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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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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고 싶은 사람- 은퇴하는 한약업사의 감동 스토리

 

-세상은 이런 사람이 만들어가는

  


▲경남 진주의 ‘어른’ 김장하 선생

 

 우리는 모범적인 삶을 사는 분을 보며 ‘나도 저런 분을 닮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도 저런 위치에 오르면 꼭 저렇게 살겠다”고 다짐도 한다. 하지만 막상 그런 위치(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에 오르면 세상 모든 것이 내 아래 있는 듯 교만해지기 쉽다.     

 

 새해 들어 내 생에서 꼭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직접 뵌 것은 아니고 TV를 통해서였지만 잔잔하면서도 진한 여운이 오래토록 가슴에 남아 있다.  

 

 0…지난해 5월 31일, 경남 진주의 낡고 오래된 한약방 ‘남성당’ 주인이 은퇴와 함께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구 35만명 도시 전체가 술렁이는 듯했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마지막으로 약을 짓겠다며, 인사를 올리겠다며, 찾아와 약방은 여러 날 문전성시를 이뤘다.

 

 시골 한약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소년 김장하(올해 79세). 그는 18살에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 이듬해 경남 사천에 처음 한약방을 열었다. 다른 약국보다 싸면서도 좋은 약재를 써 효험이 좋았던 이 한약방 약은 전국에 소문이 나 새벽부터 문앞에 긴 줄이 섰다.

 

 선생은 많을 때는 직원 스무 명과 함께 매일 새벽까지 약을 지어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어려운 사람과 사회를 위한 선행(善行)에 아낌없이 바쳤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녔다. 대신 지역사회를 위해 흔쾌히 지원했다.

 

 20대에 장학사업을 시작해 40살에 사학재단을 설립하고 48살에는 당시 자산가치로 100억원이 넘는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0…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 하숙비, 생활비 등 셀 수 없이 많은 장학금을 지원했지만 어떠한 전달식도 열지 않아 장학생 규모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는다.

 

 누구를 도와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고 언론사 인터뷰도 응하지 않아 기사자료도 없다.

 

 선생의 손길로 숨통이 트인 사람들의 증언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의 도움으로 수많은 학생이 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가 세워졌으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극단(劇團)이 공연장을 갖게 됐고, 민족문제연구소도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또 “권력이 무서워해야 할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지역언론 운영비와 오갈 데 없는 여성을 위한 피난시설 비용을 대는 등 문화예술, 출판학술, 환경, 노동 등 지역사회 구석구석에서 기꺼이 ‘물주’로 나섰다.

 

0…주민들은 “동네사람들이 ‘김약국’ 없으면 못 살았지. 돈 없을 때마다 금고처럼 갖다 썼으니까”라고 기억한다. 그가 준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김 선생의 깜짝 생일잔치에서 선생을 회고하다 끝내 목이 메었다.

 

 돈의 사회환원 이유에 대해 선생은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번 돈인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있나”라고 한다.

 

 “돈은 똥과 같다.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는 그의 말은 돈에 관한 철학으로 포개진다.

 

0…선생은  특히 ‘새로운 차별’에 맞서 수많은 사람을 키워냈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해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다. 없는 이에게 기회를 줬고 소외된 곳과 아낌없이 연대했다. ‘김장하식’ 차별철폐였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같은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형평운동’을 적극 지원한 것이다. 이는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백정(白丁) 출신과 양반 출신이 합심해 결성한 형평사(衡平社)란 조직활동을 뜻한다.

 

 형평사 창립문 첫 머리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고 쓰여져 있다. 되짚어 보면 지난 세월 형평운동은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백정들의 신분해방과 인권을 주창한 형평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와 관련해 선생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해간다”고 강조한다. 

 

0…선생은 60년간 운영해온 한약방의 문을 닫으면서, 30년 전 자신이 세운 문화재단도 마지막으로 경상국립대에 기증하는 것으로 삶의 궤적을 마무리한다.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해달라.”

 훈계는 넘쳐나지만 존경은 희미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 곱씹게 하는 ‘어른 김장하’의 다큐 속 마지막 말이다.

 

0…’어른 김장하’가 세상이 알려지기까지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취재하기 위해 100여 명의 주변 인물들을 만난 기자와 PD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이런 어른을 멋있다고 하지만, 사실 선생이 하셨던 일들은 다 사회가 책임졌어야 하는 문제이다. 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까 선생이 메꿔주신 부분이다. 환경도, 여성도, 교육도, 우리가 한 사람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워놓고 그냥 존경이라는 말로 퉁 치는 건 아닐까. 어려서부터 ‘어른’으로 너무 외로웠겠다고 생각했다.” 담당 PD의 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선행과 자선을 하는 사람은 그럴만한 여유가 되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누구나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다.

 

 ‘어른’ 김장하는 말한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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