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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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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

 

Editor’s Note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청초롭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 ‘그 꽃’ 전문)

한국에서 잘 나가던 중견 정치인이 선거에 낙선하고 난 뒤 등산으로 울분을 달래던 어느날 나와 대폿집에 마주 앉아 들려준 시다.

그는 말했다.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없이 바쁘게 생활할 땐 오로지 목표만 보였을 뿐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니 안 보이던 일들이 많이 눈에 띈다. 가끔은 하산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0…17자의 짧은 위 시 구절에 인생의 많은 의미가 함축돼있다.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거나 인생에서 한창 오르막일 때는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한다. 산이 아름다운 줄도, 곁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와 비로소 한숨 돌리고 나면 안 보이던 상황도 보이는 것이다.

 

0…올해 91세가 되는 고은 시인.

그의 1980년대 저항시들이 투쟁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시적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선시(禪詩)같은 서정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고한 시인이 수년전 전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 열풍에 휩쓸려 한순간에 모든 영예와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0…사람이 정상에 서면 주변의 모든 것이 만만하고 하찮게 보이는가 싶다. 고은 시인이 그대로만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어쨌든 그의 시 작품만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용되고 있다. 

 

0…검사 이성윤. 그도 한때는 잘 나가던 대한민국 최고위급 검찰 간부였다. 요즘 이 사람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음에도 평생 몸담았던 검찰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매우 서정적인 책을 썼다. 이름 하여 ‘꽃은 무죄다’.

0…스스로를 ‘꽃개’라 자처하는 전 서울고검장 이성윤의 ‘꽃 이야기’. 들판의 야생화들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꽃을 통해 살피게 된 세상사를 담담히 서술했다.

그런데 꽃과 야생화들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 놀랍다. 각각의 학명(學名)에서부터 서식처와 계절, 고유의 생태습관 등 전문 생물학자 못지 않다.

 

0…검찰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엄청 바빴을텐데 언제 이런 자연 공부를 했을까. 이는 꽃에 관심 많은 아내와 함께 온천지를 헤집고 다니며 발굴해낸 그의 고유 역작이다.  

외지고 비탈진 구석에 주로 사는 야생화를 찾아 꼼꼼히 관찰한 성정(性情)이 참 섬세하다.   

0…그가 언급한 식물들은 생소하면서도 다정스럽다.

양지꽃, 개망초, 금강초롱꽃,  큰구슬붕이, 강아지풀, 꽃마리, 병아리풀, 인동덩굴꽃, 구절초, 물봉선, 엘레지, 영춘화, 낙우송, 히어리, 노루귀, 처녀치마, 금잔옥대(수선화)…

 

0…문장력과 묘사력 역시 어느 전문작가 못지않게 유려하면서도 읽는데 편안하다. 아내가 그린 그림, 본인이 찍은 사진, 모두모두 깔끔하다. 아주 준수하다.

미물인 꽃 한 송이로도 충분히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0…그는 ‘닭의장풀’을 보며 하늘의 별이 된 어머니를 떠올린다. 팽나무를 보며 팽목항의 비극과 악몽이 떠올라 가지마다 주렁주렁 걸린 아픔에 짓눌린다.

더러운 진흙에서도 고운 존재로 피어나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상징인 연꽃을 그는 사랑한다.

 

0…’노랑망태버섯’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버섯을 보고 그는 이렇게 썼다.

“겉은 화려하지만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없고 내용물도 없으며 세상 누구도, 심지어 자신조차 품을 수 없는 그 텅 빈 화려함…”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내실은 없어 일시에 쓰러져 녹아내리는 그런 세태를 일갈한 것이다. 

 

0…자신이 책임자로 재직했던 서울중앙지검에 출두당하는 모욕을 겪으면서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역천(逆天)의 무도(無道)함을 허용 않겠다는 믿음의 뿌리는 바로 야생화에 있다.

오염된 세상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만 하는 사람은 지은이가 보기에 속이 텅 비어 실속이 없는 꽃 ‘박새’와 다르지 않다.

권력에 취한 자와 그 하수인의 성정을 하나로 뭉쳐 놓은 듯한 독초 박새를 보며 ‘꽃개’는 화(火) 내지 않는다. 대신 화(花) 낼 태세를 가다듬는다.

 

0…담쟁이가 그에게 속삭이는 평화의 언어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벽에 붙어 힘겹게 살지만 너도 힘을 냈으면 해. 세상은 더디 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처럼 조금씩 나아가는 거야.”

비록 몸이 통째로 뜯겨 나갔어도 삶의 흔적을 남기며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담쟁이와 줄기가 꺾여도 기어이 꽃을 피우는 개망초처럼 순리를 따르는 평화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0…‘심어진 곳에서 꽃 피우라(bloom where you are planted)’는 좌우명으로 그는 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만약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승승장구했더라면 이런 소중한 책을 낼 수 있었을까.

주옥같은 명저(名著)들이 대부분 유배지에서 탄생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0…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짧은 주례사는 “너를 보니 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잘 살아라” 였다고 한다.

자주 주례를 섰던 저자는 이를 원용(援用)해 “꽃을 가꾸는 마음으로 살아보라”고 했다.

‘꽃은 평화이고 소통이며 순리이자 희망이다. 그러기에 꽃은 언제나 무죄(innocent)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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