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I)
다 읽지도 못한 아내의 편지는 강물에 떠내려가고…
(지난 호에 이어)
그 후 1942년까지 컬럼비아사에서 반나치 영화를 제작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잠깐 독일로 갔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유니버설 인터내셔널사에서 1950년대(1952~1959)에 주옥 같은 멜로드라마를 제작함으로서 당시 유행하던 가족 멜로드라마 제작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 중 걸작으로 평가되는 4편의 영화는 '위대한 망령(Magnificent Obsession•1954)', '천국이 허용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1955)', '바람에 쓴 편지(Written on the Wind•1956)',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1958)' 이다.
특히 '슬픔은 그대 가슴에(Imitation of Life•1959)'는 셔크 감독의 "왕관에 박힌 보석"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당시 유니버설사에 노다지를 안겨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간 후 영화에서 손을 떼고 스위스의 루가노에서 30년 가까이 여생을 보내다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존 가빈(John Gavin, 1931~2018)은 친구의 권유로 유니버설사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193㎝의 건장한 체구에 남성적이고 잘 생긴 점이 '제2의 록 허드슨'으로 낙점 받아 1956년 데뷔했다. 그가 첫 주연하여 스타덤에 올랐던 영화가 바로 '사랑할 때와…'였다.
그리고 다음 해 '슬픔은 그대 가슴에(삶의 모방)' 출연 이후 그의 전성기인 1960년에 줄리우스 시저 역으로 나온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 도리스 데이와 공연한 '누군가 노리고 있다(Midnight Lace)' 등에 연거푸 출연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사(經濟學史)를 전공하였으며 재학 중 해군 ROTC를 수료한 후, 4년의 군복무 기간 중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1951년부터 종전 때인 1953년까지 미해군 '프린스턴' 함대 소속 공군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 능통하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1981~1986년 간 멕시코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 1971~1973년 간 미국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배우로서의 명성만큼이나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남달랐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콘스탄스 타워스(Constance Towers•90)인데, 존 웨인, 윌리엄 홀든 주연의 '기병대(The Horse Soldiers•1959)'에서 한나 헌트 양으로 나와 우리와도 안면을 튼 배우이다. 타워스나 가빈 모두 두 번째 결혼이었고, 자녀도 모두 첫 번째 배우자로부터 2명씩 데리고 온 결혼이었다.
릴로 풀버(Lilo Pulver•94)의 본명은 리젤로테 풀버(Liselotte Pulver)로 주로 남자 같은 여자 역으로 많이 출연한 스위스 베른 출신 배우. 그러나 그녀는 항상 얼굴에 따뜻하고 즐거운 웃음을 머금고 있는 배우로 잘 알려졌다.
음악감독 로자 미클로시(Rozsa Miklos, 1907~1995)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그레고리 펙,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백색의 공포(Spellbound•1945)', 극중의 반복되는 오셀로 역에 급기야는 자신도 질투의 화신이 되어 무의식 속에서 한 여인을 살해하게 되는 로널드 콜맨 주연, 조지 쿠커 감독의 '이중인생(A Double Life•1947)'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 허(Ben-Hur•1959)' 등의 음악을 맡아 아카데미 음악상을 3번이나 수상한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유명한 작곡가이다.
여기서 게슈타포 장교 역으로 잠깐 나오긴 했지만 클라우스 킨스키(Klaus Kinski, 1926~1991)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테스(1979)'에서 주연했던 나스타샤 킨스키(63)의 아버지다. 폴란드 조포트 태생 독일 배우로,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곧잘 삐뚤게 다문 입매에 냉소를 흘리던 그의 이미지는 악역의 대명사처럼 보였다.
'닥터 지바고(1965)'에서 굴라크로 돌아가는 기차 속에서 만난 냉소적인 무정부주의자 죄수 역, '속(續) 황야의 무법자(1965)'에서 리 반 클리프에게 고초를 겪다 죽임을 당하는 악당 역 정도가 비교적 알려진 작품들.
킨스키의 성장기는 불우하기 짝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 17세의 나이에 독일군에 징집됐던 그는 다음해 1944년 네덜란드에서 전투 개시 이틀 만에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지냈지만,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 대부분이 죽고 사라진 뒤였다. 갈 곳 없던 그는 연극무대에 올랐고, 터뜨릴 곳 없는 울분의 출구와 같은 그곳에서 광포한 카리스마와 그만큼 사나운 성격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렸을 때 동고동락한 인연이 있던 베르너 헤르초크(Werner Herzog•81) 감독의 총애로 발탁되어, 인간의 욕망과 광기 어린 집착을 그린 '아귀레, 신의 분노(Agurre, the Wrath of God•1972)' 등 5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등장함으로서, 그의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와 같던 신들린 듯한 연기가 스크린에 남게 된다.
그는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를 주연하고 연출한 '파가니니(1989)'를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라구니타스에서 심장마비로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다.
세 번 결혼하여 각각 한 명씩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폴라, 나스타샤 등 딸 둘은 아버지를 돌보긴 했지만 정작 장례식에는 막내인 아들 니콜라이만 참석했다. 안타깝게도 자식들이 부정(父情)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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