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I)
감옥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시골처녀의 애절한 순정
(지난 호에 이어)
"그에게 말은 못했지만 기다릴 거에요. 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지 못할 거에요. 그런 행복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그의 품에 안기는 마라. "헤어져요. 그리고 자기 길을 가요. 이해 해줘요. 난 '부베의 연인'이에요." 이에 스테파노는 말한다. "당신을 잊지 못할 거야. 죽을 때까지."
장면은 다시 재판정. 치올피 사제가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버스에서 있었던 사건을 시인하고 부베가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장면은 재판정을 크레인 샷으로 보여준다. 판결이 늦어지면서 어수선한 그러나 최종(유리한) 판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포착한 명장면이다.
이때 마라와 부베의 대화.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버리지 않을 거에요.
부베: 알고 있어. 내 편은 당신뿐이야.
마라: 친구들을 믿어요. 모두 당신 편이니까. 나쁜 건 이 재판정이에요. 결과만 보기 때문이에요.
부베: 당신이 있어줘서 큰 도움이 됐어. 그렇지 않았다면 목을 맸을 거야. 빚을 졌군.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당신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다시 개정된다. "정신 바짝 차려요. 혼자가 아니니까요"라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마라. 드디어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 컷 되고 장면은 달리는 기차로 디졸브 된다.
14년 장기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복역 중인 파르티잔 부베. "처음에 들었을 때는 불안했지만 의외로 담담했다"는 마라는 부베의 연인으로 그가 출옥할 날만을 기다리며 주위의 온갖 유혹도 뿌리치며 이곳 저곳 옮겨 다녀야만 하는 부베를 2주에 한 번씩 만나러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렇게 7년이 흐른 어느 날, 그녀는 부베를 면회 가는 기차역에서 예전에 청혼을 했던 스테파노를 우연히 만난다.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두 자녀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스테파노에게 부베와의 약속을 말하자 그는 씁쓸히 마라의 곁을 떠난다.
"7년 있으면 저는 34살, 부베는 37살.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결혼도 하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영화는 기차의 속력만큼 빠르게 바깥 풍경을 훑으면서 끝을 맺는다. 마치 기다림의 시간이 살같이 지나가듯….
마라의 이 마지막 대사와 첫장면의 독백은 그 당시 애인을 홀로 두고 군대에 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유행할 때라, 뭇남성들은 부베의 연인, 마라 같은 여자를 이상형으로 들먹이며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순진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만큼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명대사로 기억된다.
그런데 진작 이 영화가 추억의 명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이탈리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고전적인 사랑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마라가 당시 보편적인 우리 한국 여성의 면모와 가치관과 너무나 흡사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부베를 통해 영화의 시대적 상황과 정서들이 우리나라 해방 후의 사회적인 이념 갈등과 남성 위주의 봉건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현실 등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실화로 밝혀졌다. 카를로 카솔라 소설 속의 주인공 마라는 실존 인물 나다
조르지(Nada Giorgi, 1927~2012). 그녀는 피렌체의 외곽도시인 투스카니 시골인 폰타씨에베(Pontassieve) 출신으로 사춘기 시절에 파르티잔인 레나토 챤드리(Renato Ciandri)를 만났다. 레나토의 가명이 '바포(Baffo)'였는데 소설에서 '부베(Bube)'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레나토는 1945년 5월13일 폰타씨에베 근교인 마돈나 델 사쏘(Madonna del Sasso)에서 헌병과 그의 아들을 죽인 혐의로 프랑스로 도주했다. 궐석재판에서 19년 형을 선고 받고 체포되어 그동안 서로 서신, 면회 등으로 접촉하다가 1951년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서 약 90km 동쪽에 있는 도시) 감옥에서 결혼했다.
레나토는 초지일관 결백을 주장했지만 1961년에서야 석방되어 1981년 11월에 사망했다. 나다는 2012년 5월 24일 바뇨 아 리폴리에 있는 병원에서 85세로 사망했다.
나다는 소설 '부베의 연인'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녀 자신과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남편의 유죄 부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기 때문. 나다는 남편이 사망한 뒤에 부정적인 요소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비록 성사되진 못했지만 마씨미오 비아죠니에게 두 번째 자서전을 쓰도록 의뢰했었다는 후문이다.
루이지 코멘치니(Luigi Comencini, 1916~2007) 감독은 1960년 연출한 'Tutti A Casa' (Everybody Go Home)이라는 영화로 이탈리아 영화평론가연합의 '은 리본상 최우수제작상' 및 제2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특별금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는 명감독이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즐겨 연주되는 '부베의 연인' 주제곡을 작곡한 음악감독 카를로 루스티켈리(Carlo Rustichelli, 1916~2004)는 동갑내기 코멘치니 감독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다.
역시 CC가 주연하고 루스티켈리가 작곡했던 1959년 작품 "형사(The Facts of Murder)"의 주제곡인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는 그의 딸인 알리다 켈리(Alida Chelli, 1943~2012)가 불러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고전이다. '켈리'는 루스티켈리라는 이름이 길어 그냥 켈리로 줄인 예명이다.
그녀는 2012년 12월14일에 69세로 사망하여 이제 부녀가 모두 작고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미오…" 그 곡을 들으면 착 가라앉은 저음대의 중년 여자 같은 농익은 목소리로 들리지만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때 불렀던 노래이다. 이 노래와의 인연으로 '아모레 화장품'이 우리나라에 등장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명곡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이 곡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 이탈리아어학과를 선택, 진학했을 정도이다.
영화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이젠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영화나 음악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헐리우드계 상업성에 식상해서인지 예술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오래도록 곱씹어 볼 만한 감칠맛 나는 이런 영화들이 그리운 것은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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