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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경제 및 시사문예 종합지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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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만나다

Editor’s Note


-경계인으로 살다간 고종옥 신부님 
-삶의 방식엔 정답이 없음을 일깨워줘  

 

                                                                   고 고종옥 마태오 신부(1930~2004)
 

“아내가 있다는 적군의 말에 종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1년 남짓 전쟁터를 누비고 있지만 역시 전쟁은 할짓이 못되었다. 특히 동족간의 전쟁은 더욱 그랬다. 단란했던 한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날 종옥의 품에서 숨을 거둔 인민군도 말하지 않았던가. "동무,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동무의 눈에는 내가 극악무도한 공산주의자로 보일지 모르나 나는 조국의 배반자도, 반역자도 아니오. 나는 다만 명령에 복종하는 인민군일 뿐이오.”

 

0…인생을 사는 방식엔 여러 길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 굳이 신앙적으로 얘기한다면 주님이 하라시는대로 순명(順命)하다 갈 뿐이다.     
0…고종옥(高宗玉•마태오.Matthew) 신부의 평전을 감명깊게 읽었다. 나는 사실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이민을 왔고, 또한 다른 성당을 다녔기에 토론토 교민사회에 대해 잘 몰랐고 신부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신부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 분에 대해 접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 지인분께서 <고 마태오 평전>이란 책을 건네주셔서 읽기 시작했는데, 시종일관 무슨 영화 대본을 보는 기분이었다. 한때 피터보로 한인성당에 봉직했던 최종수 신부와 한국의 중견문인 박영희 시인이 공저한 것인데, 고인에 대한 섬세한 기술은 물론, 세련된 문장과 표현력이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0…신부님은 태생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황해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일제의 온갖 잔학상을 몸소 체험했고, 해방을 맞았으나 다시 양분된 조국에서 동족간 좌우 이념 대결을 목격했으며, 이어 발발한 6.25 한국전쟁에 해병대로 참전해 인민군과 싸웠다. 
 그의 정규 학력은 일제시대 초등학교 5학년 졸업이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농사를 시작으로 땔감장수, 석회운송 등 그의 청소년기는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독실한 천주교 신자)로부터 보고 배운 기도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0…신부님의 사제 성소(聖召: vocation) 씨앗은 한국전쟁 참전 중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에서 싹텄다. 해방 후 3.8선 경비대를 거쳐 해군(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그는 상사로 제대한 후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를 위해 신학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간다(학력이 부족했기에). 하지만 기초지식이 모자라 동료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온갖 악조건 속에 가까스로 편입학이 되긴 했지만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방학 때는 학교에 남아 잔심부름을 해야 했다. 외로운 밤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0…그러다 찾아온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바로 프랑스 유학(Nancy, 낭시 신학대) 기회였다. 하지만 불어라고는 ‘농(non)’이 아는 게 전부였던 그에게 프랑스 생활은 감당하기가 너무도 벅찬 시련이요 장벽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병신 취급’을  받아가며 온갖 굴욕을 버텨내야 했다. 
 피눈물나는 고생을 해가며 그는 남들이 다 자는 밤에 변소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도둑공부를 해야 했다. 이런 사투 끝에 그는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거둔 눈물겨운 결실이었다.  
0…천신만고 끝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그리운 고국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로 발령이 났다. 왜 그랬을까?
 사제가 된 이상 다른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해외동포와 교회와 민족을 위한 도구로 쓰시려고 이국땅으로 파견하셨던 것이다. 
 신부님은 이때부터 하느님의 소명인 신자와 동포, 교회와 민족을 위한 무한한 희생과 사랑에 혼신을 다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 사랑 앞에 그 어떤 제동장치도 통하질 않았다. 제동장치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작동시켰다. 

 

0…프랑스 유학과 오타와 수도원 생활 후 꿈에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꿈이 다시 깨지고 몬트리올로 부임하는 소회를 김삿갓에 비유해 이렇게 노래했다.  
"조국과 민족 위해 신부가 되었건만/ 이국에서 살아야 하는 이 마음 외로워라/ 제대(祭臺) 위에 제물 바쳐 천주께 기구(祈求)하며/ 고향땅 별 하늘을 그리워하는 고삿갓" 
0…그의 드라마틱한 교포사목은 몬트리올 도미니꼬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의 무용담은 한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 
 한 술주정뱅이를 하느님 품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으나 그는 생쥐가 들어간 국을 들이밀며 신부님을 마음껏 조롱했다. 하지만 신부님은 (속이 뒤집힐 듯한 구역질을 참고) 그 국을 후루룩 마셨다. 
 뿐만 아니라 국맛이 좋으니 한그릇 더 달라고 했다. 개망나니는 결국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님, 이 짐승같은 놈을 용서해주세요… 흑흑…”
그는 이내 독실한 신자가 되어 신부님과 함께 기상천외의 가두 ‘딴따라 미사’에 나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9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알현

