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풍운아 윤치호의 <우순소리>-부록 尹致昊 語錄’은, 개화기의 선각자 윤치호가 주권을 빼앗긴 대한제국과 일본 통감부를 비판하고, 윤치호 고유의 풍자와 교훈을 곁들인 비유문학 작품이다.
1908년에 <우순소리> 71편을 초간 발행했으나 통감부가 발매금지하였는데, 1910년에 하와이에서 증보판으로 발간한 것을 이번에 현대문으로 재구성하고, 윤치호 어록을 부록으로 넣어 펴낸 것이다.
책의 내용은 조선의 대중과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대한제국이 겪은 암울한 사례를 이솝우화를 인용하여 쓴 글이다.
윤치호일기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의 기노시다 다까오 (木下隆男)박사가 일본외교문서에서 검색한 바로는, “<우순소리> 내용이 (1) 일본통감부를 풍자한것 (2) 고종황제를 풍자한것 (3)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대신을 풍자한것 (4)무지몽매한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는 조선인민을 풍자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12화 ‘보호국 保護國’내용은 일본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통감부가 발매 금지처분을 하게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09년5월4일자 통감부 문서10] pp 362.”
이 책을 발간하게 된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윤치호가 외부협판직을 다시 맡은 1904년에 나가모리 계획을 극력 반대 했고, 을사조약체결후 외부대신서리를 맡으라는 스티븐스 고문에게 일본의 처사를 비판하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서 통감부의 미움을 샀다.
윤치호는 1906년10월에 한영서원을 개설했고 애국가를 포함한 찬미가를 만들어 교회와 학생들에게 보급했으며, “대한제국은 자강지술?을 강구하지 않고 인민은 우매하여 마침내 나라는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인민이 분발하여 자강에 힘쓰고 단체를 만들어 힘을 합치면 국권을 회복할 수있다”고 믿고 1906년에 자강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07년에 통감부에 의해서 강제 해산당했다. 같은 해 국권회복 운동을 위한 신민회, 청년학우회 등을 조직했으며, 1908년에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윤치호는 에모리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수여하겠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국내사정이 어려워서 사양했다. 자강회 활동도 중단되었다.
1910년 하와이에서 <증보판 우순소리>를 발행할 때와 미국 순회 중에도, 윤치호는 통감부 뿐만 아니라 일본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국내사정이 어려운데도 1910년1월에 하와이를 거쳐 미국 장기순회를 결심한 것은, 감리교총회 참석, 기독교 이상촌 건설을 위한 모금, 에든버러 선교대회에 참석하는 일 외에 하와이 교민을 방문하여 발매 정지된 <우순소리> 증보판을 재발행 하기 위해서였다.
이 증보판에 추가된 3편은 <음양가의 망태- (미신에 미혹된 미개한 사회 조명)>, <김도령의 아량(공익과 봉사정신이 없는 탐욕스런 고관들과 달란트의 교훈)>, <무식한 아버지와 아들 (잘못된 지도자와 이에 맹종하는 백성, 장님이 장님을 인도할수 없다는 비유)> 이다. 이 3편은 이솝우화가 아닌 윤치호가 창작한 야담형식의 풍자적인 작품이다. 또한 한영서원시설을 위한 기금 마련 과 미국 각지(샌프란시스코,시카고, 보스톤, 워싱턴, 아틀란타등)의 교민을 격려하고, 알라바마의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본딴 기독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하여 부커 워싱턴박사를 만나서 자문을 구하고, 감리교평신도대회에 참석하였다.
윤치호는 마지막 일정으로 <에든버러1910년 세계선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외국선교사역과 토착교회의 역활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1,250명의 미국과 영국의 교회지도자들은 윤치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세계기독교 지도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윤치호가 하와이에서 발간한 <우순소리> 와 <에딘버러 1910년세계선교대회>에서 세계기독교 지도자들이 윤치호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1911년 7월 송도 한영서원에서 개최한 제2회YMCA 하령회는 일본이 윤치호를 위험인물로 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급기야는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조작하여 4년간 투옥시켰다.
기노시다 박사가 “일본외교문서 에서 확인한 바로는 윤치호 의 미국 순방 목적이 교육사업과 종교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우찌다(內田)주미 대사는 윤치호가 출국하여 귀국할때 까지 모든 동정을 철저히 감시하여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내신에게 보고하였다.(전 한국외부협판 윤치호 동정에 관한 건, [요시찰한국인 거동 3] pp 549.”
윤치호는 개화기에 동서양 문화와 학식을 겸비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기독교 지도자, 정치가, 교육자, 민권 운동가, 체육인, 자선사업가, 애국가 작사자이며, 발라드 시인이었다. 기독교정신으로 백성들을 자급자족, 근면, 봉사, 공익을 일깨우는 일에 힘썼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였다.
윤치호의 <우순소리>는 그가 학부협판, 외부협판, 지방감리등 공직과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하며 개혁을 추구했으나, 위정척사衛正斥邪 와 사대주의자 들의 저항에 부딛혀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했던 사례들과, 독립협회가 친러파와 고종황제에게 탄압을 받고 해산당한 일.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상실한 절망과 비애, 자강회가 통감부에게 해산당한 일들을 망라하여 이솝우회에 비유하였고, 인민들이 자각하고 분발하도록 <증보판 우순소리>를 발간하여 대중들과 학생들에게 보급한 것이다.
<우순소리> 에 담긴 우화들은 , 대한제국이 고목枯木처럼 쓰러진 과정을 자조적自嘲的으로 비판하면서 요약한 사례들이다. 그가 추구했던 신념과 내면의 실상을 파악하려면 60년에 걸쳐서 쓴 <윤치호일기>와 <윤치호서한집>을 읽어야 이해할수 있는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일기중에서 어록들을 요약 발췌하여 부록으로 올렸다.
현대문으로 재구성한 <우순소리> 와 <어록>은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한 것이며 현대시국에 대한 교훈이기도 하다.
끝으로 김동길교수님의 말을 인용하여.“대한제국이여! 이게 뭡니까 ?”외치고 싶다. 2021.7. 토론토 파크누보에서 友史 閔 碩 泓(우사 민석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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