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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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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신 날 밤

 
114.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 오신날 밤


   

 


지난 해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 부부는 성탄예배를 마치고 가까운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나누었다. 창 밖엔 이곳에 이십여 년 만에 처음이라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성탄절은 연극하랴, 새벽송을 다니랴, 꿈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나라 같았다. 성탄 전날 밤이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가 추운 먼 나라에서 썰매를 타고 빨간 모자, 빨간 장화에 하얀수염을 날리며, 지붕을 타고 굴뚝으로 내려와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그 교육적인 동화에 몇 해를 잠겨 살았다.
신기하게도 성탄 전날 밤에 내가 원하는 선물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잠이 들면 그것이 책이든, 양말이든 그대로 머리맡에 놓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그 선물들이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가 갖다 주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 세대는 좀 달랐다.

 

어느 성탄 전야에 우리 부부가 늦게야 집에 돌아와 허둥지둥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포장하는데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가 남편에게, “조용히 해요!” 했더니 그이는 “곤히 자는 아이들이 깰 리가 없어. 머리맡에 잘 놓고 나가야지”하면서 여전히 버스럭거렸다.
다음날 아침에, 얼굴이 환해진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도 흐뭇했다. “산타 할아버지는 너희들같이 착한 어린이들만 찾아 오신단다. 좋은 선물 받았니?” 했더니, 삼남매가 이구동성으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아들 동하가 덧붙여 하는 말이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 목소리가 아빠 목소리와 똑 같았어요” 해서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산타할아버지의 정체가 탄로 났지만, 아이들은 해마다 자기 아빠 목소리와 똑같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려주었다. 

 

산타 클로스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네넬란드인들이 미국 맨해텬에 정착하던 1624년 크리스마스 날이라고 한다. 그들은 네델란드 수호성인, Sinterklaas의 이름으로 하얀말을 타고 붉은 옷, 붉은 모자와 신발에 흰수염을 날리면서 착한 어린이들의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그후 1700년경부터는 Santa Claus로 불리면서 성탄 전날 밤에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St. Nicholas가 성탄 전날 밤 불우하나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일화도 전해져 왔으며, 산타 할아버지의 복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1800년경에 Clement Moore 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네” 라는 그의 시에 등장시킨 산타클로스의 모습 이후부터라고 한다.  

 

산타 할아버지의 복장은 액세서리와 함께 널리 상품화되어 선전이 굉장하다. 심지어는 산타 할머니까지 등장한다. 상품화 되긴 했지만, 여전히 좋은 일을 하는 이 부부 산타는 지난해에 온타리오의 한 초등학교에 크리스마스 방학 전날 나타나 어린이들이 기쁨으로 놀라게 만들었다. 비록 이 산타부부가 먼 북극에서 썰매가 아닌 밴을 타고 달려왔지만, May Roberts 학교 어린이들 앞에 풀어 놓은 산타 부부의 보따리에선 과일, 팝콘, 사탕 등이 어린이들에게 놀라운 성탄선물이 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이 산타부부가 나타나 그들의 작은 책가방 속에 맛 있는 과일과 사탕, 그리고 재미있는 세계 어린이동화책과 크레용 등을 가득 담아 준다면 얼마나 따뜻한 성탄 전날 밤의 선물이 될까 생각하면서, 뽀드득, 빠드득 흰눈 소리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115) 이소벨 부부 이야기Isobel and John's story
  
 


 
 오웬 사운드에 있을 때, 토론토에 나들이 삼아 간 길에 우리가 살던 로열요크 근처의 한국 식당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떡만두를 먹었다. 이소벨과 죤 그로사드 부부를 이 식당에 초대하여 그들에겐 생전 처음인 한정식을 대접하던 생각이 난다.
   

재작년 이맘 때쯤, 토론토스타 신문에 백세인 죤 그로사드의 부고가 난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베네딕트 로드의 그 좋은 집을 두고 연말에 갑자기 노인 홈으로 옮겼다고 새 주소를 알려주더니, 얼마 안 되어 병으로 눕고 다시 못 일어났다.
우리가 그 전해에 토론토를 떠날 때만 해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열광적인 골프맨답게 그 장신을 휘청이며 골프장에 나가곤 했다. 
스코틀랜드 이민1세인 죤은 램톤 골프클럽, 카운추리 클럽, 웨스톤 골프클럽 회원으로 우리를 그의 클럽식당에 가끔 점심 초대를 했다. 그가 더 열광적으로 좋아한 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한 빙상게임인 컬링이다. 
그의 집 지하실은 공구로 발 디딜 틈이 없는데, 엔지니어 출신답게 컬링에 쓰는 돌을 제작하고 고치고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사업이며 취미라고 자랑하곤 했다.
 

