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랑의 꿈을 꾸며 한 생을 살아가다가 흙이 되는 것일까? 세상에서 사랑을 찾고 사랑을 얻고 가지려고 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숱한 신문 방송 기사 등을 통해서 접할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인류에게 예수님의 사랑 즉 성경에서 읽혀지는 (아카페)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란 의미를 부여함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 보다 더 존귀한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함일 것이다.
성탄일이 오는 이번 주에 사랑을 음미코자 하는 나의 마음은 어쩌면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심정적 신앙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서 나의 사랑 이야기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나는 경북 봉화 도촌1리 속층 사제라는 백여호의 종씨가 같이 모여 살고있는 반촌에서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9달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퇴계 이황의 직계라는 유가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바램이라는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첫 장가를 들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하고 결혼 후 몇 달이 가지 않아 사별을 하였다.
어머니는 제추로 아버지와 결혼을 해서 8남매를 생산했고 내가 막내로 태어나게 되었다. 성장과정 등은 생략하고 내가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여기에 요약해 보면 한달 유복자를 안고 아버지를 보낸 슬픔 속에 3달 이상을 매일 쌀 한 가마니씩 밥을 해서 문상객을 맞이하셨다.
이는 너의 아버지의 아호는 (순부)였고 영남 유림사회에서 훌륭한 성품으로 보람찬 업적을 남긴 이유에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슬픔 속에 문상객을 맞이하다 보니 너에게는 변변히 모유를 먹여 키우지 못한 죄가 많다며 아비 못 본 내자식이라며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철이 들어가면서 남들이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버지 자랑도 하고 아버지의 보호 밑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 못 본 유복자의 한을 안고 한 생을 살아온 낭인 시인이 되었다고 혼자서 자학을 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양아버지라도 한 분 만들어 아버지라 한번 불러보며 단 며칠이라도 살아봤으면 하는 한을 안고 파아란 하늘을 보면서 눈물을 떨군 적도 많았다.
위의 서설은 내가 절실히 간직한 사랑이란 것이 무엇일까 하는 나대로의 상념을 주절거려본 쓰잘데 없는 말임을 알고 있다. 이는 나의 절실한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스테르고)적 사랑의 그리움이다. 죽고 살고를 떠난 남녀의 절절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사랑의 전부라 생각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런 누구나 간직할 수 있는 사랑도 받아 보지 못한 사랑, 그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는 나 혼자의 독백이다. 누구나 자기대로의 최고의 값어치가 있을 사랑이 있음을 알면서도?
사랑에 한이 맺힌 나는 사랑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독일의 동포 작곡가 (김영식)님은 이 작품이 좋다며 작곡을 하여 조국의 (강청화) 교수 뮤직데뷰 30주년을 맞이하여 예술의전당에서 나의 시가 노래로 불려진 것은 2015년 5월이었고, 나는 이 공연에 초대를 받아 참관을 한 기쁨도 있었다.
이제 내 나이 팔순을 넘어 서녘 하늘에 걸린 태양을 보면서 그 사랑이란 것이 무엇일까. 내가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내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있을까 없을까를 생각해 보며 하루하루를 넘긴다.
나는 현재 왼쪽 팔목의 퇴행성 관절염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 무엇인가 쓰지 않고는 하루의 나의 삶이 무의미하기에 오늘도 콤을 두들기며 역사적으로 남는 세계적인 명 시인들의 삶의 발자취를 상기도 하며 뒤적이며 다음 호는 프랑스의 (보들레르)의 사랑이야기를 추적하고자 한다. 창녀를 사랑하며 한 생을 마친 보들레르의 생존을 음미함은 뜻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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