이 하얀 띠처럼 얇아진다. 그것은 희망과 절망을 구분하는 선처럼 존재하다 빛에 의해 사라져가고, 삶도 죽음도 경계 없는 하나가 된다. 사는 동안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었던 나의 선들을 안개에 놓아 보낸다.

 

안개는 비어있는 것도 아니고 채워진 것도 아닌, 보이듯 안보이듯이 살라고 한다. 멈추지 않는 흐름 속에서.

새벽안개가 짙으면 맑은 하루를 약속하듯,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햇살에 눈이 녹듯 사라지는 안개가 품고 있던 산과 도시를 내게 주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사라진 안개가 남기고 간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나를 감싸주었다. 나의 것을 주고 비우니 비워진 나를 안개가 채워준다. 안개 속에서는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렸고, 긴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내일이 되어 모호하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밝게 빛나야만 했고 선명하게 보여야만 믿을 수 있는 나의 믿음도, 영원할 것 같은 시간도, 안개가 되어 지나가 버렸다. 안갯속에서 길을 찾아 방황하던 젊음도 기다림 속에 핀 안개꽃이 되어 사라져 갔다. 환한 세상에서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안개가 지나가고, 삶의 명암이 드러나면서 그 깊이를 알게 되었다.

 

안개 속에서 푸른 하늘을 꿈꾸며 헤매던 젊은 날의 안개가 멀어지고, 햇살처럼 스며든 시간이 데려온 60대. 나의 자리에 서보니, 곁에 있는 가까운 것들이 보이고, 그들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살면서 삶이 버겁고 숨이 찰 때 나를 보듬어준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쉴 수 있어 편안하다. 밴쿠버로 돌아와 바라보는 나의 자리에는 시간이 남기고 간 삶의 주름이 놓여있다. 아이들은 자라서 갈 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나를 안아주는 비와 안개가 있고,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산이 있어 좋다. 내 마음이 있는 곳, 어디에 가 있어도 돌아가고픈 그곳.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이 나의 자리임을 느낀다.

흰 눈이 가을을 덮어 화려했던 정원도 쉬어가고, 긴 겨울의 사우나는 나의 쉼터가 되고, 안개는 고단했던 방황을 품어준다. 안갯속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햇살 아래 드러나 하루를 열고, 나의 하루도 바쁜 도시의 움직임으로 들어간다. 도시는 늘 제자리였는데 나만 그곳에 없었다는 서운함이 내 눈을 가려 내가 보려 하지 않았다. 눈앞의 서운함을 덜어내고 바라보니 보이듯 안 보이는, 멈추지 않는 하루가 흐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2755
10675
2024-03-07
그와 함께한 마지막 겨울-고길자 (문협회원)

 

팔십 평생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았던 남편에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투병을 시작했고 나 역시 무릎이 좋지 않아 간병하는데 힘이 들어 아파트로 이사했다. 늘 주택에만 살다가 아파트 생활이 처음인 우리에게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울어대는 알람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코로나 때문에 두 명 이상 탈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길게는 십여 분 이상을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남편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서 작은 일 하나에도 크게 불편해했다. 그는 긴 겨울 동안 아파트에 갇혀 꼼짝 못 하고 지내야 할 시간들을 걱정하며 답답해했다. 아무리 추워도 햇볕을 쪼이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궁리 끝에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면 무조건 차를 몰고 공원으로 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Ross 공원에 들어서면 곳곳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 제일 마지막 주차장 한 편에 차를 세우고 따끈한 커피나 차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워낙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이라 그런지 넓은 주차장엔 고작 대여섯 대의 차가 띄엄띄엄 서 있을 뿐 아주 한적하였다. 그 중에 수풀 가까이에 늘 옆으로 세워져 있는 대형 검은색 밴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선을 무시하고 옆으로 차를 세우는 까닭이 무엇일까? 가끔씩 차체 밑을 통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의 두 다리를 보면서 의문이 일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우리의 시선은 먼 하늘과 수풀 속의 나무들을 향한 곳에 머물렀다.

