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 (The 25th Hour) (하)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V)

'하나님의 구원조차도 차단이 된 최후의 시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는 기구한 인생유전

 

 

원고 측 검사(알렉산더 녹스)가 요한 모리츠는 총 3,728개 잡지의 모델로 나와 현대 역사상 나치의 가장 사악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그를 모델로 하여 뮐러 대령을 비롯한 나치는 우수인종의 우월성과 타민족에게는 잔인함을 가르쳤다고 강변한다.

피고측 변호인(마이클 레드그레이브)의 질문.   

"모리츠 씨, 오늘 왜 이 법정에 서게 된 지 아십니까?"

"8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끌려다녔습니다."

"재판장님, 요한은 상황을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바랍니다. 내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정의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아니 피고인의 부인 수잔나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수잔나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변호인. 집을 뺏기지 않기 위해 경찰서장의 강압에 못 이겨 이혼장에 서명했고, 요한의 독일군 사진 때문에 독일로 피신했다가 러시아군에 잡혀 성폭행을 당하여 이듬해 낳은 2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는 기막힌 내용이었다.

그리고 "재판장님, 이 여인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판결이 그녀에 대한 답장일 것입니다. 이 부부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세상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하고 끝을 맺는다.

 

 

순박한 루마니아 농부 요한 모리츠는 거대한 역사무대에서 이름 없는 엑스트라로 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타의에 의해 유대인이 되고, 헝가리인도 되었다가, 아리아인이 되어 나치 협력자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다시 루마니아인으로 돌아오는 처절하고 기구한 인생유전의 주인공이다.

아내 수잔나에게 정욕을 품은 마을 경찰서장의 한 장의 날조된 서류가 개인의 주장이나 의지에 우선하여 무려 만 8년 동안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전쟁의 모든 고통을 혼자 다 겪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요한 모리츠는 햇수로 10년 만에 결국 무혐의로 풀려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해후하는데….

1949년 11월 독일의 어느 역에 기차가 들어온다. 요한 모리츠가 내린다. 기차는 떠나고 잘못 내렸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요한. 역사(驛舍)쪽에서 3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수잔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이가 들은 모습이지만 둘은 옛날 그대로라며 반긴다. 셋째 아이에게 이름을 묻지만 수줍어하며 대답을 못하자 수잔나가 마르코라고 알려준다.

 

이때 뉘른베르크 재판 담당 기자(폴 맥스웰)가 취재하러 나타나 사진을 몇 장 찍겠다며 "웃어요! 계속 웃어요!"라고 주문하면서 연방 플래시를 터뜨리자, 두살배기 마르코를 안고 억지웃음을 짓던 요한 역의 앤서니 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기막힌 표정 연기는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때 나오는 주제음악은 루마니아 전통민속 현악기인 코브자(Cobza)로 연주되었는데 오프닝 크레디트 및 여러 장면에서 연주되어, 주인공 요한 모리츠가 겪은 절망과 불안의 시간을 대변하듯 잔잔하면서도 슬픈 분위기로 묘사되었다.

 

 

음악감독 조르쥬 들르뤼(Goerges Delerue, 1925~1992)의 작곡이다. 그는 프랑스 국립음악원 출신으로 약 20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신의 아그네스(1985)', '플래툰(1986)' 등에서처럼 클래식 음악 한 곡씩을 삽입하여 인간 내면심리를 잘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프닝 크레디트에 이름이 나오진 않았지만 모리스 자르와 공동 작업을 했다.

비르나 리시(Virna Lisi, 1936~2014)는 테렌스 영 감독, 윌리엄 홀든과 공연한 '크리스마스 트리(1969)' 그리고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1969)'에서 또다시 앤서니 퀸과 공연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 배우.

 

 

원작자인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는 루마니아의 인텔리 작가로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유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루마니아가 소련 공산당의 지배를 받자, 1946년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직접 제목을 지어주었다는 이 '25시(La Vingt-Cinquieme Heure)'를 3년 뒤인 1949년에 출간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는 그의 아버지처럼 파리에 있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사제가 되어 공산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을 벌여나가던 중, 이 영화를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그는 한국의 반공정책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하면서, 1974년부터 모두 5번이나 내한하며 우리나라를 '제2의 고향'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게오르규는 '트라얀 코루가'로 상징되었는데, 그는 '25시'를 '최후의 마지막 시간', 즉 '하나님의 구원조차도 차단이 된 절망과 불안의 시간'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1970)가 1958년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폴만 교수 역으로 출연하여 "시험 당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다"며 "(전쟁은) 하느님이 뜻하신 일이 아니야. 우리가 저지른 실수이지"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결국 '인간이 선택하는 일은 신도 어쩔 수 없다'는 "25시"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 여겨진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총 42편을 연출한 앙리 베르누이 감독(Henri Verneuil. 1920~2002)은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 직후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민하여 정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자서전적 영화 "나의 어머니(Mayrig·1991)"로 잘 알려진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이다. 그의 작품 중 알랭 들롱, 장 가뱅 주연의 "지하실의 멜로디(1962)", "시실리안(1969)" 등이 대표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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