죤은 이태 전에 부인 이소벨을 하늘나라에 먼저 보냈다. 이소벨은 성탄 축하음악회가 끝난 후, 내가 지나는 말로, 금빛 별이 반짝이는 성탄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95세의 할머니와 98세의 할아버지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름다운 모델이 되었는데, 그 다음 주일 예배에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그 다음날 이 세상을 떠났다.
이소벨과 나 사이에 얼킨 이야기는 우리 교회 사람들도 웬만큼 알고 있다. 우리가 토론토에 정착하고 St. Giles Kingsway 장로교회에 나가면서 제일 먼저 인사한 사람은 빌 램 목사님 부부였다. 
램 목사님은 20여 년 전에 국제생명의전화 총무로 한국생명의전화 국제회의에 두 번이나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당시 생명의전화 봉사자였던 나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 우리가 참석하는 홈 그룹 회원들에게 보여주어 모두 재미있어 했다.
남편 민 장로는 교회가 권하는 대로 찬양대석에 올라가고, 나 혼자 예배석에 앉아 예배 드려야 하므로, 든든한 램목사님 부부 뒤에 앉은 것이 바로 이소벨의 옆자리였다. 

 

그때부터 이소벨과 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예배당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에만 앉으려고 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필 이소벨의 고정석에 낯선 한국인이 비비적거리며 끼어 앉았으니, 까다로운 이소벨의 고통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나도 그 자리에 앉을 이유와 권리?!가 있기에 시치미 떼고 웃으면서 앉았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하고.
웬만하면 누가 옆자리에 와서 앉으면 비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소벨은 오히려 엉덩이를 들석하며 움쩍도 않는다. 이소벨 옆자리에 앉은 그의 남편 죤이 자기 옆자리를 넓혀 주는 데도 막무가내였다.

 

이유가 무얼까? 민 장로는, 자기가 보기엔 이소벨이 목사님 설교하는 눈과 마주 치는 곳에 앉고 싶은 믿음 때문인가 보다고 했다. 
나한테 반 뼘의 자리도 더 양보하긴 틀린 것 같아 나는 ‘친절작전’을 펴기로 했다.        이소벨은 아무튼 연로하니까 도와주면 좋아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다. 바닥에 놓인 그녀의 지팡이를 집어준다거나 가방을 집어주는 일은 물론 아니었다. 그건 이미 단번에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찬송가와 성경 구절 찾는 일을 도와주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예배 시간에, 사회자가 이번엔 몇 장 찬송을 하겠다고 말하지도 않거니와, 주보만 보고 얼른 일어나 불러야 하는 영어 찬송가는 너무 생소해서, 나는 늘 스티커를 들고 다녔다. 예배시간 전에 주보에 적힌 찬송과 성경 구절마다 색색의 종이 스티커를 꽂아놓으면 금세 따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곁눈질로 보니까 이소벨도 7-8개 가 넘는 찬송가 찾는 일에 쩔쩔매고 있었다. 내가 그 스티커를 나누어 주며 방법을 알려주고, 찾아주기도 하자 그제서야 고맙다는 말과 함께 예쁜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참 간단한 방법이었다.
 
노인은 노인이구나 싶게 점점 나에게 그리고 찬양대 하는 민 장로에게도 친절해졌다. 따라서 내 자리도 조금씩 넓어졌고…
 

하루는 주일 예배 후 집에 돌아오자, 우리 아파트 앞에 이소벨 내외가 서 있었다. 놀라서 웬일인가 물으니,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렛꽃을(언젠가 보라빛 옷만 입는 이소벨에게 나도 그 빛갈을 좋아한다고 말한듯) 주고 싶어 주소도 모르고 무작정 아파트 앞에 왔는데, 다행히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우리 교회 교인 수잔을 만나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우리집에 들어와 한국이야기를 떠들어 댄 값으로 그 다음 주일에 바로 이 한식당에서 한식을 대접했는데, 두 분이 모두 우리보다 두 배나 식성이 좋아 장수하는 한 비결인가 했다.
 
이소벨과의 자리 싸움에서 시작한 우정이 존과의 이별로 끝난 듯한 슬픔에 눈물이 났지만, 샌 자일즈교회 교인들은, 죤 부부와 가깝게 지낸 우리가 오웬사운드에서 꼭 참석하러 오리라 기대하며 우리에게 그의 장례일과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샌 자일즈 교회에 다시 돌아올것을 믿고 기다린다고 언제나처럼 덧붙여 말하면서.  

멀쩡하던 토론토의 날씨를 믿고 오웬사운드로 늦게 떠난 벌로, 셸번에서 마크데일 벌판에 때 아닌 눈보라와 광풍이 불어 두 번이나 골목에 들어서 있다가 간신히 오웬 사운드 집에 돌아왔다. 갑자기 이소벨과 죤이 위로해 주는 듯 밝게 웃는 얼굴이 떠 올랐다.
 
폭설이 나리는 오웬 사운드라도 우리가 부른다면, ‘아름다운 눈을 보러 가야지. 우린 옛날에 눈이 쏟아지는 밤에도 스노 모빌을 탔거든!’ 하면서 왔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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