 

차가 휘청일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심하게 흔들리는 나무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행여 가지라도 부러질까 걱정하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바람이 자고 햇살이 눈 부신 어느 날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소복소복 피어난 눈꽃을 바라보면서 그 경이로운 모습에 가슴 떨리는 기쁨을 맛보았던 순간도 있었다.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하던 저 숲속에 꽃과 잎이 풍성한 계절에도 볼 수 없는 순백의 찬란한 눈꽃나무들의 향연을 보면서 가늠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 설레는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나는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추위가 조금씩 풀려가면서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부드러워지던 어느 날 병원 치료를 받고 좀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들 앞에 드디어 검은색 밴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약간의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오십 대 후반이나 육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체격이 크고 긴 머리의 그 남자는 원주민을 연상케 하는 넙데데한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정수리 부분에 둥글게 머리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팬데믹으로 이발을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젊은 남자 두 명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치아가 인상적이었다.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맴도는 사이 그 남자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우리는 그 남자가 자리를 뜨자 곧바로 그가 있던 곳으로 차를 옮겼다.

 

아 이럴 수가! 주차장과 수풀 사이에는 옆으로 길게 잔디가 깔린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온갖 새들과 다람쥐들이 먹이를 쪼고 있었다. 빨간 새, 파랑새, 검정 새 자그마한 참새들까지 수십 마리의 새들과 몸집이 큰 검정 다람쥐와 회색 다람쥐, 한국에서 보았던 작고 예쁜 갈색 다람쥐까지 수많은 생명체들이 한데 어울려 먹이를 취하고 있었다. 다람쥐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열심히 자기 몫을 챙기고 있었으며 새들은 먹이를 쪼다가 창공을 날기도 하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따스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샘이나 갈등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검정 밴의 차체 밑으로 보았던 그 남자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겨우내 숲속의 생명체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생 동물에게 음식물을 주지 말라는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저 새들과 다람쥐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땅을 딛고 사는 이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커다란 인연의 그물 속에서 하나하나의 그물코를 이루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남편과 나는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새들, 피어나는 꽃망울들 그리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눈부신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Ross 공원의 봄은 시작되었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생의 소박한 기쁨으로 다가오면서 무겁고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속에도 서서히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날의 추억을 안고 얼마 후 남편은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와 내가 함께한 마지막 겨울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2305
10675
2024-02-15
어느 이등병의 질문-장정숙(문협회원)

 

 

