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벌써 저무는지, 달리는 창밖에 낙엽들이 참새처럼 날아간다. 제임스 조이스의 마지막 걸작인 <피네간의 경야> 첫머리의 “강은 달리나니, 이브와 아담교회를 지나 해안의 변방으로부터 만의 굴곡까지…우리들을 되돌리는도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브와 아담교회가 아닌 아담 강과 이브의 강물이 되돌아 흐르는 곳, 핑크색 연어가 환고향하는 캐나다 BC주 내륙에 있는 슈슈와프 호수의 시카무스에서 가까운 아담 강가를 찾아갔다.
산호같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Sockeye(붉은 연어) 한 쌍이 방금 산란한 듯, 분홍빛 진주 같은 알들을 옆에 끼고 쉬는 곳, 강한 모성을 발휘하여3미터 넘는 폭포를 뛰어넘어온 곳. 이곳에서 올해 10월3일부터 10월26일 감사절 주일까지 연어 환고향의 절정을 보게 된단다.
연어들의 모험과 사랑이 넘치는 그러면서 슬픈 신화 같은 그들의 회귀본능에 대해서 캐네디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이 지구상에서 연어가 제일 많이 살고 있는 나라가 캐나다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국이 제일 많고, 일본과 러시아에 이어서 캐나다는 네 번째였다.
연어 중에 제일 큰 종류는 치누크 연어인데 1미터가 넘는다.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보는 연어는 Coho다.
강기영 작가의 중편 소설, <샐몬이 걸렸다Fish on!>의 온갖 풍경이 떠오른다. 헤밍웨이가 쓴 <바다와 노인>의 사흘 동안 이야기 보다 더 치열했던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긴 낚싯대를 휘젓듯 활기차게 펼쳐진다.
“유년시절부터 나는 엉뚱하고 다양한 낚시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개미귀신 낚시, 개구리 낚시, 도마뱀 낚시, 가재 낚시, 잠자리 낚시, 매미 낚시, 그리고 사춘기의 걸치 낚시……” 이것이 발전하여 “나는 잠시 방황하다 다시 돌아온 모범생처럼 샐몬 낚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캐나다 낚시 풍토에, “내 낚시 내가 하는 데도 법이란 게 있다니” 분개하면서도, “낚시꾼답지 않게 법을 어겨 가며 샐몬을 잡으러 다녔다는 게 왠지 남의 집 개나 끌어다 잡아 먹으러 다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더구나 이번엔 헤비급 강자”를 만나, “달려 오는 맹수 앞에 장난감 총을 들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밧줄에 뭐가 걸린 것이다. 밧줄을 잡는 순간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직감으로도 배를 뒤집을 만한 힘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월척이 넘는 미끼를 먹었다면 상어나 돌고래는 아닐까? 줄을 당기면 불쑥 악어나 괴물이 올라오는 건 아닐까? 죽음의 한 끝을 잡고 있는 공포가 밀려 왔다. 내가 오히려 낚시에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상대에게 박수를 보내며 판정패를 당하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조였던 릴의 텐션을 천천히 풀었다. 역시 선수답게 그걸 알아 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샐몬이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샐몬이 무사히 하천으로 올라가 산란을 마친 뒤 생을 마감하기를 바랐다.…”
잿빛 어둠이 깔린 낚시터에 KGB출신일지도 모르는 알릭세이 노인마저 등장시켜서 작가 자신의 삶을 드리운 낚싯줄이 더 팽팽하게 해준 작품이다.
차가운 급물살 위에서 태어난 새끼 연어들은 50일에서 100일이 지나면 그들이 태어날 때 껍질만 남기고 죽은 어미를 떠나 넓은 바다로 나간다. 자식을 낳은 어머니들은 모두 껍질들임에 틀림이 없다. 옛날에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가끔 맛 있는 과자를 사 오셨다. 한 봉지는 오롱조롱 우리 7남매 몫이고, 또 한 봉지는 우리들의 껍질인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 과자, 너희들의 껍질 갖다 드려라… 하셨으니까.
