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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의 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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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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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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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루 살로메를 좋아하던 나의 연상의 여인(1)

 

 늦은 가을비가 바람을 휘몰아치고 있는 저녁 석양노을은 찾아왔었지, 덕수궁에서 불어주는 하늬바람을 따라 휘날리는 노오란 은행 나뭇잎이 북창동 소공동 명동으로 불어와 내 어깨를 두들겼었어, 퇴근 시간이 되었건만 오늘따라 소주 한잔 하자는 친구가 없어서 쓸쓸하게 혼자서 소공동 뒷길을 걸었었지.

 

 

 


 행여 이곳에는 누군가 나를 기다릴 것만 같아 ‘일품향’이란 중국집에 들어갔었어, 비가오고 바람이 불고있는 탓일까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던 이 중국집도 오늘은 텅 비어있었지, 한쪽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언제나 즐겨마시던 오향장육 중국집 특유의 술안주와 ‘빼갈’ 한도꾸리를 시켰었어, 독한 고량주지만 이날은 한도꾸리로 양이 차지 않아서 한도꾸리를 더 마시니 온통 세상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았었지.


 총각이란 고유명사가 좋기는 좋다는 생각을 하며 언제까지 이 총각이란 명예를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얼큰한 몸을 이끌고 일품향을 나와서 언제나 찾던 바로 옆 건물의 ‘가화다방’으로 들어갔었지, 이상하게 조용한 다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야상곡’이 은은하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어, 쓸쓸한 마음은 가중되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상대할 사람이 없어 나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지,


 그런데 외로움은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길을 열어주는 것일까 한 여인이 우산을 털고 다방으로 들어왔었어, 첫 인상에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어이 혼자 왔을까를 생각하며 나의 눈은 이 여인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나 자신이 알았었지, 


 용기를 낸 나는 이 여인의 옆 의자에 가서 앉으며 주접을 떨었지, “안녕하십니까, 혼자입니까,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옆 좌석에 앉아도 되겠습니까”하며 온갖 예의를 갖추어 영국신사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을 하며 이 여인의 반응을 보았지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한참을 응시하더니 혼자이니 옆에 앉아도 좋다는 허락이었어, 이로서 나의 연상의 여인과의 교제는 시작이 되었것다.


 (독자님들 총각시절을 그려 보시고, 젊은 친구들은 60, 70년대의 낭만을 음미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픽션을 쓰고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각설하고! 나의 연상의 여인과 나와의 만남은 잦아졌어, 일주일에 한번꼴로 가화다방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멋쟁이들과 미인들만 나온다는 소공동의 티파니 다방에서 명동의 청자 다방으로 고전 음악만 들려주는 설파와 훈목 다방으로 때로는 사보이 호텔 지하 구디구디에서 양주잔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코스모스 백화점 앞 샛길에 은성이라는 동동주 집과 명동 성당 앞의 동동주 막걸리 집에서 마른 생김과 오뎅국물에 우그러진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 토종 막걸리를 즐겨 마셨지.


 은성이라는 동동주 집은 지금도 그 유명한 탤런트 최#암이란 분의 어머님이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이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지, 어머니 아드님이 훌륭한 탤런트로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짱인데 왜 이런 막걸리 집을 경영하느냐고, 그러면 이 어머님 왈, 아들은 아들의 삶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삶의 가치가 있지 않느냐며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지,


 북쪽에서 월남을 한 동포들의 생활력과 남쪽 사람들의 생활관 차이가 있음을 지금에야 느끼고 있는데, 이는 북쪽에서 남으로 온 사암들이 잘살고 성공한 것을 엿볼 수 있었어.


 그런데 세월은 흘러 다시 일년이 지나고 겨울눈이 펄펄 휘날리는 날 우리는 가화 다방에서 다시 만남을 가졌었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 “결혼은 하셨습니까.” 묵묵부담, 다시 물었지 “왜 가화다방을 좋아하느냐”, 그때 들려오는 대답 “19세기의 독일이 나은 미인 작가 ‘루 살로메’를 아느냐?”고, 나 천장을 쳐다보면서 멘붕이 되었는데 루 살로메에 관한 일장연설이 시작되었어, 


 독일 출신 작가라 하지만 그녀는 불란서 출신이 맞는다는 말과 17살에 25세 연상인 ‘길로트’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목사와 소련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2년여 간 교제를 했었는데 길로트 목사는 가정을 가진 유부남으로 살로메에게 청혼을 함으로서 이들의 인연은 끝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 가화다방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한국의 훌륭한 작가들이 즐겨찾는 곳이기에 자기도 이 다방을 찾는다는 대답이었어,


 나는 이 연상의 여인의 나이를 알고 싶었지만 물을 수는 없어 애를 태웠었는데 길로트 목사가 가정을 가졌는데 어이 25세 연하의 여인에게 청혼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질문이었어, 한편으로는 이 여인의 나이를 알고자 유도를 했었지, 행여 젊은 남성이 청혼을 한다면 어떠냐고 물었지, 


 그런데 대답은 자기의 나이는 나보다 십수년이 위인 것 같다며 그저 씁쓸한 미소를 남기며 먹을 수 없는 감나무에 달린 감은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남겼어, 이때부터 내 나이보다 십수년 연상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5, 6년만 위라면 나도 총각 신세를 면할 수 있을까하는 상념을 씹으며 혼자서 웃었지,


 이어 살로메는 소련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출생했으며 훌륭한 작가이고 평론가였으나 그녀 자신이 저술한 책은 없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개척자 중 한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강조했었어, 또한 뚜렷한 학문적 업적은 없어도 당대의 독일 제일의 철학자로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나 ‘말테의 수기’, ‘비가’ 등을 저술한 천재시인 마리아 라이나 릴케 같은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한 장본인으로 더욱 유명하다는 것을 강조했지,


 이후 덕수궁 돌담길을 아무말없이 무작정 한 바뀌를 걸었지, “내 마음에는 무작정 당신이 좋아졌습니다”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고 걸어서 광화문 쪽을 향하다가 초원 다방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쓸쓸히 헤어졌어, 나에게 루 살로메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으나 문학에 문외한인 내가 고차원의 작가세계를 알 길이 없어 그냥 잊어버리고 한 달여 지나갔지,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살로메에 대하여 좀더 진지하게 물어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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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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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7
편운 조병화 시인의 죽음과 사랑의 철학

 

▲편운 조병화 시인 근영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자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믿어야 했습니다. <2005.03.10> 

 