 노경을 살아가는 내게는 ‘홀로’라는 그림자가 따른다. ’홀로’, 흔한 말이다. 그런데 그 실체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무거움을 껴안고 오늘도 창가에 앉았다. 하늘로 떠도는 흰 구름이 따뜻해 보인다. 그 구름 아래 내가 앉아 있다는 게 새삼 새롭다. 오래 살았구나, 나도 모를 90이 내 것이라 하는데.
 습관처럼 오늘의 일상도 기억을 더듬어간다. 한 단계, 두 단계 숫자를 줄여가며 젊음의 영토로 내려가다가 만난 나의 20대, 그 20대에 나는 전쟁을 만났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내게 던져졌던 한 병사의 말, “외롭지 않으세요”가 지금 내 삶의 주제가 되었다.   
   9.18을 계기로 서울 시민들은 선택 없는 피난을 가고 있었다.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구겨진 짐짝처럼 기차에 실렸다. 나도 그 어느 날 그렇게 기차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울을 탈출한다는 일념뿐,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막연한 남행길에서 오직 확실한 건 ‘덜컥덜컥’ 무거운 차바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차가 대구역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대구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을 코 앞에 두고 보니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기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도 싫어졌고, 대구에 있는 오빠를 보고 가도 되겠다는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오빠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의과대학생이었다. 6.25가 돌발하면서 수업 중이었던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군의관으로 임관되어 지체 없이 임지로 파견되었고, 오빠는 대구에 있는 제27 육군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은 대구역 바로 앞에 있는 공회당이었다. 전시 중 완행열차는 잠시 들려도 될만한 여유가 있었기에 오빠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거기서 6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병원에 손이 모자라니 도와 달라는 오빠의 권유가 있었고, 나 역시 학교 졸업을 앞둔 막막한 처지어서 일단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업무는 약국에서 처방하는 일을 돕는 일이라 하였다. 동상 환자를 주로 취급하는 그 병동에서 필요한 약품은 간단했다. 그 당시 만병통치약이라고 알려진 ‘페니실린’과 복통에 쓰는 ‘구아노진’, 그리고 ‘다이어진’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막연하게 기억한다. 군의관은 치료에 바쁘고, 간호장교는 영어를 잘 알지 못하여 대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 내가 임시 약사가 된 꼴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어제도 오늘도 단가에 실려 오는 환자는 병원의 마룻바닥까지 차지했다. 전쟁에 말려든 국민의 목숨도 하루를 사는 게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군복을 입었다. 그리고 지체할 수 없는 다급한 처지에 군의관과 한 팀이 되어 치료에 나서는 일도 잦았다. 군대 병원의 계급서열은 그 자체가 엄연한 권력이었다. 나는 간호장교와는 달리 취급되었다. 그들은 장교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잤다. 나는 콩나물 대가리가 동동 떠다니는 소금국을 먹는 식탁에 앉았고 침구로 주어진 담요 석 장으로 추운 잠을 잤다. 
국가의 흥망이 엎어졌다 일어섰다 하는 절박한 현실에서 싫고 좋고의 선택은 없었다. 피와 고름으로 썩어가는 젊은 육체를 보는 일상은 그 자체가 혼돈이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북전쟁은 같은 민족이라는 기이한 운명만큼 기약 없는 방향으로 밀려가면서 나도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병실을 돌고 있는 나를 부르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돌아보니 유난히 맑은 눈이 인상적인 병사였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그럼 왜?. ” “외롭지 않으세요?”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외롭다는 말,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연약한 호소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의 명찰을 보았다. 장씨 성을 가진 이등병이었다. 같은 장 씨라는 우연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를 간호장교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 아. 얼마나 그리웠던 나의 정체성 회복이었던가. “저어…” 라는 호칭으로 그는 나를 불러주었다. 군모를 쓰지 않으면서 군복을 입어야 했던 여자는 장교 배지가 달린 모자의 챙을 깊이 내려쓰고 위세를 부리는 무리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병사를 기억했다. 동국대학에 재학 중인 신분과 그의 맑은 눈, 그리고 그의 발가락으로. 그의 얼굴처럼 흰 발가락은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된 채 엄지발가락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 병사는 나날이 회복세를 보였고 그즈음 나는 그 병동을 떠나 나의 길로 돌아갔다. 
  나는 백발노인이 되었다. 흔들의자를 흔들며 ‘삐걱삐걱’ 의자가 만들어내는 마른 소리를 벗 삼아 그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간다. ‘너도 늙었구나, 내 육향(肉香)이 배어 매끈하게 낡은 안락의자는 같이 지내온 세월의 감촉으로 나를 맞지만 내 안에 응축된 ‘나 홀로’의 감성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70년 전 무심하게 들었던 그 한 토막 말이 이제 내 생활의 주격이 되었다.  기약 없는 전쟁에 목숨을 맡겨야 했던 한 병사의 말, “외롭지 않으세요”. 그 물음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적법이었던 그 시대,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에 그도 나도 모두는 국방색 일색으로 뛰어야만 했다. 작은 쇠붙이 한 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부조리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었고 호소하고 항변하는 자는 배신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젊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허망과 절박한 심정을 병사는 그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 외롭습니다”. 미루었던 답을 나는 지금 한다. 이방의 땅과 하늘 사이에 앉아 있는 90 인생의 실상이다. “당신의 외로움은 젊음이었고요. 나는 외로움을 벗 삼아 늙고 있습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2099
10675
2024-02-08
강아지 오줌-박엘리야(문협회원)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발이 푹푹 빠졌다. 눈을 치워놓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빈틈 없이 눈으로 덮인 마을에 눈이 부셨다. 
길가에 치워둔 눈이 높게 쌓여서 기다란 성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새하얀 성벽에 드문드문 노란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강아지 오줌이었다.