 

0…그런가 하면 마피아들이 우글거리는 몬트리올 부둣가의 선술집에서 두목과 단판 술내기 시합을 벌여 제압한 일화는 영화보다도 더 스릴이 있다. 그때 만약 술내기에서 졌더라면 온몸이 칼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채 부둣가에 버려졌을 것이다. 
 해병대 출신답게 선이 굵고 배짱이 두둑한 신부님의 이런 스토리는 수두룩하다. 

 신부님은 삶의 고비 때마다 이를 회피하려 들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쳐 기필코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십자가의 길만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특히 우리같은 이민동포들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불법체류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공항을 내집 드나들 듯했다. 수많은 동포 독신남녀들에게 짝을 찾아주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도 했다.   

 

0…하지만 그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고맙다는 공치사보다 험담과 손가락질이 많았다. 때론 그들로부터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도 욕을 먹었다. 신부가 강단을 안지키고 나돌아다닌다고…
 북한선교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자신이 온몸을 바쳐 헌신한 신자들로부터 ‘간첩’이라는 모함도 들려왔다.                 
 특히 민족 분단의 아픔은 신부님 삶의 십자가와도 같았다. 이북 출신으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랬던 그였다. 이는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한 사제로서의 소명이기도 했다. 

 

0…토론토에서 사목하던 1976년 북한의 초청을 받고도 교회분열을 염려해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토론토를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부임한 후 사제로서는 한국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다. 
 이때부터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교민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남과 북 모두로부터 의심과 감시를 받는 것이었다.  
0…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특히 사제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 봉헌하라고 선택된 사람이다. 신자와 나, 동포와 나, 교회와 나, 민족과 나라는 관계 안에서 매순간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도 사람이다. 매순간 인간으로서 겪는 갈등이 왜 없겠는가. 약혼녀와의 장래를 단념하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이겨내기 힘든 일이었다.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이국여성(쟌느)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숱한 밤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럴 때 그는 조국에서 들고간 돌맹이 하나를 프랑스 신학교 책상위에 올려놓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두 손에 부여잡으며 극기의 힘을 간구(懇求)했다. 

 

0…외로운 타국에서 만난 그녀는 예수의 성면(聖面)을 씻어드리며 위로한 베로니카와 같은 수녀가 되어 고 신부의 사제생활을 기구(祈求)로 돕겠다고 결심하고 수도원에 입회한다. 
 훗날 신부님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예비 수녀인 쟌느를 찾아가 새 신부의 강복을 주는 장면에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0…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은 특별하다. 하지만 고종옥 신부님처럼 삶의 온갖 풍랑을 헤치며 살다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 태오(고 신부님의 영세명인 마태오)는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보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몸 둘 곳이 없었다. 한그루 나무처럼 한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돈 탓인지도 몰랐다. 
 우울한 날엔 무작정 한국으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지인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차갑고 업무적이었다. 북한선교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는 태오로서는 하루아침에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평전 본문 중)        

0… 고 신부님은 ‘사랑의 지도' 등 20여 권의 자전소설과 수필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예수 없는 십자가’는 79년 프랑스어로 출간된 것을 다시 한국어판으로 번역됐다. 한국인이 불어로 책을 쓴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적은 ‘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와 파리에서의 북한선교 임무를 중심으로 엮은 ‘조국과 교회 사이에서’ 등 고뇌어린 작품이 많다.
0…민족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 신부님은 선이 굵고 개척정신이 투철한 성직자이셨다. 명절엔 한복에 갓을 쓰고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래서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캐나다의 한인이민 대부’ ‘캐나다 동포사회의 정신적 지도자’… 
 그런가 하면 선교를 위해 북한을 다녀왔다고 ‘빨ㄱㅇ’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0…토론토 한인 천주교회사에서 고 신부님은 지대한 업적을 남기셨다. 1969년 8월 한맘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신 후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번듯한 성전을 갖게 됐다. 
 캐나다 한인이민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기신 고종옥 마태오 신부님. 한국, 프랑스, 캐나다, 미국을 떠돌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신 신부님은 2004년 12월 31일 토론토의 한 병원에서 향년 74세로 선종(善終)하셨다. 
 지금은 토론토의 한맘성당 묘지에 고이 잠들어 계신다. 신부님은 캐나다, 특히 토론토 한인사회에 영원한 십자가로 길이 남을 것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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