 상기 편운 선생의 시는 내가 중부전선 전방지역에서 근무할 때 잠이 없는 밤 혼자 즐겨 암송하던 작품이다. 읽고 암송을 하고나면 내 마음에 편안과 희망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아마 이 한 작품 때문에 내가 시라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 시절 나의 사랑과 꿈과 희망과 낭만을 안겨주었던 이 시를 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마 이 시 한편이 오늘의 나에게 시라는 것을 쓰게 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나대로의 영감의 사랑과 생존의 철학을 음미하며 나대로의 즐거움을 찾은 시간들이 많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때로는 주어진 여건에 실망감을 느낄 때, 사회가 어이 이 모양으로 흘러가는가, 정의와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위선과 질시와 가변의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하나,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내 생존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좁은 땅덩이일까, 어이하여 이렇게 못 살아가는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아버지를 못 본 유복자로 태어났을까, 대농의 부유한 가정인데도 나는 어이하여 조상님들로부터 유산 한 푼 못 받고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갈까, 형님은 돈으로서 군대를 가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나는 왜 왜를 외치며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 속에 내 젊음을 불태웠다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조병화 시인의 시는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을 심도있게 독자에게 전파시켜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하여 꿈과 사랑의 생존을 형상화해 주고 있었다. 이에 나의 여린 마음에는 그의 시는 내 삶의 이정표 형성에 일조를 한 것 같다.


 소월의 시가 전원 서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데 비하여 조병화의 시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경쟁과 혼돈의 시간들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민초들의 애환을 그려주고 있다. 나아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존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주는 낭만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상기 시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는 것은 하기 이 시를 패러디한 나의 시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이유식)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당신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나그네의 서러움도 아니었고/배고픔의 절규도 아니었습니다.//망각된 세월 속에/당신의 검은 눈동자가 있어야 했고/버림받은 착각 속에/ 허무한 인생을 더듬던//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수정같은 눈물 속에 /무작정 당신의 환영을 되새겨야 했으며


얄팍한 지식과 기회에 얽매이면서도/ 당신의 하이얀 살결은 있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위선 증오 시비에 휩싸이지 않으려고/팔딱이는 심장을//당신의 가슴 속에 응고시켜야 했고/ 기약없는 방랑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1979년 10월 초창기 이민자의 고통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편운 문학관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편운 문학관을 찾아서 교류를 튼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생존시의 조병화 시인이 쓴 작품 <죽음과 사랑의 철학>이 나의 문학관에 들어 왔기에 그 전문을 발표를 하니 독자 제위님들이 한번쯤 음미하시기를 바라며 나의 30번째 잡설을 마친다. 

 

죽음과 사랑의 철학(조병화)


 점점 가을이 가을답게 깊어 가면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옵니다. 어제는 그러니까 10월 21일 금요일, 안성 내 고향 난실리 편운회관에서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 코스에 있는 학생 여섯 명을 데리고 그들의 원대로 강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고향에서 이렇게 강의를 하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하였습니다.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나의 인생, 걸어온 이야기들을 나의 철학과 나의 문학으로 이야길 했습니다. 실로 나의 인생은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이었고, 그 죽음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은 오로지 시간과 꿈과 허무와의 투쟁이었습니다. 그 시간과 꿈과 허무와의 투쟁 속에서 그 많은 시들을 얻어낸 생애였습니다.


 죽음은 어머님이 ‘살은 죽으면 썩는다’하는 말씀에서 터득하였고, 사랑은 어머님이 내가 동경고사(東京高師)에 합격을 해서 일본 동경으로 떠날 때 서울역에서 하신 말씀, “나는 네가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으면 했다”하시며 눈물 글썽글썽 하시던 그 말씀 속에서 터득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나에게, 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철학, ‘죽음의 철학과 사랑의 철학’을 가르쳐 주셨던 겁니다.


 나는 이 죽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도 있을 죽음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긴장을 한번도 풀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어떻게 보람 있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하는 마음으로 줄곧 시간을 일분 일초 아끼면서 살아왔던 겁니다.


 일을 하면서 인생을 보다 인생답게,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풍부하게, 생명을 보다 생명답게 아름답게, 생애를 보다 생애답게 보다 후회 없이, 이러한 생각과 노력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철학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시 작품 등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고향에 젖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실로 가을비는 철학이옵니다. 몸 건강하시길, 그럼 또. (199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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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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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허수아비 시인의 향기

 
허수아비 시인의 향기

 

 

 

바람 따라 은은한 바람의 향기가 불어오고 사람의 마음 따라 사람의 향기 불어 세상을 덮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더러운 향내도 있고 달콤한 향내도 풍겨온다.
마치 장미꽃과 같은 향기도 있고 가을에 물들어가는 단풍잎과 같은 향기도 있다.

 

연둣빛 나뭇잎 솟아나는 오솔길에서 울고 있는 매미울음 소리 같은 향기도 있고
연륜은 불타고 반딧불도 반짝이는 뒷방 노인의 향기도 있다. 
오늘은 천년을 살고 천년을 죽어서도 살아간다는 헛개비 나무에 올라 사람들을 본다. 
어딘지 모르게 희로애락의 향기가 용암으로 흘러 바다를 만들고 있고
그 심해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떼들이 헛개비 나무를 조롱한다. 

 

너와 나의 향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지구 속에 살아남은 티끌은 
희망의 눈물이고 절망의 꽃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을 배회하는 사랑이 있다.

 

나만이 간작한 희열을 나만의 고독을 자랑하며 석양노을 위에서 서커스를 한다.
사람냄새가 구더기가 되고 파리떼들이 뿌려놓은 애벌레가 찌린 오물이 악순환을 거듭한다. 
혼란과 나만의 독선과 이기는 어느 민족의 유전자(DNA)의 울음이다.

 

발전은 악화가 양화를 탄생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생존을 난자한다.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한 병든 사회는 꽃으로 피어나 자화자찬 속에 위선의 꽃을 피운다. 
제 잘난 멋에 살아가는 나의 동공은 참 더럽고 아니꼬운 향기의 사회다. 

 

어쩔 수 없는 원죄의 환성은 요단강을 건너가고 
그 속에서 사회의 정의와 진실은 꽃을 피우고 그 향기에 취해서 춤을 추는 허명의 악랄한 위선
나는 오늘도 너와 나를 보며 그저 울고 울어본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라고 시를 쓴다.
내 시를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허수아비가 시를 쓴다.

