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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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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Who Knows This McKenzie?”

    

Remembering a Forgotten Pioneer 

 

 

  Once there was a sad theme song, Who Knows This Woman?  written for a famous Korean radio drama series by Han Woon-Sa in 1960. It reminded me of a time when my husband Samuel Min and I visited the birth place of Rev. William John McKenzie in Cape Breton, Nova Scotia. We inquired at the Pine Hill divinity College (Atlantic School of Theology), asking, “Who knows this McKenzie? He ministered in Korea in 1895!” 

We were fortunate to meet McKenzie’s cousin’s grandson, Ivan McKenzie and his cousin’s granddaughter, Beverly McKenzie who both live in the area. The grandchildren invited us to McKenzie’s beautiful log house on the shore of Bras d’Or Lake. We were introduced to Mr. Sauer, whom Beverly joyfully described as, “my grandfather’s cousin!” She showed us the book her mother gave her as a marriage gift,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J. McKenzie of Korea  by Elizabeth McCully, published in 1903.  

I could smell the piny fragrance from the Pine Hill Divinity College where McKenzie studied, the pine hill of his birthplace in Bras d’Or Lake,  and from the Sorae Church in the pine hill village of Whanghae-Do, Korea, where he offered  himself as “a corn of wheat” (a reference to John 12:24).

 McKenzie listened, and God’s voice led him to become the first Canadian Presbyterian missionary to Chosun(Korea), and unknown strange world where he followed God’s will for his life. 

He wore Korean clothes, and ate and lived in a small house with Korean villagers. At Christmas, he was sent a box of homemade sweet bread, but he gave it to the poor children. Next spring in 1895, the villagers decided to build Sorae Church while McKenzie started a day school, named McKenzie school. McKenzie directed a church in Korea to be built at his expense.

Around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in Sorae, there was the First Sino-    Japanese War and the Donghak Rebellion. McKenzie was in grave danger even though there were many believers. 

He fell ill and ended his days as a Christ-like ambassador at age 34. At his graveside lay a Bible and St. George’s flag. A little boy, Sue Byoung-Ho, was present at the funeral and he later became one of the leaders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elder of Saemoon-Ahn Church. 

    It is a shame that there is no marking of McKenzie’s birthplace in Cape Breton and his name is not marked on a memorial plaque in the Pine Hill chapel.

My husband Samuel Min was a Presbyterian elder in Seoul. He has a dream to someday mark “the McKenzie Hill” by planting 34 pine trees there in McKenzie’s hometown of West Bay, in collaboration with the Korean churches in Canada. It would be a much-needed commemoration of McKenzie’s remarkable short life; “a corn of wheat” given to others as a pioneer missionary to Korea.

   

Yunice K. Min was born in Seoul, Korea, and is a member at St. Giles Kingsway Presbyterian Church, Toronto.

March 2016. Presbyterian Record

  

    

 

 

 

 

 

 

   한 운사가 지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60년대의 애절한 사랑의 연속방송극 주제가였다. 우리 부부가 지난달에 노바 스코샤 여행을 하면서, 120년 전에 조선 땅, 황해도 소래 마을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젊은 나이에 소천한 윌리엄 존 맥켄지 목사의 생가를 찾느라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누가 이 맥켄지를 모르시나요?’묻고 돌아다닐 때 이 노래가 생각났다.

 

  토론토의 유영식 교수님이Elizabeth Mc Cully가 쓴 <한 알의 밀알>을 우리말로 옮기고, 주인공인 맥켄지를 그리며 여러번 다녀오신 그 길이건만 그의 생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캔소 해협을 건너 케이프 브레톤 섬에서 마블 마운틴으로 가는 시골길에  Mackenzie Point Rd. 팻말이 번쩍 눈에 띄었다. 그 근방을 서성이다가 드디어 매킨지 선교사의 종손 남매를 차례로 만났다.

 

   맥켄지의 생가 터, 언덕에서 아이반과 유니스(Bras d'Or Lake with Ivan Mackenzie)/민석홍장로와 브래도 강 가에서(Bras d'Or Lake)

 

   오솔길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보트 정비공장을 하는 사우어씨를 통해 맥켄지의 종손자 아이반 맥켄지를 만나게 해주었고, 클리브랜드 우체국에 들어가 ‘누가 이 맥켄지를 모르시나요?’ 물었을 때, 텅 빈 시골 우체국 안에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반기며, 자기가 맥켄지의 종손녀란다. 즉 우리가 만나려는 아이반의 친누나였다. 이런 우연과 행운이 또 있을까?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비벌리는 여러 해 전에 은퇴했으나 그날따라 우체국 사정으로 임시로 나와 있었다는 것.

 

     우리는27년 전에 고향에 돌아 온 아이반의 이층 통나무 집에서 환담을 나누고, 맥킨지 선교사의 생가터 안내를 받았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우체국에 다시 들렸더니, 비벌리는 Elizabeth Mc Cully가 쓴 맥켄지의 전기 <A Corn of Wheat>를 찾아 들고나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생전에 보물처럼 탐독하며 아끼다가 자기 결혼선물로 주셨다는 것. 책 장을 넘기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나들나들해졌다. 

 

   윌리엄 죤 맥켄지(1861-1895)는 끈질기게도 청청한 소나무 같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푸른 솔잎 향기가 그가 태어난   브라도 호숫가의 솔밭 언덕에서, 그가 공부한 핼리팩스의 Pine Hill신학교에서,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고귀한 생을 마친 조선 황해도 소래마을(솔밭 마을)에서 풍겨오는 듯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우리에게로 와 주시오’ 애원하는 환상을 따라 아시아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듯이, 맥켄지는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미지의 땅 조선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따라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오직 예수를 따라 가진 것없이 살다가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람이다. 

   

   그는 조선사람 옷을 입고 초가집에서 살며, 언더우드 박사 부인이 성탄선물로 보내준 서양음식 등을 손도 안대고 마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영양실조와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소래마을에서 2년도 안되어 고귀한 삶을 마친 분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고통 가운데서도 서울에 있는 에비슨 박사에게 왕진을 요청하는 편지와, 어머니와 친지들에게, 그리고 기포드 목사에게 그동안의 보고와 지원을 요청한 처절한 편지가 유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다닌 파인힐 신학교 채플에 붙여놓은 한국선교 파송 백주년기념 동판은 1998년에 만든 것인데 맥켄지의 이름이 없다. 캐나다 장로교가 재정지원이 어려워 조선선교사 파송을 못하자, 그는 독립선교사로 자원해 떠났기 때문에 정식선교사에 들지못한 것이다.

 

    잊혀진 맥켄지 선교사의 고향을 다시 방문할 계획에 우리는 마음이 부산하다. 척박한 조선땅에 믿음의 씨앗을 심어준 그분을 기리는 동판과 소래마을을 연상시키고 그의 생애를 기리는 소나무 34 그루를 심어, 우리 후손들이 이곳에 찾아왔을 때 ‘누가 이 맥켄지를 모르시나요?’묻는 사람이 없어야 하므로, 길목에 안내표시판이라도 세워야겠다. 

복음의 빚을 진 한국의 크리스챤들과 캐나다의 한국교회가 보답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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