 

그것은 강아지들이 벌이는 치열한 영토 전쟁의 잔해였다. 강아지들은 매일 군데군데 오줌을 싸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에 열심인데, 평소에는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세상이 하얗게 변하자 그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는 것처럼 내가 강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신선했다. 강아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나니 강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했다. 매번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강아지의 열정이 이제 이해될 것도 같았다.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던 갈색 강아지가 한참 진지하게 노란 모퉁이를 살피더니 오줌을 쌌다. 차갑게 언 옅은 노란색 위에 선명한 노란색이 덧입혀졌고, 모퉁이에 남겨둔 한 강아지의 냄새는 다른 강아지의 냄새로 덮여 버렸다. 어떤 강아지가 고심해서 남겨 두었을 흔적은 그렇게 쉽게 스러지고 말았다.

 

이곳은 여전히 똑같은 길모퉁이지만 이제는 다른 강아지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비록 그 강아지는 내일 또 이 자리에 와서 자신의 영역을 되찾겠지만 그때까지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갈색 강아지의 영역이었다. 그렇게 뺏고 뺏기는 영토 전쟁으로 하루가, 한 주가 지나간다.
일 년이, 십 년이 흐르고 나면 그 자리에 있던 강아지들은 더 이상 오지 않고 다른 강아지들이 그곳을 차츰차츰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강아지들의 흔적도 시간이 지나면 다음 세대의 강아지들에 의해 덮어질 것이다. 
변화의 사슬 속에서 정작 모퉁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 사건의 중심부에서 누가 자신을 점령하든 간에 모퉁이는 다만 존재할 뿐이다. 
모퉁이의 기나긴 침묵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마도 나는 그 모퉁이에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화를 낸 대상은 모퉁이 너머에 있는 무언가였다. 시간이었다. 내가 남기는 자국을 평범하게 만들고, 나의 부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버리는 시간이었다. 또한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 앞에서의 내 무력함이었다.
결국 모퉁이에 남겨진 것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던 강아지의 흔적이다. 시간이 흘러 다른 강아지의 영역이 되어 버리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 강아지의 영역이다. 현재의 승리다.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영원한 진실이듯이. 그렇다면 나는 그저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걸까.

 

먼 훗날 나라는 존재가 없던 일처럼 된다 해도 현재의 승리만이 내가 바랄 수 있는 전부일까.
시간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역 표시를 하던 갈색 강아지를 다시 바라본다. 그 모퉁이를 지나 또 다른 노란 얼룩을 열심히 찾고 있다. 코를 들이 박고 열심히 검토하더니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 이 순간 갈색 강아지가 길모퉁이에 오줌을 싼 것은, 전에 있었던 강아지가 그 자리에 오줌을 쌌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곳에 있던 강아지가 남긴 흔적은 다음에 올 강아지를 행동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과거에 있던 존재는 현재 살아 움직이는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과거의 너와 현재의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어낸 기다란 끈의 일부로서 이 세상을 다녀간 모든 것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생명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낼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1678
10675
2024-01-18
영혼의 자서전-김정수 문협회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화창하던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창 밖의 초목들은 거센 바람에 몸을 떨며 휘청인다. 아들의 서른 세 살 생일 아침이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은, 아빠가 고국 방문 중이라 혼자 있는 엄마가 걱정스러운지 자주 안부를 물어 온다. 내가 벌써 아들에게 걱정을 끼칠 만큼 나이를 먹었나 싶어 고마우면서도 울적해진다. 외로운가? 한 순간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로움. 그렇다. 난 외로운 것이 아니라 고독을 사랑하는 것이라며 고집부리고 있다.

 