 

시래기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돼지고기 수육에 소주를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다.
오늘은 <마리아 라이나 릴케>가 사랑했던 <루 살로메>의 인간적인 참 인간적인 생존을 음미한다.
첫 사랑의 상처를 안고 한평생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난 <에머리 디킨슨>을 그려본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허수아비의 시
그 시는 바보의 절규이며 위선의 횡포로 메아리치며 허공을 날고 
새 떼들이 창공에서 울며 난다. (201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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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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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5
광주 대인시장의 해뜨는 식당 천원짜리 밥상

 

▲해뜨는 식당 '천원짜리 밥상'으로 나눔을 행하던 고 김선자 여사

 

 

 천원짜리 밥상으로 생존의 참 빛깔, 베풂의 아름다움, 진실한 사랑, 뭉실뭉실 피어나는 뜬 구름 속에 전파되는 사람냄새, 어떤 미사여구로 장식을 해도 아깝지 않는 아름다운 인성의 소유자며 사랑의 실천자였던 김선자 여사님은 이제 저세상으로 가셨다.


 내가 이 천원짜리 식당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접한 것은 벌써 수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인터넷 조선일보에서 <천원짜리 밥상 해뜨는 식당> 이름을 접했었다. 이 기사를 읽고 너무나 가슴이 뭉클해 소리 없는 값싼 동정으로 인연을 맺은 기억이 있다. 


 나의 감정을 격하게 고동치게 만든 사연은 이렇다. 천원짜리 밥상을 수년째 운영하는 김선자 여사의 삶이 너무나 아름답고,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정신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국의 동포들이나 지나가다가 들리는 행락객이 5만원, 10만원 경우에 따라서는 1만원, 2만원을 익명으로 던져놓고 가는 성금이 천원짜리 밥상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기사를 읽을 때는  마음에 고동이 쳤다. 


 또한 김 여사도 성금과 이 식당을 후원코자하는 대인시장 상인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이 해뜨는 식당을 건전하게 운영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봉사와 희생에 의한 사람냄새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심금을 울린 것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조국 우리 민족 중에도 테레사 수녀님과 같이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음에 민족의 자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선자 여사는 우리 주변에 굶는 사람이 없어서 식당문을 닫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식당을 운영하셨다. 김 여사가 바라는 굶는 사람이 없는 나의 조국, 언제 그날이 올까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 날이 언젠가 와서 이 변방의 이방인도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그저 안타깝고, 내 힘의 부족함과 절실한 희생정신과 동포애가 없는 나를 미워하면서 위선 속에 이 글을 쓰고 있다.


 김선자 여사는 백반 한상을 천원에 팔았다. 재료비 값도 모자라는 값으로 천원짜리 밥상을 차려서 불쌍한 사람, 갈곳없는 노숙자, 행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가난한 자. 노점상으로 하루의 잠자리를 찾고 먹을 것을 찾는 사람, 늙고 병들고 갈곳 없는 연로하신 분들,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고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다만 배고픔 속에 하루하루의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가셨다. 아직 좋은 것만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많은 숙제와 슬픔을 안겨주시고 가셨다. 여사는 누군가 뒤를 이어서 뜻을 승계해 달라는 염원을 남기셨다.


 광주 동구 대인시장에서 '천원 밥상'으로 나눔을 베푼 김선자 여사가 2015년 3월 18일 오전 8시30분께 영면을 하셨다. 향년 73세이시다. 2010년 8월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 <해뜨는 식당>을 열었다. 


 김 여사가 어려움 속에 남의 도움을 받았듯이, 남은여생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남을 사랑한다는 일념에서 시작한 천원짜리 밥상이다. 밥과 3가지의 찬이 곁들여진 밥상 여기에 된장국, 이 밥상은 2천원을 받아야 본전이 되건만 한상을 팔면 천원의 손해를 보면서 하루 3끼 배고프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셨다.


 매월 1백만원에서 2백만원의 적자를 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나눔의 정을 계속 베풀었다. 이웃을 위해 1천원 이상의 행복을 전해주던 김 여사는 2010년 8월 이 식당을 개업한 후 불과 2년도 못 채운 2012년 5월 말기 대장암 판결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김 여사의 천원 밥상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김 여사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된 대인시장 상인들과 시민들은 내부 리모델링 등을 통해 가게를 다시 열면서 김 여사의 뜻을 이어갔다.


 수술을 받고 6개월 후 가게로 돌아온 김 여사는 상인회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식당을 다시 운영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보살폈다. 2년여가 지난 이날 김 여사는 "식당을 계속 운영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 채 영면했다. 그 후 상인회의 도움을 받아 김 여사의 따님인 김윤경님이 천원짜리 해뜨는 식당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이 식당을 찾는 많은 고객들은 천원짜리 밥을 즐겨먹으며 김 여사의 뜻을 기려 성금을 내어 놓고 있음은 기쁜 일이다. 우리 조국에 온정이 있어 기쁘다. 내가 김 여사의 삶을 반추함은 낮은 곳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몸소 실천해 오셨음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김 여사가 젊은 시절 밥 한 공기에 마음 따뜻해지던 때를 떠올리며 가난한 이웃들과 천원짜리 밥상으로 억만금의 마음의 정을 나누었음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남의 봉사와 희생은 별것 아닌 것이라 폄하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 좀 하라하면 코웃음을 치는 각박한 인심에서 김 여사의 삶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훈훈하고 아름다운 귀감을 남겨주고 있다.


 더구나 김 여사의 뜻은 천원 밥상으로 이익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말고 떳떳하게 천원이란 돈으로 밥을 사먹게 함으로서 자존심과 인격을 존중해주는 배려심도 있었다. 얼마나 생존의 깊이를 달관하며 남의 상처를 어루만지려 애썼는가를 생각해본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냄새, 너무나 아름답다.


 한편으로 캐나다에 살고있는 우리들, 아니 나 자신부터 배고픈 이웃과 난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부자 나라에서 살면서 남의 도움을 바라며 노숙을 하고 마약을 하면서 사회적인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도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이 진실되게 각인되진 않을까. 김 여사의 이름은 더욱 찬란한 여운을 남기리라는 생각이다.


 다음은 2015년 9월 20일자에 발표된 나의 시 <참회>를 여기에 상재하며 잡설산책을 마친다.


 
 참회

 


 생존의 연을 날린다 /인연의 고리가 곡예를 하며 /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늘을 날고 있다/ 살아오면서 두 무릎 끓고 앉아/

나도 모르게 남에게 주었던 /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내 언젠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가/ 

 


 악하고 간사한 마음이/ 태양빛 따라 위선의 강물로 흘러갈 때/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삼키며/ 이별하는 생존의 뒷모습을 보았던가/

 


 석양 노을 깊어간 계곡의 적막 속/ 허수아비의 눈물은 흐르고/

아득한 생존의 끝자락에/ 파도소리 들려도 말 없는 산(山)이 그립다/

 


 공허한 사랑의 종소리/ 공동묘지의 이름 없는 죽음의 비문에/

흘러내리는 빗물은 참담하기만 한데/ 오늘도 새떼들은 지지배배 울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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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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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A마트의 김 부사장과 노인들의 군고구마 파티

 

 할일 없는 노인들 4사람이 맥 다방에서 세월을 찾고 쫓으며 커피에 군고구마 파티를 즐겼다. 1불10전짜리 커피 한잔을 놓고 2번 3번 공짜로 더 받이(Refill)를 하면서, 노인 A 가라사대 의기 남아 홍길동이 다시 살아나서 난세를 주름잡고 세계를 평정하기를 바란다. 또한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계속 쏘아 올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트럼프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란다. 


