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
평생 전쟁터에 간 남편만을 기다리며 살아온 한 여인의 순애보!
[필자주: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왔다. 전쟁에서의 패전은 한 나라의 모든 '보수적 가치'를 박살낸다.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노약자들과 여성들이다. 여기에는 전쟁터나 감옥에 보낸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안타까움이 있는가 하면, 약탈과 강간의 희생자 또는 오명을 남기는 성적인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고, 고아가 된 아이들의 아픔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애절한 슬픔과 한(恨)이 담긴 15편의 작품들을 선정하여 '전쟁과 여인의 운명'이라는 주제로 묶어 소개한다.]
'두 여인(1960)'을 제작한 3총사, 즉 각본을 쓴 체사레 자바티니(Cesare Zavattini, 1902~1989), 제작을 맡은, 소피아 로렌의 남편인 카를로 폰티(Carlo Ponti, 1912~2007), 그리고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 감독이 그후 10년 만에 다시 뭉쳐 만든 영화가 '해바라기(Sunflower)'이다.
그러나 3총사도 세월이 흘렀음인지 전성기의 네오 리얼리즘보다는 멜로 드라마쪽으로 흘러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영화 중에서 아마 눈물샘을 가장 많이 자극했던 영화였지 싶다. 거기에 헨리 맨시니의 음악이 큰 몫을 했다.
1970년 이탈리아 컬러 작품. 러닝타임 101분. 영화 '해바라기'는 정치성을 완전 배제한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구소련에서 촬영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념과 체제가 대립했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수입이 금지되어 10년쯤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개봉되었다.
우크라이나 대지 위에 흐드러지게 핀 해바라기. 애수에 젖은 헨리 맨시니 작곡의 주제가.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해바라기'는 전쟁에 농락 당한 남녀를 그린 고급 멜로드라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카메라가 러시아에서 실종된 이탈리아 병사를 찾는 전단지가 빼곡히 붙어있는 벽을 천천히 훑으며 시작된다. 마치 우리나라의 남북이산가족찾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12일 전에 결혼한 조반나(소피아 로렌)는 신혼의 달콤함을 알기도 전에, 전장에 나가지 않기 위해 정신이상자로 위장했던 남편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결국 발각되어 러시아 최전방 전선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기차역에서 슬픔과 연민이 교차되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숱한 해가 지나고 어느 상이군인의 외침으로 전쟁이 끝났음을 안 조반나는 귀환병들이 탄 열차를 뒤지며 남편을 찾지만 그리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을 모르던 남편이 전선에서 실종됐다는 통지서를 전달받고 조반나는 망연자실한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소속된 부대에서 제대한 한 군인(글라우코 오노라토)으로부터 전선에서 퇴각하던 중 눈 속에 쓰러진 안토니오를 남겨두고 혼자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조반나!
남편이 보낸 편지와 함께 동봉된 사진 뒤에 적힌 사랑한다는 짧은 메모를 보며 살아있음을 굳게 믿는 조반나는 남편의 사진 한장 달랑 들고 멀고 먼 땅 러시아로 향하는데….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계속되는 그녀의 여행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녀가 지나가는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들판에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숲을 이루고 있는 해바라기 밭에서 일하는 현지 러시아 여성(나디아 세레드니첸코)이 조반나에게 말한다. "해바라기 한 그루마다 이탈리아 군인 한 사람씩 묻혀 있어요. 독일 나치가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했으니까요. 그리고 수많은 러시아 군인과 농민도…."
먼길을 돌아 간신히 묻고 물어 남편이 살고 있는 집을 찾는 조반나. 거기에는 젊고 아리따운 마샤(루드밀라 사벨례바)라는 러시아 여인이 빨래를 걷고 있다.
마샤는 오래전 겨울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구해주었던 생명의 은인으로 그와 결혼하여 지금 예쁜 딸아이까지 낳아 살고 있는 여자였다. 조반나는 이 젊고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 앞에서 남편을 찾아온 자신이 오히려 늙고 초라하게 느껴짐을 어쩔 수 없다.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자 예쁜 딸까지 둔 남편을 놓아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조반나의 찢어질 듯한 심정이 소피아 로렌의 표정연기에 잘 나타나 있다.
조반나는 마샤와 함께 안토니오를 마중하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간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남편의 모습이 보이기를 기다리는 조반나 앞에 초췌한 러시아 노동자로 변한 초로(初老)의 안토니오가 기차에서 발을 조금 절뚝거리며 내린다.
수년간 그토록 만나보기를 갈망했던 남편이 정작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고, 손 한번 못잡아보고 황급히 그를 피해 그냥 기차에 뛰어올라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조반나의 비참하고 불우한 운명!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회한의 오열을 터뜨린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다시 이탈리아 밀라노로 돌아온 조반나는 남편을 잊고 살기로 작정하고 방마다 걸어 놓은 안토니오의 사진액자, 그리고 옷가지와 편지 등을 모두 방바닥에 내동댕이쳐 부수고 찢고 발로 짓밟는다.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 조반나의 격한 행동을 통해 그녀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리워 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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