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를 이스라엘에 야금야금 다 빼앗긴 팔레스타인
Editor’s Note
-나라가 힘 없으면 당할 수밖에
-뼈아픈 역사를 가진 한국에 경종
유대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 “사람을 해치는 것이 3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유대인(Jewish)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일신을 굳게 믿고 현실(돈)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0.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해가는 유대인을 말한다. 그리스어의 ‘너머’를 뜻하는 ‘dia’와 ‘씨를 뿌리다’는 ‘speiro’가 합성된 말이다.
유대인들은 AD 132년 로마에서 일으킨 반란이 진압되면서 가나안(Canaan)을 떠나 정처없이 유랑길에 나섰다.
유대인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세계의 역사도 덩달아 바뀌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십자군 전쟁 때는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고 중세에는 각국서 추방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0…유대인이 겪은 최악의 참사는 히틀러에 의한 600만 명 대학살. 이를 계기로 시오니즘(Zionism: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전개한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됐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 선포됐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으니, 역사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뀐 모습이다.
0…75년째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근대들어 이의 원초적 단서 제공자는 영국이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그재그식 외교전략을 펼친다.
1917년 11월,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포는 유대계 영국 부호 로스차일드(Rothschild)에게 서한 한통을 보낸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national home for Jews)을 세울 것을 지지하며,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른바 ‘밸포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다. 67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편지 한 장은 이후 중동의 역사를 통째로 바꿔 버렸다.
0…이에 앞서 영국은 1915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맥마흔 선언(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을, 이듬해는 중동의 세력권 분할을 놓고 프랑스와 비밀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맺는다.
같은 땅을 놓고 이중 삼중 계약서를 쓴 영국의 조치는 두고두고 재앙의 불씨가 됐다. 제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모순적 외교로 한쪽이 환호하는 동안 다른 쪽은 분통을 터트렸다.
밸포 선언은 유대 시온주의자들을 고무시켜 30년 후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됐다. 하지만 아랍인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영국의 배신이었다.
0…영국은 밸포 선언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애당초 팔레스타인의 독립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 시기를 무대로 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보여주듯, 강대국의 양아치같은 장난질로 인해 이후 중동지역은 피투성이 역사를 갖게 됐다.
훗날 팔레스타인 교과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벨포)선언은 전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국제문서 중 하나다. 원주인이자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을 희생시키며 자기가 소유한 것도 아닌 땅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단체에 넘겼다. 이 때문에 한 나라가 무력에 몰수당하고 전 민족이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0…팔레스타인인들은 이-팔 분쟁의 근본 원인으로 벨포선언을 꼽고 당사국 영국에 책임을 물으며 공식 사과를 받기 위해 의회 청원 운동을 개시했다. 팔레스타인 정부는 전쟁범죄에 책임을 물어 영국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2002년 당시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은 밸포선언을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라 했고, 2013년 노동당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은 “영국의 역사적 과오”라며 사과했지만 아직 정부 차원의 사과는 없다.
0…벨포선언으로 시온주의 운동에 불이 붙으면서 유럽에서 배척받던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30년 간에 걸쳐 팔레스타인인들과 갈등, 충돌, 암살, 살상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다.
더 이상 조정능력을 상실한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떠넘겼고, 유엔은 결국 1947년 11월 총회 결의안을 통해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 절반을 분할해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유대인은 환호했고 이듬해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반면 아랍권과 팔레스타인은 이에 반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0…지금까지 4차례 전쟁이 있었지만 승리는 모두 이스라엘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78%까지 땅을 차지했고 팔레스타인은 22%로 줄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두 곳으로 몰아넣고 자치권을 주었다. 그 두 곳이 바로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와 가자지구(Gaza Strip)다.
0…지금 중동 상황은 단순히 ‘이스라엘도 문제고 하마스도 문제’라는 식의 양비론으로만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마스가 보여준 폭력의 원인과 책임은 상당부분 이스라엘의 폭력적 억압과 지배에 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로 빼앗고 그들을 ‘거대한 열린 감옥’ 안에 가둬두고 끊임없이 폭격한 결과가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프랑스의 팔레스타인 전문가(Gilbert Achcar)가 한 말이다. “야만성은 정당한 방어수단이 될 수 없다. 다만 두 야만성이 충돌할 때 더 강한 야만성, 즉 억압자 쪽이 여전히 더 큰 잘못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약자의 야만성은 강자의 야만성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팔 분쟁은 뼈아픈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으로서도 결코 남의 나라 일로 보아지지 않는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열강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떠밀려날 수밖에 없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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