 노인 B는 아베가 6.25 한국전으로 부자가 되었는데 행여 조국에서 전쟁이 터지면 아베의 간교함이 돈도 벌고 이간질을 할 것이 걱정이란다. 노인 C는 아베도 김정은의 핵 엄포에 옛날과 같이 돈을 벌거나 간교한 술책으로 조국을 더 어렵게 만들지 못하리라는 예측을 했다.


 노인 D는 이번 조국의 현실은 비단이 장사 왕서방이 트럼프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것 같다고 일갈을 한다. 그러나 노인 A의 의견은 왕서방이 트럼프의 의견을 듣는 척 하지만 뒤로는 김정은을 위하여 석탄도 사 주고 오일도 공급하고 있기에 왕서방의 엉큼한 속내를 트럼프가 오판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노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이 노인들이 방담을 할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한국 식품점의 A 사장의 배려 때문이다. A 마트에서 선물로 받은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4 노인이 호호 불어서 식히며 더 받이한 커피 에 입맛을 돋운다. 이 노인들의 모임은 처음 7사람이 시작을 해서 매달 돌아가면서 점심 한끼씩을 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고독도 달래고, 자식 자랑 며느리 자랑 그저 자랑의 꽃만 피우는 자리이다. 내규가 남의 이야기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하려면 덕담만 하는 내규 때문이다.


 처음 7사람의 모임에서 한 사람은 장기간 병원 입원 신세를 지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차 운전에 겁이 많아 특별한 경우에만 참석을 한다. 오늘 다섯 노인이 모이기로 약속을 했으나 한 노인이 한국에 가게 되어 불참을 했다. 남은 4 노인이 점심을 하고 병원에 입원한 다른 노인의 문병을 위한 선물을 구입하고자 A마트를 찾게 된 것이다.


 노인 4 사람이 A 마트를 찾은 시간은 오후 2시 경이었다. 깨끗이 정리된 한국 식품점이 자랑스럽다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식품점에서 병원에 있는 노인의 위안품을 사고자 두리번거린다. 노인 A 가 두유를 한 박스 사자고 제의해 모두가 동의를 하였다. 가격도 특가 싸인이 붙어서 14불99전이었다. 노년연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이 두유를 사기로 결정을 하고 케쉬어에 두유 한박스를 갖다 놓고 계산을 하고자 한다. 


 케쉬어가 20불99전 이라며 돈을 요구한다. 노인 A “아이고 이 무슨 변고 이지요 지금 특가 싸인 14불99전을 보고 싸다고 생각하며 가지고 왔는데” 하고 질문한다. 이 때 식품점 주인이 지나가다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것다. 이에 식품점 주인 “네 잘못 되었습니다. 14불99전이 맞습니다”라며 잘못된 가격임을 시인하고 캐쉬어에게 5불을 환불(Refund)하고 군고구마 4개를 선물로 드리라고 한다. 


 캐쉬어가 죄송하다며 아주 큰 군고구마 4개를 선물로 준다. 노인 A가 당황하며 사양을 하고자 하나 이미 때는 지났다. 특가 가격을 지적했던 노인 A는 괜스레 미안함 속에 얼굴을 붉히고 가게문을 나선다. A 노인 혼자 차에 앉아 생각을 한다. 이 잘못된 가격 싸인을 지적한 것은 이 식품점의 번창과 대성을 기원하는 뜻에서 준 용기있는 충언이라고 자위한다. 식품점의 성공은 고객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 아끼고 다듬고 키워 나아가야 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경영학을 전공한 노인 A는 이 식품점의 시장 전략을 혼자서 음미한다. 경영학에서 마케팅 전략에는 시장 세분화 전략이라는 것이 있다. 즉 ‘The strategy of Marketing Segmentation’ 이란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시장 개척에 임할 때 시장 세분화가 중요한 포인트가 됨을 말한다. 


 예컨대 식품점이던 무엇이던 새로운 사업을 개척코자 할 때 장소, 시장을 오는 고객수, 나이, 성별, 빈부 격차, 교통편, 생활수준, 사람들의 분포(어떤 민족이 많이 살고있나) 등을 엄밀히 조사하여 사업장을 오픈함을 말한다. 이 수필은 경영학을 강의함이 아닌 잡설이니 여기에서 생략한다. 맥 다방의 4 노인은 오늘 A 마트의 최 사장의 친절한 배려로 군고구마 파티를 열면서 한국 식품점이 잘 되어야한다고 기원을 한다.


 이에 노인 D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어떤 식품점에서 특가 싸인이 붙어 있어 제품을 구입 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특가 가격이 아니고 3불을 더 지불한 것이었다. 돈 3불 더 지불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정확히 계산을 하지 않는 이 식품점에 대한 불쾌감으로 한동안 이 식품점을 찾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간단한 실수가 고객을 불쾌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객들도 무엇인가 잘못된 가격이라 생각이 되면 그 때 그 때 이를 지적함으로 실수를 하지 않게 하면 한인 식품점의 위상을 높이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정직보다 더 아름다움이 없고 또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보다 더 용기있고 귀한 것은 없지 않을까.


 계속되는 노인들의 방담에서 한 노인이 고구마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다. “두메산골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읍내 자취집에 들어가는 상가 길 옆에 군고구마 파는 노인이 있었어, 드럼통을 개조해 장작불의 숯에서 익히는 군고구마 였지, 이 읍에서 밤 11시경이면 ‘찹쌀떡 찹쌀떡 사려’하며 추운 겨울밤을 노래하는 찹쌀떡 장사의 노래 소리도 그립다. 뿐만아니라 아침 여명이 오면 ‘구두닦세 신 닦세’하면서 구두닦이 소년들이 잠을 깨웠었지. 오후 학교 퇴교 길에는 상가 모퉁이에서 팔고있는 군고구마 냄새가 얼마나 좋던지 그 냄새가 그리운 적이 많았어” 한다.


 나아가 서울이라는 곳으로 유학을 가서 대학이라는 곳을 다닐 때에도 자취를 하는데 쌀 떨어져, 돈 떨어져, 군고구마 하나로 하루를 보내며 찬 냉수로 배를 채웠던 추억들을 뒤적이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고생담의 추억을 돼새김 한다. 50, 60년대의 가난했던 조국의 과거를 생각하며 오늘의 잘 살아가는 조국을 누가 만들었을까 되뇌며 아마 그 때 우리 노인들의 배고픔의 결과와 훌륭한 지도자의 덕분이라 말을 한다.