어렸을 때, 교회 학교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가르침에 심한 반발감을 느꼈었다. 왜 내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고 신(神)의 뜻에 의해 장난감처럼 만들어진 존재인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부터 나 홀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던 것일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고뇌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은, 나의 고독한 투쟁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걸 위로하기 위해 주어진 선물임이 틀림없다. 영혼의 방랑자들에게 보물처럼 주어진 비밀문서와도 같다. 우리의 영혼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신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혼의 유랑기(流浪記)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는 이 책에서 평생 오직 하나의 길, 오름길만이 신에게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사용해서 더럽혀진 ‘신’이라는 어휘의 내용을 선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자주 주저하곤 했지만 신에게로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인간 욕망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향한 길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터키의 점령하에 있던 크레타 섬. 그곳에는 두 민족 간의 반목과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숨죽여 떨어야 했던 어린 카잔차키스에게 드리운 두려움과 공포. 그것이 삶 내내 그로 하여금 신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는 절박함이 되지 않았는지. 20대의 카잔차키스가 친구인 앙겔로스와 함께 신을 찾겠다고 수사들만 사는 아토스산*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대목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수사들이 잠든 뒤에도 손님방에서 매일 밤 위대한 정신적 주제와 신에 도달하는 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두운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던 한 수사가 이렇게 외쳤다. “여기 앉아서 당신들이 하는 얘기를 영원히 들었으면 좋겠군요. 난 다른 천국을 원하지 않아요.” 반복되는 ‘신’과 ‘사랑’과 ‘의무’라는 말에, 무엇보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전달되는 열정과 진지함에 감동하여 일상적인 수도 생활에 젖어 살던 수사는 가슴 저린 통증을 느꼈다. 고행 중인 수사들 또한 ‘구원’과 ‘신’에 대한 확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신은 무엇일까? 지상의 불확실성인가? 하지만 비록 오랫동안 투쟁을 했어도 카잔차키스는 이 비극적인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했으나 여전히 뼛속 깊숙이 스며있는 기독교적 구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의 작품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이라고 외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사상, 니체 철학을 두루 섭렵하며 영혼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한 진정한 문학의 구도자였다.

 

“나는 신과 싸우게 되어서 기뻤다. 그는 흙을 빚어 세상을 창조했고, 나는 어휘를 빚는다. 신의 인간은 죽지만 내가 창조한 인간은 살리라”라고 절규하는 부분에서는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절절하게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하루의 일이 끝났으니 나는 연장들을 거둬들인다. 다른 흙덩이들이 와서 투쟁을 계속하게 하라”는 구절에서는 끝내 해답을 얻지 못한 그의 처절함이 느껴져 나도 덩달아 울컥했다.

영혼의 문제를 인생의 화두로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과학적, 철학적 근거로 입증된 사실이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신을 인식하는 사안에서만은 고전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카잔차키스 역시 그것을 벗어나려 했으나 ‘영혼의 자서전’ 곳곳에서 외치는 소리를 통해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문구가 내게는 죽음으로써 더 이상 투쟁하지 않고 편해졌다는 의미로 다가와 공연히 가슴이 아프다.

 

많은 것이 우연성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과의 접촉점을 꾸준히 찾고 있는 나의 삶도, 그의 삶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끝없는 고독의 여정이 펼쳐지리라 예상되지만 나 또한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무 높은 오름길에 발을 들여놓은 듯하다. 그 길은 ‘나’라는 자의식을 가진 흙덩이가 비록 가루가 되더라도 생명이 있는 날까지 계속 올라가야 할 길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발길을 멈출 수 없다. 성공한 곳은 떠나고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장 많은 바다와 가장 많은 대륙을 본 사람은 행복하므로. ”


*에게해에 접한 아토스산은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는 신성한 산. 현재도 수 천명의
수사들이 철저한 금욕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곳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1355
10675
2024-01-04
크리스마스 절기

홍성철 
(전 문협회장)

 

일찍 찾아오는 어둠이 자주 다니는 길도 낯설게 한다. 젖은 솜뭉치처럼 엉켜서 하늘을 가득 채우던 구름이 결국 진눈깨비를 뿌렸다. 차선마저 흐려지기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둘러 해가 지니, 땅거미가 더 어둡게 느껴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처진 어깨에 이른 저녁이 더해져 귀갓길이 스산하기만 했다. 추위보다 더 마음을 위축시키는 것은 구름 낀 하늘과 일찍 찾아오는 어둠인 것 같다.