높은 댐에 가로막히거나 강육약식의 원칙대로 큰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악운을 피해 살아남은 연어들은 바다로 나간다. 탐욕스런 인간의 먹이사슬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년기의 인생처럼, 그들도 호시탐탐 마수를 들이미는 바다의 큰 물고기 떼들을 용케 피해야만 살아남아서 자기가 태어난 강가에 다시 찾아갈 수가 있다. 마지막 시험대인 폭포나 3미터가 넘는 댐 위로 사력을 다해 뛰어넘을 때 곰의 마수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가 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있는 Tulalip인디안 공회당의 샐몬 회귀축제에서 울려오는 모세의 북소리를 들으며, 한 쌍의 연어는 냇물 속 바윗돌 틈새에 둥지를 틀고 산란하는 몸부림 끝에 생을 마감하리라. 자기가 태어난 본향을 용케 찾아가는 신기한 회귀본능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고난을 겪고도 종래 찾아갈 곳이 하늘나라임을 알고 있는 듯한 경이로움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하우스 보트의 휴양도시인 시카무스에 간 것은 수퍼8 모텔을 운영하는 외사촌 동생 혜서와 그의 남편 민동문 사장을 보고 싶어 방문한 것이다. 십여 년 전에 서울에 살 때 세 명의 민씨 며느리들이 만나면 늘 할 이야기가 많았다. 내 친동생 남편 민병국, 혜서 남편 민동문, 내 남편 민석홍 등 세 민씨들 만의 고고하고 야릇한 일화들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슈슈와프 호숫가에서 두 쌍이 점잖게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긴 이야기가 필요 없게 되자, 혜서 내외는 사카이 연어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 할 수 있는 폭포에 가 보자고 했으나 사양했다.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찬 물살과 소용돌이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높은 폭포를 뛰어 넘는 그 치열한 모습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그 대신, 강변의 통나무집 식당 테라스에서 맛있는 스파게티와 티를 마셨다. 슈슈와프 호수 위에 하우스 보우트가 드나드는 철교 위로 기차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간다. 밴쿠버 첫날에 만난 CPR이었다. 한갓진 이곳 아담의 강가까지 우리를 보러 온 듯, <현대>간판이 붙어 있는 긴 컨테이너 열차 마저 끌고 와서 더 반가웠다.
이제 밴프를 거쳐 재스퍼 국립공원을 향해 차를 달린다. 역시 록키산은 쉴 새 없이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흰구름이 봉오리마다 엉겨 붙는 듯하다가 하얀 빙하가 나타나서 걸음을 멈추게 하고, 석양 속에 풍덩 잠겨보고 싶은 비취빛 나는 루이스 호수를 지나자, 록키산 꼭대기에 시지푸스의 바위같이 둥글고 큰 바위가 올라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시지푸스가 저승에서 벌로 큰 바윗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힘겹게 굴려야 했는데,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는 호메로스의 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바윗돌인가, 아니면 죽어라 하고 반복하는 그 행위를 인간승리이며 부조리라 단정한 까뮈의 바윗돌인가, 알쏭달쏭하다. 아무튼 지금 우리 머리 위에서 금방이라도 굴러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저 바위는, 조각가의 손으로 만들어 록키산에 선물한 예술작품이리라. 눈 덮인 산정에서 흰 빗살무늬를 남기며 굴러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강 가에 널려 있다. 연어 같은 회귀본능은 희박해 보여도, 더 영구적인 가치가 있어 보이는 아담한 바위조각들이.
우리는 다시 에드먼튼으로 돌아와, 남편의 대학친구인 강형곤씨-자랑스런 바이얼리니스트, 주디 강의 부모 댁에 이틀을 머물며 진진한 대접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50년 만에 그 댁을 방문하기로는 우리가 세 번째 친구이기 때문이다. 밴쿠버에서 만난 엄승룡 박사 부부와 수필가 김춘희 님을 만난 일 등, 캐나다가 아닌 먼 이역 땅 같은 밴쿠버 여행에 귀한 친구들을 만난 것은 큰 기쁨 이었다. 이제는 연어 말고 사람을 낚으라고 ‘Fish On!’하며 속삭이는 그분의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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