 문학을 전공한 다른 노인 한분, 피난 생활에 얽혔던 군고구마 이야기를 한다. 피난길에서 아직 채 익지 않는 남의 고구마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캐서 먹었던 이야기다. 그 때 그 고구마 맛은 첫 사랑의 연인과 키스를 하는 것 같이 감미로웠다며 입맛을 다시면서 그 시절 피난길을 연상한다.


 미술을 전공한 잘생긴 또 다른 노인 한분, 종로 길을 걸으면서 군고구마와 군밤을 사서 디쉐네와 르네쌍스 뮤직홀에 들어가 군밤을 까고,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연애하던 추억이 담긴 이야기, 옆 좌석의 아가씨들 입맛 다심에 둘이서만 먹을 수 없었던 군고구마의 추억을 더듬는다. 나아가 요사이 젊은이들은 어떤 낭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해 한다.


 다른 한분의 노인 가라사대,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오늘의 잘 살아가는 조국을 건설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은 우리 같은 노인들이 살아온 길을 너무 이해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가득하다고 열변을 토한다.


 이제 석양은 오고 하루의 일과 추억을 우산 접듯 예쁘게 접어서 가슴에 쌓고 내일을 약속하며 누군가 기다릴 것 같은 둥지를 찾아서 4 노인들은 맥 다방을 나선다. 노인들 한분 한분의 마음속에서는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를 연속으로 주문 외우듯 한다. 빠른 시일내의 캐나다 경제의 회복과 우리 한인들이 어려운 경제 난국을 모두 잘 견뎌 나가기를 빌고 빈다. 또한 A 마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노인 A,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일갈을 한다. 즉 플라톤에 의하면 아무리 명예와 사랑과 황금을 얻었다 해도 이것으로 인간의 행복을 다 얻었다 자만할 일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명예, 사랑, 돈 등 인간이 갖고자 하는 모든 욕구를 다 충족치 못한 현실에서 무엇인가 새로움을 추구하고 얻으려 함에 우리 인간에게 참된 행복이 있으리라는 의견을 피력하며 다음을 약속하고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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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제10회 민초해외문학상 응모 마감

 

 지난 2월 초순부터 응모를 받은 제10회 민초해외문학상 응모작이 5월 31일자로 마감되었습니다. 


 금년 10회의 응모 지역은 북미에 한하여 응모를 받았는데, 뜻밖에 남미와 오세아니아주 등에서도 응모에 임한 분이 있었으며 접수된 응모자는 총 43명이 됩니다.


 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는 조그만 정성으로 우리 문화의 정체성 고양에 일조를 하고픈 마음의 문학상이 해를 거듭하며 750만 해외동포님들에게 널리 각인되고 있음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우리 해외동포 750만 명의 정서가 얼마나 고갈되어 있는가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면에서 미국의 응모자의 경우 계관시인으로 명성을 높이는 분으로 미국 의회에서 우리 문화와 정체성을 널리 고양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온 분과 정신과 의사로 30년 이상 봉사를 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필을 놓지 않은 분, 실로 개개인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우리 문화의 지속 발전 승계를 위한 사랑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캐나다 응모자의 경우 누구 그러면 우리 동포님들이 다 인지하시는 문사님 여러분들이 응모에 참여하셨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토론토, 밴쿠버, 에드몬톤 등을 중심으로 어떤 응모자 분은 벌써 3회를 응모해 오신 분도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순수한 문학상을 격려하는 마음의 일환으로 생각하기에 이유식 넓죽이 큰 절을 올립니다. 


 나아가 43명 응모자 전원에게 시상을 못하는 슬프고 아린 마음을 여기에 피력해 봅니다.


 초심(初審)의 경우 밝힐 수 없는 존경하는 원로 동포님들, 그리고 문학을 애호하는 문사님들 몇 분의 의견을 경청하여 최종 5분을 선정 모국의 권위있고 존경받는 선비님들에게 본심(本審) 심사를 의뢰하여 늦어도 8월 말까지는 최종 수상자가 결정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객관 타당성에 입각한 수상자가 결정되면 10월 혹은 11월경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을 운영해온 문학상의 권위를 위하여 제가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는 이곳 캘거리에서 조촐한 시상식 행사를 갖게될 것임을 밝혀 둡니다.


 성원과 격려 지도를 해주시는 해외 750만 동포님들, 그리고 조국의 자문위원님들과 저의 뜻을 이해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7년 6월 1일
 민초 해외문학상 운영위원회 회장 이유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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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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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니조성

 

▲교토에 있는 금각사(긴카쿠) 사찰 앞에서 

 

 

 지난 4월말 5박6일간 일본 여행길에 올랐다. 30여년 전 젊은 시절 동포사회를 위해 일할 때 일본을 3번 방문했었다. 그때는 시간이 돈이라 회의만 마치면 곧장 캐나다로 돌아왔기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용히 관광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 때였다. 그저 주마간산 격으로 스치면서 멀고도 가까운 나라, 우리 조국을 침탈하고 민족을 박해한 나라로만 생각한 나대로 경원하는 나라일 따름이었다.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에 다시 일본을 찾게 된 동기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딸과 사위가 여행을 같이 하자는 제의가 왔기에 우리 부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오사카, 고베, 교토의 3개 도시로 나에게 특히 관심을 갖게 하는 지역은 교토였다. 도쿄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라면 교토는 문화, 예술, 역사의 중심도시이며 오늘의 일본을 만드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을 학살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오늘의 일본을 이룩하는데 주춧돌을 쌓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장이 260여 년간 일본을 통치했고, 그 후 1100년간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4월 26일 우리 가족은 늦은 저녁 오사카에 안착하여 곧장 고베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베는 현재 신고베로 명명하며 도심이 현대식 건물로 꽉 차있고 깨끗한 인상을 주는 도시였다. 또한 고베는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 <아로마> 온천장이 있는 곳이다. 


 고베에는 세계적으로 맛을 자랑하는 고베 비프가 있다. 특수한 사육법으로 소를 기른다. 소를 먹이는 사료로 자연목초와 유기농으로 기른 식품을 사용한다. 고베 비프가 비싸다는 것은 식당에서 그 맛으로 증명해줌을 알았다. 


 고베에서 유명한 <이시하라> 비프 식당은 4곳이 있는데 언제나 만원이었다. 이곳 도착에서부터 예약을 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다음 좋다는 식당을 찾아 비프요리 맛을 보았다. 가격은 120그램에 미화로 98불을 받았다. 그런데도 겨우 예약해서 고기맛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 없어진다 할까 참 부드럽고 감미롭다. 가격이 비싼 원인을 알 것 같다.


