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Casablanca)(6?끝)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I)
 

등장인물의 캐릭터, 인상적인 대사, 주제음악 등이 어우러져 
코미디, 로맨스, 서스펜스가 완전 균형을 이룬 전설적인 명화 
 

 

(지난 호에 이어)
   마이클 커티즈가 만든 작품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을 언급해 보면, 'Santa Fe Trail(1940)'에서 에롤 플린과 함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미국 제40대 대통령 역임)이 주연했고, 'Life with Father(1947)'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 'Romance on the High Seas(1948)'에서 도리스 데이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또 '열정의 무대(King Creole•1958)'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월터 매타우(Walter Matthau, 1920~2000)가 공연하기도 했다.
   마이클 커티즈 감독은 평생토록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1944년 3월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카사블랑카'로 작품상, 각본상을 비롯하여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연설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그는 어눌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So many times I have a speech ready but no dice. Always a bridesmaid, never a mother." 

 

   또 한번은 '카사블랑카' 촬영현장에서 '푸들(poodle)'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사실 그의 의도가 '조그만 물웅덩이(a puddle of water)'였다는 것을 알고 세트디자이너가 당혹해 했다고 한다. 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은 자신의 비망록 두 번째 책의 제목을 'Empty Horses'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커티즈 감독의 말실수 중에서 사실은 '기수 없이 말만 가져와라(horses without riders)'는 의도였는데 '속이 비어 있는 말을 가져와라'라고 말한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금발 벽안(碧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큰 키의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은 17세 때인 1932년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 왕립연극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연기를 배웠고,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1936년 '간주곡(Intermezzo)'에 출연한 것이 헐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어 1939년 미국으로 오게 된다. 그해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이별(Intermezzo: A Love Story)'에 출연하며 헐리우드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영어도 못했고 키가 너무 크고 높다란 코와 짙은 눈썹을 가진 외모에 독일식 이름을 가진 그녀였지만 결코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끼 없는 자연미 그대로의 순수하고 신선한 미모와 개성 때문에 헐리우드의 성형미녀들을 제치고 성공하는 비결이 되었다. 

 

 

   그런데 버그만 자신은 '카사블랑카'를 그렇게 썩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인 1943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그 다음해 '가스등(Gaslight)'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1945년 '세인트 메리의 종(The Bells of St. Mary's)'에서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3년 연속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캐서린 헵번이 세운 4번 연속 기록이 최고이다. 그밖에 2개의 에미상, 4개의 골든글로브상과 토니상을 수상했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도 인연을 맺어 '백색의 공포(Spellbound•1945)', '오명(Notorious•1946)' 그리고 컬러 작품인 '염소자리(Under Capricorn•1949)' 등 3편에 출연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영화 '이수(離愁•Goodbye Again, 1961)'에 출연 당시 그녀는 45세였다. 하지만 실제 나이보다 너무 젊어 보여 분장사가 오히려 이 배역에 맞도록 눈에 섀도우를 바르고 목에 주름살을 그려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모 뿐만 아니라 5개 국어에 능통한 재원인 그녀가 30대 초반에 이탈리아 유명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벌어진 스캔들은 너무나 유명하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Open City)'와 '전화의 저편(Paisan)'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잉그리드 버그만.”

 

 

   버그만은 이윽고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로셀리니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만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고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으며 버그만은 결국 헐리우드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당해 배우 경력 최고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후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로셀리니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쌍둥이 딸을 두었다.    
   그러나 로셀리니와 헤어진 버그만은 다시 미국 영화계로 복귀한다. 6년의 시간이 흐르며 여론도 누그러져 1956년 '추상(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면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절친한 친구 캐리 그랜트가 대신 받아줬다. 
   분장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의 자연미와 웃을 때나 울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열의 하얀 이로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 1974년 추리소설의 대가인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8년 마지막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 4년 뒤인 1982년 영국 런던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런던에서 화장되어 스웨덴 서안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스톡홀름에 있는 부모님 납골당에 같이 안치되었다.
   '카사블랑카'에 출연한 배우 중 2008년에 조이 페이지를 끝으로 생존하는 배우는 없다. 하지만 코미디, 로맨스, 서스펜스가 완전 균형을 이룬 전설적인 명화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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