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상, 오며 가며 프랑스 파리에
들렀으나, 스페인에서 제일 먼저 발을 내디딘 곳은 바르셀로나이다.
(이 도시는 원래 주전 1세기엔 바르키노 마을이었고, 4세기에 들어와 바르셀로나라 부르면서 인구가 2백만을 넘는 스페인 제2의 대도시가 되었다. 이 Gotico지구엔 대성당 및 의사당, 시청, 왕의 광장, 로마 시대의 성벽, 피카소의 미술관등이 예술의 거리임을 보여준다.)
바르셀로나에 들어서자, 어머니인 대지에서 솟아나와 아버지인 하늘을 향해 가슴 떨리는 기도를 올리는 듯한 교회 모습이 먼저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하는 바르셀로나 성가족교회당’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가까운 몽 세라 수도원에 갔을 때, 기도하는 두 손을 닮은 산봉오리를 보고 놀랐는데, 그곳에서 자주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는 가우디가 몽 세라에 은둔하며 성 가족 교회당을 구상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사백 년을 두고 짓는다는 이 교회로 인해 세상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이 교회 설계와 건축을 맡았던 안토니오 가우디 코르네는, 세공업으로 대를 잇는 아버지의 성 Gaudi와 어머니의 성 Cornet를 이어받아1852년 레우스에 태어나 아르누보 건축의 거장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 관절염을 오래 앓았던 그는 학창시절에 학문에 몰두하기 보다는 치료를 위해 걷기운동을 하면서 동물, 식물, 자연의 모습들을 늘 가까이 관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레우스에 있는 Escola Pia에서 공부할 때 기하학과 시와 그리이스어에 뛰어났다. 그의 종교적인 성품과 ‘성 가족교회당’같은 작품은 이곳에 있는 학자 신부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희생의 역사와 성모 마리아의 세계를 배운 데서 비롯한 것이란다.
가우디는 1873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사하여 주립 건축대학에서 공부할 때, 스케치와 기획에서 그의 광적인 천재성을 보여준다. 그 후로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그의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부수적으로 따라다닌다. 그는 중세기의 고딕양식의 예술에 영감을 받아 자연 속에서 구조의 형태를 발견한다. 또한 몽세라, 토우로우세, 피레네 산맥 등지를 찾아가 선배 건축가들과 함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연구하고 조각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하여 ‘성가족교회당’ 내부에 에코를 전달하는 둥근 천장을 올렸고, 교회당 외벽엔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는 듯 수금과 비파와 나팔 같은 악기로 찬양하는 모습들을 실물처럼 빚어 놓았다.
영국 미술비평가인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교회장식은 건축의 기원”이란 신념으로 교회당 안팎의 장식과 조각작품에 마음을 쏟았다.
성스러운 가족인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에게 바친 이 성당에서, 1883년부터 설계 및 건축의 정식 감독을 맡아 43년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 하다가 74세에 어느 날 새벽길에 전차에 치어 운명하고 만다. 그의 유해는 교황청의 배려로 그가 짓다 만 지하경당에 편안히 모셨고.
그는 짧은 인생의 덧없음을 미리 알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남길 작품이 아니라 몇 세대 후손들과 제자들이 이어갈 ‘영원한 도성’같은 성전건축으로 기획했기에 그가 가고 없는 지금도 그 교회는 가우디의 이름으로 앞으로 백 년 이상 건축작업이 계속 되리라 한다.
성가족 교회당은 그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아주 많은 성서적 상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듯 동편을 향해 서 있는 ‘그리스도 탄생의 정면’엔,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과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생명과 기쁨을 상징하는 이곳에 성 가족의 생애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인이 걸어 들어가야 할 세 개의 문-‘믿음의문’, ‘희망의문’, ‘사랑의문’ 이 활짝 열려 있고, 서편 정면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무런 장식도 없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 앞에 앙상한 가시나무가 예수님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십자가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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