 또한 고베를 신고베라 칭하는 것도 일본열도의 지진을 감안해 고층건물을 피하고 도심이나 가정집 등도 지진을 예방하기 위한 건물을 건축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고베에서 2박을 하고 오사카를 거쳐 이번 여행의 주목적지 교도로 향했다. 버스로 한시간반 거리인 교토를 찾는 길에 오사카를 볼 수 있었다. 오사카에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에 특별한 정감이 간다. 


 그러나 오사카는 시의 전경이 우중충하고 가로수나 숲이 없는 도시로 각인되었다. 건물도 흰벽돌로 쌓아올린 시멘트 불럭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고 가난한 도시로 조국의 60년대 서울 수준인 것 같았다. 귀한 시간을 오사카에 할당하지 않은 딸과 사위에게 감사하며 교토 중심가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교토에서는 일본의 정치와 역사를 알려주는 니조성을 제일 먼저 찾았다. 이 성은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통일하고 260년간 도읍으로 한 성으로 우선 성 건립의 역사부터 살펴본다. 니조성은 에도 막부 즉 도쿠가와 가문의 통치를 위한 성이다.


 에도 막부(1603-1867년)의 창시자이자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1603년에 완성되었다. 이에야스는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일본을 통일하고 260여년 동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룩한다. 그 후 15대까지 이어진 에도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을 누린 기간이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천황의 명으로 쇼군이 되었다. 그후 이에야스는 니조성에 모인 영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1614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마지막 거점인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다시 니조성으로 돌아온다. 이 전쟁의 승리로 도쿠가와 가문이 전 정권인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킨다. 1624년 에도막부 3대 쇼군 <이에미쓰>는 2년 후의 <고미즈노> 천황 행차를 맞이한다. 


 1867년 <니노마루> 궁전 대형회의장에서 15대 쇼군인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반납하고 영주들이 참관한 가운데 도쿠가와 가문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메이지시대가 시작되고 일본은 봉건제에서 근대 민주국가로 급격한 발전을 한다. 다시 말해 니조성은 봉건제의 마지막 무대이자 근대 일본 시작의 무대가 된 것이다.


 필자가 가장 궁금히 생각하는 것은 쇼군이란 것이 무엇인가였다. 쇼군이란 4세기에 시작한 천황의 조정통치가 694년 본격적인 도성의 나라로 만들어지면서 계속되었다. 즉 천황은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권은 무사가 쥐고 있었다. 무사의 우두머리를 나중에 쇼군이라 불리게 된다. 쇼군의 기원은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최고사령관이나 대원수와 같은 직책이다.


 쇼군은 동북부 지방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임명되었으나 1192년 이후 일본의 정치적 실권자에게 주어지는 직책이 되었다. 일본에는 <가마쿠라막부>(1185-1333)와 교토에 거점을 둔 <무로마치막부>(1336-1573), 에도막부(1603-1867)등 3대 막부가 존재하고 있다. 니조성은 에도막부의 강력한 권력이 일본 전역을 통치하는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은 <금각사>와 <기온> 즉 옛날 그 유명한 게이샤가 상주하던 지역을 관람했고, 그 다음날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대나무 공원을 관람했다.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는 필자대로의 고충은 신문사에서 많은 고충 속에 지면을 할애하는데 이 점을 감안 글의 내용을 줄이려 노력함에 있다. 


 글을 줄이려 하니 쓰고자 하는 의견이 독자들에게 전달이 잘 안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쓰고 싶은 글을 다 쓰고자 하니 신문편집의 어려움에 대한 미안함이 항시 있다. 이번 잡설산책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여기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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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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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3
러시아 방문기(19)

 

 

러시아 모스코바 1086 한민족학교 교장
엄 넬리 박사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

 

 나의 변은 이 문학상을 제정하면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에 누가 무어라 하던 마음은 항시 편안하다. 나아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해외동포 1천만명 중 한사람이라도 이유식이라는 사람이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민족문화 고양 승계에 일조를 하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해 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가끔은 조국에서 사업적으로 성공을 한 친구들이 민초의 부담이 너무 크다며 찬조를 제의 하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는 나의 순수한 뜻이 빛바래기 때문이다.

 


 1086 한민족 학교를 방문하고 엄 교장선생님과 상견례 사진도 찍었다. 엄 교장선생님의 민족 사랑은 어느 누구와 비교를 불허한다. 그간 러시아에서 만난 우리 동포 467명을 수양아들?딸들로 연을 맺고 지금도 그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족을 사랑하고 배려함은 우리의 마더 테레사 여사임이 분명하다.


 엄 교장 선생님은 우리 부부 일행이 방문하는 것과 한글날에 맞추어 이 학교 학생들에게 각 나라의 고유 음식을 장만해 오게 하여 52개국의 색다른 음식을 맛보게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 학생들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온갖 공연을 준비하고, 열연을 보여줌에 눈물이 핑돌았다. 이렇듯 민족을 사랑하시는 분 이렇게 남을 배려하시는 분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마음의 감사함을 풀길이 없었다.


 공식적인 상견례가 "끝난후 이곳에서 유명한 김치라는 한국식당에서 환영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김치찌개에 탕수육에 소주까지 질탕히 마시고 먹으며  오후를 보냈다. 여기에 엄 여사님을 그리며 나아가 467명의 수양아들 딸들과 레닌의 명예훈장을 받았을 때 엄 여사님의 선친이 우셨다는 것을 상상하며  러시아에 핀 무궁화 꽃을 재음미 해본다. 이에 467명의 수양아들?딸들을 생각하며 어머니라는 시 한편을 상재해 본다.


 
어머니


못 견디게 어머니가 그리운 날에는

비가 내린답니다

빗물 속으로 흘러만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둡고 각박한 세상인심에

어머니의 서광이 비추어 온답니다.

 

갈곳을 몰라

따스한 햇살에 몸을 적시면//

어머니의 환영이 뼛속 깊이 사무쳐와//

불타는 대지에//

보우강의 저녁노을 따라//

연꽃으로 피어난 어머니를 만난답니다.