 

잔뜩 움츠린 채 동네로 접어들 때 어귀에서 알록달록한 장식을 보았다. 짧아지는 해를 인식하며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 느끼던 차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조명들이 포근해 보였다. 주눅 든 어깨가 살짝 펴졌다. 동화책 그림에 나올 듯한 오색등이 추위와 어둠에 지친 길손을 위로하는 듯했다. 겨울이 밀려오는 길목에 누군가 켜놓은 불빛이 고마웠다.
몇 해 전 어느 날 을씨년스러운 거리에서 예쁜 불빛의 따뜻한 위로를 받은 후로, 나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기 시작했다. 12월이 오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만 걸던 전등을 다시 꺼내 창가에 걸었다. 작은 전구가 연이어 달린 전선의 스위치를 켜고 어두운 거리를 향해 빛을 밝힌다. 전등에 불을 켜니 눈 내린 지붕의 처마와 창가에서 고운 빛이 영롱하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인데, 예수의 생일은 12월 25일이 아닐 거라는 설도 있다. 서기 연도도 예수 탄생과 수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모시더라도 종단에 따라 다른 날을 성탄일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왜 오래 전에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을까? 혼자 생각하다가 동지(冬至)를 떠올렸다. 밤이 제일 긴 날을 지나고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즈음을 희망의 날로 삼았을 거로 추정한다. 밤새워 새벽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춥고 어둡고 힘들다는 것을. 어둠에 지친 사람은 빛을 바랄 것이고 절망에 지친 사람은 간절하게 구원의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릴 것이다.

 

빛을 가져준다는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적절한 구원의 상징이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서구 중세 시대의 예술은 빛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교회 장식의 절정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해설도 있다. 크리스트교뿐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전에도 태양을 숭배하던 신앙이 여럿 있었다.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연의 거의 모든 아름다움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농사를 지으면 하늘에 뜬 태양의 심기를 살피고, 도시에 사는 나도 화창한 날에 마음이 더 가볍다. 생명의 기원이고 살아있는 모든 만물의 활동을 지배하는 태양이지만 겨울이 되면 떠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 그러니 긴 겨울 밤에 작은 빛이라도 걸어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는 것 아닐까? 그것이 크리스마스 장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희망을 잇고, 이웃에게 위로를 전하는 마음으로 빛을 걸어 본다.

 

연중 어둠이 가장 짙은 기간을 통과하는 크리스마스 시기에 자연스레 메시아와 희망을 떠올린다. 어둡고 춥지만 이제 막 동이 트는 새벽처럼, 동지를 지나고 힘든 시간을 헤쳐 나오는 기쁜 날이다. 어둠의 나락에서 바닥을 딛고 돌아서서, 차츰 해가 길어지는 날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추운 바람과 많은 눈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준다. 깊은 어둠을 이겨 나온 비장함이 고통과 슬픔조차 담대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할 것 같다.

 

생각을 이어가니, 부활절의 절기도 춘분 다음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가 부활절인 것도 참으로 적절하다. 춘분이 되면 얼음이 풀리고 새싹이 움튼다. 쟁기질을 시작으로 경작에 들어간다. 여린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흙 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치는 것이 안타까워 시인 엘리엇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말했지만, 분명한 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때인 것이다. 바로 부활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만큼이나 탁월한 절기의 선택이다.

 

크리스마스는 빛의 상징이고, 춘분을 지나며 맞이하는 부활절은 생명의 상징으로 보인다. 모든 상징이 그렇듯이,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절기에도 깊은 은유가 담겨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할 방법은 비유와 은유를 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귀가 있는 자는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보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크리스마스 휴일 끝자락에 한 해의 변화와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해의 길이와 사계절의 변화가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하나의 선율처럼 느껴진다. 교향곡의 4악장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연주되고 다시 봄이 이어지는 조화로움을 느끼니, 무언가가 마음에 가득 차오른다.

* 동지: 12월 22일~23일
** 춘분: 3월 20일~21일
*** 부활절: 춘분 다음 보름 이후 첫째 주일 (양력과 음력이 모두 적용됨)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0521
10675
2023-11-30
선물 -김정희-

(독자 수필)

 

