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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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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125. 엘 에스코레알궁의 돈 까를로(Don Carlo de El Escorial)(하)

 

우리 부부는 이미 ‘죽음을 꿈꾸는 나이’를 지나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삶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헤아릴 나이가 되었다. 육신으로 매장(埋葬)해도 뼈만 남고, 화장(火葬)을 해도 뼛가루가 남는다면, 봉분을 만들어 좁은 땅에 산소자리만 넓게 차지할 것이 아니라, 가족단위로 작은 경당을 만들어 화장한 상자를 대대로 한 군데에 안치한다면 자손들이 잊지 않고 찾아오리라. 
남편 민 장로의 선산(충남 홍산)도 판테온 만큼의 세월에 좋은 명당자리였으나 국토 개정으로 산소가 여러 조각이 났다. 이젠 우리 다음 대부터는 들어설 산소자리가 없다. 이런 기회에 7남매 중의 한 사람인 우리 부부가 우리 터에 작은 경당을 만들어 해마다 추석날 한 번이라도 모여 예배도 보고 자손대대로 그곳에 작은 유골상자를 안치 한다면, 엘 에스코레알의 판테온이 부럽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의논 중이다.
 

우리의 영혼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 강을 건너가, 흩어진 뼛가루를 모아 재조립해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세상의 자손들이 부모, 조부모를 기억하며 모이는 일은 가정의 화목과 전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부부가 교회당 앞에 서서 귀여운 들러리 소년들을 앞세우고 사진 찍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나, 우리는 잣나무로 둘러싸인 오솔길을 걸어 나왔다. 숨막힐 듯한 역사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자연의 품으로. 이냐시오 성인의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다짐 하면서.
 
영원하신 말씀이신 주님, 오직 하느님의 아들로 나신 이여
저에게 진실로 관대함이 무엇인지 가르치소서.
당신이 기뻐 받으실 만큼 당신을 섬길 수 있게
값을 헤아리지 않고 줄 수 있게
상처를 돌보지 않고 싸울 수 있게
안식을 구하지 않으며 일할 수 있게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혜만을 구하게 가르치소서. 아멘.(윤경남 옮김)
 

<후 기>


   우리가 서울에서 출석하던 안동교회의 유경재 원로목사님이 얼마 전에 내게 책 두 권을 보내주셨다. ‘삶과 꿈’에 실린 나의 포토 에세이를 빠짐 없이 읽어 주셨는데, ‘엘 에스코리알’의 판테온에 대한 나의 의견에 대한 답이다.
유 목사님이 은퇴기념으로 쓴 ‘출생처럼 죽음도 은총이다’(목회교육 연구원 출간 2004)를 우리도 열심히 읽으며 죽음에 대한 명상에 자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것으론 아무래도 나의 ‘영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알폰스 데에켄 신부님이나 최민순 신부님의 글을 좋아하는 걸 아신 듯, 라디 슬라우스 보로스 신부(김진태 옮김)의 “죽은 후에는…”과 로핑크 신부의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신교선 이석재 옮김)를 보내셨다.
 
놀랍게도 이 책들의 공통점은,  ‘천국, 지옥, 연옥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
‘죽은 후에는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인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죽음과 함께 내 세계에 속한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것.’
‘부활은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결단의 순간 즉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며, 만물의 영광된 변모를 의미한다’는 것.’
‘세상이 고독 속에 꺼져 버릴 위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겸손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뛰어드는 사람. 허리가 굽어 가고,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기력이 쇠약해져도 행복한 사람으로 남아 있으리라. 세상의 운명, 하느님을 향해 길 떠난
사람의 삶이 그 사람 안에서 실현된 것이므로.’(‘죽은 후에는’ p.123)
 

유경재 목사님의 죽음관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34); 출생처럼 죽음도 은총이다, 127페이지)’를 얻기 위해 본향을 향해 준비하고 떠나는 나그네와 같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계속적인 성장으로서의 죽음’을 맞음에 따라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율법으로 오신 하느님이 신약시대의 사랑의 하느님으로 오셨으므로, 결국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 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랑이 있기에 능동적인 죽음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언제나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을 느끼긴 했지만, 라디슬라우스님이 쓴 ‘형제애, 이웃사랑‘의 장에서 더 새롭게 느꼈다.
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 (요한I서4:19)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아 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은, 우리가 죽은 후 내세에서 내내 함께 하게 될 이웃이란 것. 이 사랑이 신앙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 나의 유한한 희생은 애초부터 이미, 그리고 항상,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되고 동시에 신앙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만이 하느님 안에 항상 머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사순절 묵상시간에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다시 읽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이미 다 들려주신 얘기들이다. 몇 십 번은 더 읽었을 이 구절들을 그 동안 색안경을 멋지게 쓰고 읽었나 보다. 투명한 영성이 드려다 보이는 맑은 안경으로 바꿔 쓰고,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아야지.
지금껏 오직 ‘살아가는 용기’ 만을 생각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죽음과 대면하는 용기’ 다시 말해서 ‘수동적인 죽음이 아닌 능동적인 죽음’을 생각해 봐야겠다.
하느님께선 내가 ‘영혼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겪을 일들을 준비하도록 배려해서 이런 책을 받게 하신 모양이다.
사도 야고보의 신비가 파스카의 신비로 이어지는 듯 비에 젖은 산티아고의 대성당 무지개문 앞에서, 우리 순례자들을 반기던 야고보 성인을 다시 한 번 그려본다.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지혜만을 구하게 가르치소서!’ 마음을 새롭게 다짐하는 기도를 올리며, 목적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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