 

먼곳에 해 넘어가는 소리//

백팔염주 굴리시던 어머니의 모습//

앙상한 가지 끝에 꽃잎 피어나는 냄새//

사랑의 진실을 깨우쳐 주시며//

환청으로 들려오는 불효자를 부르는 옥음//

식아 식아 니 어디에 있노

 

3000년을 기다리면//

우담바라 꽃이 피어나는 지요//

어머니 가신지 25년이 지났어도//

기쁘고 슬픈날에 피어나는 보이지 않는 꽃//

하늘과 땅을 덮고 있답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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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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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6
러시아 방문기(18)

 

(사진) 러시아 1086 한민족학교 현관에서 엄 넬리(오른쪽) 교장과 함께한 필자. 이 학교 학생은 750여 명이며 절반은 한국인의 핏줄이고 나머지는 타민족으로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일제의 강압과 식민지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생사를 걸며 북으로 북으로 떠돌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였을 것이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첫울음을 터뜨린 엄 넬리는 우리자신을 그대로 닮은 우리 얼굴모습이었다. 그녀가 알지도 알 필요도 없는 이념싸움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기적과, 더욱 기적일 수밖에 없는 학대받던 그 심장에다 한민족 학교를 세워 한글교육을 외치며 보급해온 것은, 기역 니은이라는 한글자음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동포 4세대로서, 이 엄청난 대업을 그것도 맨주먹의 여성으로서 혼자서 다 해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디아스포라문학 연구에서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십을 넘은 늦은 나이에 한글이라는 문자와 언어를 배웠지만 한글로 글을 써 모았다. 한글은 어느 연령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에 쉽고 재미있게 배워 무슨 생각이든지 글로서 쓸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는 자기가 배웠고, 같은 동포의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절체절명에 생애를 바쳤다. 이 내린 사명의 실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르치기 쉽게 한글교과서를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두발로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설득하여 어린 세대를 모았고, 국내문제에 골몰하여 동포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는 한국정부를 설득했다.


 6.25 전쟁 때의 적성국가 구 소련을 이은 러시아의 카레이스키 후예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며, 한글 교육 기적을 이루어서, 현지의 타민족들에게 한국인과 한글의 우수성을 일상으로 증명해주는 최선 최대 최고의 표본이 되어온 성공을 거두고 있다. 


 3) 더구나 한민족의 여성상을 입증하고 드높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외국 현지문화에 강요적으로 적응되더라도, 바로 엄 넬리와 같은 기질과 기상과 기백을 보여주는 한민족 여성다움의 기백과 기상을 유감없이 증명해주고 있다.


 4) 한글이 있는 곳은 어디나 한국이고, 한국어로 의사소통되는 곳은 어디나 한국문화의 꽃향기가 드높은 곳이다. 따라서 한글은 문자로서, 소리말로서도 보급되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재외동포 한글교육은 한심스런 현실이다. 이는 현지당국의 문제이전에 부모세대인 동포들 자신의 무감각 문제이다. 현재 일천만으로 추산되는 글로벌시대의 우리동포들은 지구 곳곳에서 현지적응에도 힘겨워, 후세의 한글교육은 엄두조차 못 낸다. 


 따라서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상 이전에 한글교육은 필수 불가결의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아직 거기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고, 선각적인 동포 몇 분의 피맺힌 몸부림만 신이 내린 사명으로 기대할 뿐인 현실 아닌가. 그런 몸부림 중에도 우리 한민족의 딸 엄 넬리가 온몸 던져 해낸 것이다. 


 개인적 삶이 없었던 엄 넬리 교장의 헌신에 대한 경의치고는 너무 빈약한 박수 쳐주기에 불과하지만, 일천만 해외동포를 가진 이 시대에, 민초 이유식 시인이라는 한 해외동포 시인이 사재를 털어 해마다 실시하는 이 상과, 너무나 닮았고 부응하는 실화적 업적이라는 사실에서 엄넬리의 자서전은 단연 경쟁불허였다.


 더러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동포들도 있고 앞으로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성공의 결과를 한 뿌리 한민족의식과 피보다 진한 혼백과 정신으로 뭉치게 하는 <한글>이라는 동족언어 조상언어의 절대성에까지 발전되지 못하고 그러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민초 이유식 시인은 칠년 째 사재를 털어 해오고 있고, 이는 엄 넬리 교장의 맨손 맨몸으로 전 생애를 던져 이룩한 이 자서전과 그의 글모음에서 민초문학상의 목적과 의도에 너무나 잘 부응 협연되는 <한글오케스트라>가 아닐 수 없다.


 5) 엄 넬리 교장의 이번 책은 한국민의 핏줄을 이어온 한민족의 쾌거이자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무궁대대로 전 세계 곳곳의 우리 동포들은 그들이 한국인의 혼과 정신과 기백을 이어가는 조상의 언어인 한글과 한글교육으로 노벨문학상을 겨냥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엄 넬리 교장선생님께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앞으로 무수한 엄 넬리들이 쏟아져 나와 글로벌 코리언으로 지구 곳곳에서 우뚝 우뚝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언어 한글의 보급과 적극적인 교육으로, 한글이 세계인의 언어가 되고, 모든 소리와 생각을 쉽고도 완전하게 표현해주는 과학적 미학적 속도적 우수성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역사는 연약한 개인의 노력으로 바뀐다는 것을 굳이 유태인의 성공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민초문학상과 엄넬리의 자서전에서 찾았다.


 
 심사위원장 : 유안진(시인, 서울대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심사위원 : 이동렬(수필가, 이화여대,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 명예교수)
            정소성(소설가, 한국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조성국(시조 시인, 한국 전 관악문협 회장)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자 엄넬리 니콜라예브나 박사의 약력: 러시아 모스코바 1086 한민족 학교 교장. 모스코바 레닌 사범대학교 지리 생물학을 전공, 1970년 교육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1998년 독토르(최고박사)학위를 재취득하고 교육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58년부터 모스코바에서 유치원과 일반학교 교사를 역임 후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한-러 수교후인 1992년 모스코바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통합된 11년 과정의 러시아내 유일한 1086 한민족 학교를 설립하고 이 학교를 한민족의 얼을 잇고 전파하는 요람 뿐만 아니라 모스코바 제일 명문으로 키워냈다. 지난 18년간 70여 차례 조국을 방문하여 민간외교 사절의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현재 이 학교의 학생 수는 700여명에 달한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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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58489
10333
2015-02-26
러시아 방문기(17)

 

 

 

(지난 호에 이어)
 지나가는 길이라 잠간 귀를 기울였더니 관광안내원 중 한 여성이 우리 곁에 나타나 왜 남의 관광안내를 듣느냐고 짜증을 낸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생각했다. 참 우리민족은 얄궂은 민족이라고, 만리타향 타국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면 반가웠으리라는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점에 환멸을 느끼며 돌아섰다.


 어디에서나 조그마한 감투를 과시하려는 것은 캐나다 동포사회에나 어디에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참 초라하고 불쌍한 민족의 한사람이라는 상념을 씹어 보았다.