벌써 1년이 되어 간다. 작년에 참석한 연말파티에서 선물교환이 있었다. 오래 전에 다녔던 회사의 파티에서 일어난 일을 위로하는 것 같이 느껴졌던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덤으로 즐거운 습관도 생겼다.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었다. 직원들의 이름을 적어 반으로 접은 종이들을 추첨을 통해 한 장씩 가지고, 정해진 금액 범위 안에서 고른 선물들을 주고 받는 시간도 있었다. 겨우 얼굴만 익힐 수 있었던 직원이 기뻐하면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하다가 전화카드를 준비했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 전화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전화카드를 사용했었다. 한 장의 플라스틱 전화카드와 종이카드를 포장한 후, 장난 삼아 실제보다 훨씬 큰 상자에 담았다. 내가 준비한 선물을 발견하는 직원의 얼굴에 피어났던 함박웃음은 지금도 기억난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간간이 들리는 다른 직원들의 탄성과 함께 내 차례가 왔다. 나를 위해 준비했을 선물이 무엇일지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 차 있던 나에게 한 직원이 이미 사용한 것 같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손 때가 묻어 있는 조그만 봉제 장난감이 나왔다. 한동안 그 봉투의 주름보다 훨씬 더 내 마음이 구겨졌었다. 
직장을 떠나면서 다행히 그날의 일도 잊게 되었다. 작년, 성인장애자공동체 파티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이 모임에서는 주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받는 사람도 정하지 않았다. 참석한 사람들이 준비해 온 선물들을 모아 놓고 진행자가 이름을 하나씩 추첨했다. 누구나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른 내 선물을 받던 분에게 침묵으로 새해 인사도 보냈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려지고 선물과 함께 조그만 카드 한 장을 받았다. ‘올 한해도 수고 많으셨어요’라고 시작된 카드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서명을 하셨다.
내가 받기는 했지만, 파티에 참가한 모두에게 전하는 인사 같았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진 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목도리도 고마웠지만, 진솔함이 느껴지는 손글씨 카드를 읽어 가는 동안 내 가슴이 뭉클했었다. 한겨울 내내 목도리를 사용하면서 지녔던 감사의 마음은 계절이 바뀌면서 점점 엷어지다가 어느새 잊혀졌다. 겨울 준비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개켜둔 목도리를 발견하는 순간, 작년에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지금은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같이 근무했던 그 회사 직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깨끗한 종이에 단 한 줄의 덕담이라도 써서 주었다면, 지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을 텐데. 그 무엇보다도 ‘감사한 마음’님이 주신 카드는, 그것이 무엇이든, 주는 이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함이 담겨 있다면, 받는 이의 마음에도 잔잔한 감동이 오래오래 머문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감사한 마음’님 덕분에 새 습관이 생겼다. 그 모임에 갈 때면 가끔 탐정이 되곤 한다. 오늘 오셨다면 어디에 계실까?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분? 농담으로 우리를 웃겨 주던 이 분? 아니면 말이 없고 무뚝뚝해 보이던 그 분?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또다른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 하다보니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이 ‘감사한마음’님처럼 느껴졌다.

새로 시작한 이 놀이는 이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사한 마음’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모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게 될 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과 장점을 발견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1년 동안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다가오는 한 해에도 건강하게 열심히 그리고 유쾌하게 살아가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10251
10675
2023-11-16
고상한 삶의 향기(원옥재)

 

-유인희 헌정무대 공연을 보고-

 

                                              원옥재(한인문인협회 회원)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한인사회에서 보기 드문 감동적인 행사에 다녀왔다. 캐나다에 한국전통에술을 알리는 무용가 금국향 감독이 원로 무용가 유인희 님을 재조명하는 헌정무대를 꾸몄다.

 보통 헌정무대는 춤으로 배운 사랑을 춤으로 보답한다는 예술혼이 제자의 춤사위로 다시금 살아남을 보여주는 공연이라 한다. 그런데 금국향 예술감독은 유인희 전 이화여대 교수와는 사제지간도 아니고, 친분도 깊지 않았던 사이였기에 이 무대가 더욱 의미 깊고 빛났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유인희 님의 춤의 역사가 맥을 이어 앞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길이길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다”고 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아마도 그 분은 심지가 곧은 분임에 틀림없다.

 올해 구순을 맞이한 유인희님은 내게는 고교 대선배님이다. 아담한 몸매에 세련된 외모를 갖추시고, 언행에 고상한 품격이 물씬 묻어나는 사려깊은 분이다. 무엇보다도 무용에 대한 사명감과 타오르는 열정이 남다른 분이다.

 

 1991년 유인희님이 토론토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을 때가 기억난다. 겨우 40살 초반이었던 나는 아직 이 땅에서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내야 할지 허둥대고 있을 때였다. 당시 그 무용 발표회를 보고 감동해서 쓴 글이 <비상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이었다.

