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글
헨리 코레이 지음, 유니스 윤경남 옮김
---최근에 차동엽 신부와의 대담집에 “모든 것이 은혜였을 뿐이다”라고 자신의 인생관을 적었던. 가톨릭교회의 거성 정의채 몬시뇰님이 올해 정초에 선종하셨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그를 생명의 시냇가에 인도해 주셨으리라 믿으며, 새삼 몬시뇰님에게 빚진 마음으로 기도하며,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서문”을 정리해본다.--
성자 어거스틴 연구가이며 이 책의 가톨릭 용어를 일일이 가르쳐 주셨던 정의채 신부님을 흰 눈이 덮인 가톨릭대학교로 찾아가 뵈었을 때, 향기로운 커피를 손수 끓여 주시던 일이 얼마 전의 일 같기만 하다.
지금 새삼스레 떠 오르는 일은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밀라노를 찾아갔던 일과, 우연찮게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여러 번 여행하게 되었던 나는 오랜만에 부드럽고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밀라노 대성당The Duomo가 시간대로 변하며 빛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성자 어거스틴 성당을 찾게 되었다.
어두운 성당안의 빈 의자에 잠시 앉아 기도하는 동안, 미국의 헨리 코레이 목사가 쓴 전기소설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을 번역하던 때의 뜨거운 감동이 되살아났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긴 했으나 도저히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복잡다단한 열정의 화신인 타가스테 사람, 북아프리카의 성자 어거스틴의 일생을 부드럽고 알기 쉽게 묘사한 코레이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는 동안, 너무나 극적인 여러 장면에 감동되어 내 원고지는 ‘눈물의 원고’가 될뻔했다.
신학자 어거스틴 보다 어머니 모니카의 입장에서, 그리고 어거스틴을 사랑하는 여인 멜라니의 처지에서 더욱 그러했다. 모니카가 겪는 가정생활의 습관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남편과의 갈등을 아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승화된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더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관료적이고 정열적인 아버지를 닮았으나 늦게야 어머니의 영적인 성품을 찾은 어거스틴. 그의 깊은 마음 속에서 진리로만 알고 헤매며 쌓아 올린 지성의 탑이 참된 진리를 만나며 무너져 내리기까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얼마나 피땀 어린 눈물을 흘렸을까.
특히 이곳 밀라노에 왔을때 모니카는 아들 때문에 암부로시우스 감독과 여러 차례의 상담을 하곤 했다. 당시 밀라노 교구 감독인 암부로시우스는 쟁쟁한 수사학 교수로서 비판적인 태도로 이따금 교회에 참석하는 어거스틴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모니카를 위로해 주었다.
“당분간 그를 혼자 놔두십시오. 스스로 잘못된 믿음을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이 함께 하실 겁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함께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 하기 위해 드린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를 하느님은 마침내 들어주셨다.
12년을 함께 살아 왔으나 결혼도 못하고 헤어진 멜라니와의 사랑의 종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죽음, 그리고 그와 함께 마니교의 길을 걷고 있는 줄로 믿었던 절친한 친구 스펜디우스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자기 어머니가 원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충격적인 일들이 그에게 한번에 몰아닥쳐왔다.
드디어 마음 속에 줄곧 타올랐다가는 스러져 버리는 진리에의 방황도 밀라노의 한 작은 집 뒤뜰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흐느끼는 어거스틴의 오열과 함께 폴발해 버렸다. 그때 담너머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천사의 음성처럼 그에게 이상한 영감을 주며 마음의 눈을 뜨게 했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하는 듯한 소리에 따라 그는 친구와 함께 앉아 있던 의자로 뛰어가 좀 전에 꺼내 온 성경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로마서13:13~14)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찾은 그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완숙 시키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어거스틴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와 온갖 감회가 어두운 제단으로부터 내가 앉아 있는 이 맨끄트머리 의자에까지 출렁이며 넘쳐 흐르는 듯했다.
어거스틴이 그의 깊은 상념에서 마음 속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참한 허무와 고통에 울부짖었고 드디어 그의 양심의 소리, 즉 하느님의 음성을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
그후 그는 알프스산의 카시키아쿰 농장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보내다가 387년 3월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으려 밀라노로 다시 돌아와 암부로시우스 교회에 나갔다.
그 당시 로마교회는 혼란기에 있었고, 교회의식 가운데 찬미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때였는데 암부로시우스 감독은 자신이 손수 신앙시를 지어 교회 안에서 부르게 했다. 젊은 시절에 자작시를 낭송한 적이 있고 음악에 조예가 있던 어거스틴이 교인들이 찬미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하여 지은 시가 있다.
당신의 앞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 나올 때,
그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 노래는 경건한 시냇물이 되어
내 좁은 마음에 흘렀습니다.
나는 한 아름의 위로를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요.
얼마나 울었는지요.
암부로시우스가 그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는 시편 42편을 읽었다. 암부로시우스는 그 ‘목마른 사슴’의 얼굴 위에 입김을 불고, 그의 이마와 입술에 십자가를 긋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나도 학생시절에 찬양대에서 부르던 ‘목마른 사슴의 노래’(시편42편)를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다.
오-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함 같이
당신 사모하나이다, 주여…
나도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처럼, 그 때의 어거스틴처럼 목이 마르고 메어온다. 그러자 나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그 무엇이 이 성당안에 함께 있음을 느꼈다. 그 순간 사랑하는 님을 만난 듯한 안도와 평온함이 갈증으로 갈라진 내 심장에 단비처럼 적셔주며 치유해 주는 듯했다.
어거스틴은 천사와 같은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나는 어거스틴이 부르는 찬미소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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