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Two Women)' (4, 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I)
두 모녀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양면성 묘사, 연기자 소피아 로렌의 진면목 보여준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이에 "아무 일 없었다고 말했잖아요"라고 대답하며 "로마까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체시라. 그는 로마는 너무 위험하다며 미군이 들어간 후에 가라고 충고하고, 자기 어머니가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친절을 베푼다.
   플로린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모녀. 그러나 밤 사이 악몽에서 깨어난 체시라가 딸을 찾으나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미켈레를 찾으러 폰디로 갔거니 생각하고 마을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한 촌로로부터 뜻밖에 미켈레의 시체가 포르첼로(Porcello)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독일군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누가 봤다는 것이었다. 
   연인이었던 미켈레의 사망 소식에 울음을 터뜨리는 체시라에게 플로린도의 모친이 "부인, 당신 딸은 제 아들과 같이 춤추러 갔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까 차에서 말한 승전 기념 파티에 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어린애를 데려가다니 당신 아들 죽여버릴 거야!" "당신 딸도 좋으니까 따라간 거지! 강제로 데려갔겠어?" 
   실랑이를 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체시라.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제게 무슨 죄가 있길래…" 전쟁 때문에 행복하고 단란한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네오 리얼리즘 장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의 자식 걱정과 사랑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
   밤을 하얗게 샌 엄마 앞에 플로린도와 춤추고 몸 팔아 받은 실크 스타킹을 들고 나타나는 딸. 체시라는 격분하여 철없는 딸을 때린다. 그러나 로세타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미켈레의 말이 맞았어. '아무리 도망쳐도 자기 자신은 피할 수 없어.'… 미켈레 소식도 묻지 않는구나…" 하며 큰소리로 미켈레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로세타는 통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폭행 당하기 전의 순수한 소녀로 돌아간 듯…. 
   어머니도 같이 울며 모정으로 "엄마를 용서해. 그만 울거라. 내 딸 로세타, 금쪽같은 내 딸! 이제 자!"하며 딸을 부둥켜 안고 위로하는 장면을 줌 아웃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으로 외국영화로는 처음으로 1961년 아카데미 및 칸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2개의 국제영화상들을 휩쓸면서 소피아 로렌(Sophia Loren•90)은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 시상식 때 소피아 로렌은 무대 공포증 때문에 직접 수상하지 못하고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1942)'의 주연배우로 유명한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이 대리 수상하면서 "(소피아 로렌을) 이 야성미 넘치고 재능 있는 여자(This wildly beautiful and talented girl)!"라고 외쳤다고 한다. 
   당시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라온 여배우들은 '초원의 빛'의 나탈리 우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오드리 헵번 등 쟁쟁한 배우들이었는데, 이례적으로 '외국인'인 소피아 로렌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26세밖에 안 되었던 로렌이 '두 여인'에서 미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30대의 어머니로 분장하여 투박하고 강인하며 억척스러운 여성상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딸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깊은 모정을 온몸으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피아 로렌의 진정한 연기자로서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준 영화가 '두 여인'이었지 싶다. 
   한편 미켈레 역을 연기한 장 폴 벨몬도(Jean-Paul Belmondo, 1933~2021)는 상대적으로 유약한 진보주의자 청년으로 비치는데, 이탈리아 영화에 프랑스 배우가 출연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제작자 카를로 폰티가 자금 조달을 위해 프랑스 회사와 합작했을 때 당시 프랑스 법규정에 의해 프랑스 배우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 장 폴 벨몬도의 목소리는 이탈리아어로 더빙을 한 반면 로렌은 직접 영어로 더빙했기 때문에 영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체사레 자바티니(Cesare Zavattini, 1902~1989)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인 감독과 공산주의 작가의 만남에 의해 '구두닦이(1946)' '자전거 도둑(1948)' '밀라노의 기적(1951)' '움베르토 D(1952)' 등 주옥같은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공동 창출했기 때문이다. 
   데 시카 감독은 감독보다 배우로서 더 많이 활약했다. 예컨대 헤밍웨이 원작으로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했던 찰스 비더(Charles Vidor, 1900~1959) 감독의 '무기여 잘 있거라(1957)'에서 알레산드로 리날디 소령 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쥬디타 리쏘네(Giuditta Rissone, 1895~1977) 사이에 딸 에미를 낳은 후 1954년 이혼하고 1959년 스페인 배우 마리아 메르카데르(Maria Mercader, 1918~2011)와 재혼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법으로는 이 결혼이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8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자 파리에서 결혼했다. 
   그런데 리쏘네와 이혼하기 전에 마리아 사이에서 벌써 아들 둘을 두었다. 1949년생인 마뉘엘은 음악가로, 1951년생인 크리스티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 배우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참고로 마리아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유명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를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했던 라몬 메르카데르(Ramon Mercader, 1913~1978)의 여동생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데 시카는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딸 에미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해마다 성탄절과 새해에는 시계를 두 시간 거꾸로 돌려놓고서는 두 가족 모두 파리에 있는 메르카데르 집에 모여 자정에 축배를 들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73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여인'은 지금도 오페라 등으로 제작되어 공연되고 있는 걸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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