 무대 위에서 온 열과 혼을 바쳐서 무용에 몰입한 우아한 모습이 한마리 학처럼 보였다. 몸의 흐름과 일치된 유연한 손놀림과 살짝 쳐든 치마 밑으로 내비치는 고은 속치마가 숨을 멎게 만들었다.

 

 

 그도 잠시, 살며시 이어지는 하얀 버선발의 디딤동작이 호흡과 감정을 타고 표현되는 한국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오늘 32년 만에 다시 유인희님이 헌정무대의 주인공으로 선 모습을 대하니 이번에는 그 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보이는듯 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고상한 삶의 향기가 퍼져오는 듯했다.

 이미 유인희님은 토론토 한인사회에서 많은 단체의 이사와 자문위원으로 봉사하여 인정을 받았고, 모교를 빛낸 졸업생 중에서 선발되는 영광스러운 상을 진명여고에서는 <아름다운 진명인>, 이화여대에서는 <영원한 이화인>상을 받은 분이다.

 첫 순서인 <아리랑>과 마지막 순서인 <영원한 나의 모국>에 출연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누가 구순의 무용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감동이 전해왔다.

 특히 이제는 두 조국을 가진 우리이기에 편곡한 <애국가>와 <오 캐나다>에 맞춰 추는 춤사위는 두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염원이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한국 미국 캐나다의 후배 무용인들이 참여한 헌정무대는 따뜻하고 흐뭇했다. 국가무형문화재로서 태평무 보유자인 박재희님의 영상 축하공연, 미국 뉴저지 전통예술 아카데미 김미자 원장의 진쇠과 한량무, 토론토 나빌레라 한국무용단의 동추수건과 장구춤, 캐나다 한국전통 예술공연단의 입춤과 살풀이춤, 그리고 <영원한 나의 모국>, 조혜령 소프라노와 앤드류 다오 크라리넷 연주자 앙상블이 부른 이수인의<내 마음의 강물>, 이 모든 분들이 헌정무대를 빛내준 분들이라 감사를 드린다.

 가을바람을 타고 마음까지 추워지고 있는데 멋진 공연으로 가슴 훈훈해진 날이다. 역시 인생은 가도 예술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무엇보다도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이한 유인희님의 특별한 후배 사랑이 고상한 품격으로 돋보인 날이다. 모쪼록 남은 여생도 건강과 평안으로, 오가는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며 열렬한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gigo
기고
109102
10675
2023-10-05
사랑으로 섬기라

기고- 임재량 목사(다민족기독교연합 CMCA 대표)

 

 

영혼과 지역 사회를 품고 기도로 시작하는 선교적 삶은 경청과 환대를 실천하는 것을 통해 사랑의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필요한 것은, 사랑할 때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많은 차이와 다름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돕고 섬김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가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토록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사랑으로 어느 누군가를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세계를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도 그 분의 삶에 주어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며 섬기신 그분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땅끝까지 사랑으로 이르도록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오늘 그분의 성령께서 믿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이유는 각 사람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며 심기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길 때만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분의 사랑 안에서 얻어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섬김의 삶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복음서의 이야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조한 곳에 살아가는 제자들의 유난히 더럽고 굳은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권세를 가진 이로서는 모욕과 추문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 시대에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인들만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작고 더럽고 하찮게 보이는 노예와 하인들의 일을 하심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사랑의 섬김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온 세상에 용서와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 또한 매일 서로에게 베푸는 작은 섬김의 행위입니다.

이 작은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가운데 흘러갑니다.

많은 경우 다른 이를 총체적으로 돕기 위한 사랑의 섬김은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가 한 팀이 되어 함께 섬기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함께 하는 우리의 친절한 행동과 실제적인 사랑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초대를 경험합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45년 동안이나 가난한 이들을 사람으로 섬겼던 마더 테레사의 말을 기억합시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십시오. 큰 사랑으로 할 수 없다면 작은 사랑으로 하십시오. 작은 사랑으로 할 수 없다면 어찌됐든 하십시오. 사람은 섬길 때 사랑이 커집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