 이 거리에는 옛날 조국의 방산시장에 전시했던 헌책방이 즐비하며 없는 것이 없는 거리와 같다. 상가에는 세계적 유명 브랜드의 점포에서부터 러시아의 토산품 등 무엇이던 살수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바이올린도 켜고, 노래도 하고, 그러면 지나는 행인들이 관람도 하고, 찬조금을 주기도 한다. 


 스타박스 커피점에서 커피도 마셨다. 북미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더 맛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 커피 값이 북미보다 조금 비싼 탓이리라. 이 유명 거리의 길이는 2킬로미터 운동하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밤에는 이 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메트로풀 호텔을 찾아가 식당에서 웨이트레스 야니의 설명을 들으며 맛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일찍 숙박집으로 들어와서 오늘 일정을 마쳤다. 

 

 러시아 여행 15일째

 

(사진) 10월 9일 오늘은 우리의 한글날,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엄 넬리 박사님과 이곳 학생들이 준비한 52개국의 음식을 시식했다. 엄 교장 선생님의 민족 사랑과 남을 배려하시는 깊은 정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각국에서 이 학교로 유학을 온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고유 음식문화를 소개하게 하고 우리에게 시식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민박집에서 나와 조국의 명동거리 아바트 길을 산책했다. 맥도날드에 들어가 커피 한잔으로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3일간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상상하며 러시아 여행을 매일매일 작성해서 글로 남기리라는 생각을 한다. 선상에서 만나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던 짧은 기간의 친구들 무사히 집으로 안착하였기를 기원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자 엄 넬리 교장 선생님을 상견례 하러 가는 날이다. 내가 감히 엄 박사의 수상 내용을 평할 수 없기에 여기 심사평을 쓰신 심사위원장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예술원 회원이신 유안진 시인님의 심사평을 옮겨본다.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심사평

 


*러시아의 심장부에 한글교육을 꽃 피우다"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도 대양을 꿈꾸며 흐른다는 말을 이번 민초문학상 심사를 하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민초문학상과 금년도 수상자 엄 넬리 교장이 바로 너무도 짝이 맞는 옹달샘이고 이 두 분의 꿈이 바로 대양을 향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전원의 이런 생각이 금년도 민초문학상을 엄 넬리 니콜라예브나 교장의 자서전 <러시아 심장부에 활짝 핀 무궁화>로 결정하게 했을 것이다.


 엄 넬리 교장은 카레이스키 4세대로서, 21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코리언이다. 그는 한국문학의 절대기초이자 기본인 한글의 글쓰기와 한글 교육의 성공사를 일궈낸 자서전을 썼다. 현역의 한글문인이자 한글교육자 한민족교육자의 웅대한 목적과 기적적 성과를 이룩하기까지의 피맺힌 실천인 그의 실화에서, 우리는 무수한 의미와 의의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문학성과 실화성을 가늠하게 된다. 따라서 몽골 인문대학교의 강외산 교수의 훌륭한 수필작품이 다음 기회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라고 유보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심사평은 저절로 엄 넬리 교장의 자서전에 담긴 동토에서 생존해낸 디아스포라들의 실화성과 엄 교장 개인의 오십 넘은 나이의 한글배움과 그의 한글글쓰기의 문학성과 후세 한글보급교육의 공로 등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한글>은 한글문학상인 민초문학상의 절대조건이라는 대전제에서 이 자서전은 한글로 된 글모음과 교육적 실화성으로 그 당위성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엄 넬리 교장이 오십 넘은 나이에 몸소 한글을 배워 한글글쓰기로 모은 글모음이 자서전에 상당부분으로 포함되었기로, 그 글모음에서 문학성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잘 쓴 작품이라도 한글로 쓰이지 않았으면 민초문학상의 심사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은 러시아 현실에서 소수중의 소수민족 언어인 한글의 보급을 위한 제도적 동포학교건립과 성공적인 한글교육의 업적 평가는, 이미 다면적으로 현지와 한국에서 높이 평가되어왔다. 해외동포 2, 3, 4세대에게 한민족의 혼이고 정신인 한글을 제도적으로 교육하여 온 실화를 자술한 이 자서전은, 그의 글모음의 문학성보다 더 뛰어난 실화적 공로로 국내에는 물론 러시아 현지에서도 무수한 상과 훈장을 받았다. 엄 넬리 교장이 세운 한민족학교와 교육프로그램은 물론, 기숙사 등 학교생활에서의 한국어사용과 한글과목 교육은 더욱 미래의 한글보급의 양양한 전망을 약속해 주었다. 가히 러시아동포사회에서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와 노벨문학상까지 기대될 수가 있다는 희망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의 수상은 엄 넬리 교장의 글모음에서의 문학성에 주목하였다. 이분의 글모음은 늦은 나이에 새삼스럽게 한글을 배운 피눈물의 과정이자, 그 과정 속에서 통감했던 해외동포의 어린 세대의 한글교육의 필요성과 몸부림자체였다. 구 소련연방에서 극소수 소수민족으로 생존해낸 그 자체만도 기적이었다. 우리는 그 기적에 대해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는데, 혹한의 동토 황무지에 너무 밤중 갑자기 짐짝처럼 실려져 짐짝처럼 내팽개쳐진 우리 동포들은 그럼에도 살아남았고, 후세대를 낳았고, 그렇게 태어난 엄 넬리 니콜라예브나는 우리민족의 딸이었다. 


 일제의 강압과 식민지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생사를 걸며 북으로 북으로 떠돌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였을 것이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첫울음을 터뜨린 엄 넬리는 우리자신을 그대로 닮은 우리 얼굴모습이었다. 그녀가 알지도 알 필요도 없는 이념싸움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기적과, 더욱 기적일 수밖에 없는 학대받던 그 심장에다 한민족 학교를 세워 한글교육을 외치며 보급해온 것은, 기역 니은이라는 한글자음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동포4세대로서, 이 엄청난 대업을 그것도 맨주먹의 여성으로서 혼자서 다 해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디아스포라문학 연구에서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십을 넘은 늦은 나이에 한글이라는 문자와 언어를 배웠지만 한글로 글을 써 모았다. 한글은 어느 연령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에 쉽고 재미있게 배워 무슨 생각이든지 글로서 쓸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는 자기가 배웠고, 같은 동포의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절체절명에 생애를 바쳤다. 이 내린 사명의 실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르치기 쉽게 한글교과서를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두발로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설득하여 어린 세대를 모았고, 국내문제에 골몰하여 동포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는 한국정부를 설득했다.


 6.25 전쟁 때의 적성국가 구 소련을 이은 러시아의 카레이스키 후예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며, 한글 교육 기적을 이루어서, 현지의 타민족들에게 한국인과 한글의 우수성을 일상으로 증명해주는 최선 최대 최고의 표본이 되어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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