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가 내게 가르쳐 준 것/박엘리야/문협회원

 

새해를 맞아 달리기를 시작했다. 작년까지는 여름에만 달렸던지라 겨울에 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겨울에도 새빨간 얼굴에 입김을 내뱉으며 눈 위를 달리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일단 실내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문화센터에는 100 미터도 채 안 되는 적갈색의 트랙이 있다. 트랙에 도착하니 흰 머리의 노부부가 앞뒤로 나란히 서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나도 다리를 간단하게 풀고 그들 뒤를 따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 한 바퀴를 더해갈수록 심장이 빨라지고 다리가 뜨거워지고 숨이 가파지고 얼굴에 땀이 맺혔다. 겨우내 숨 죽이고 있던 내 몸의 부속 기관 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까지 전해진 피가 오랜 시간 잠자고 있던 부위들을 깨우고 있었다. 짧은 트랙 위를 몇 십 바퀴 째 돌고 있으니 지루할 만도 했지만, 달리는 그 움직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달리면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실내에 있는 트랙에서 달리는 것에 비해 야외에서 달리는 것에는 재밌는 게 많았다. 여름 날 바깥에서 달릴 때는 그 날의 거리에 맞는 목적지를 정해 두고 집에서부터 달려 갔다 오곤 했다. 시원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길가에 심어진 나무와 저물어가는 하늘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나날이 더 멀어져가는 새로운 목적지를 정복하는 데서 오는 뿌듯함도 있었다. 그처럼 밖에서 달리는 건 달리기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 여러가지 재미에 한 눈이 팔려서 였는지 그 많은 뜀박질 동안 달린다는 행위 자체만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지도 어느새 몇 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왜 달리기를 하고 싶은 지는 처음부터 분명하지가 않았다. 건강이나 성취감 같은 것들도 중요했겠지만 그것들이 제일 중요한 이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로 표현해 낼 수 없었지만 그 존재를 분명히 느꼈다. 이름도 없는 바로 그 이유가 나를 계속해서 달리게끔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그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아마도 달린다는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믿었다.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체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거대한 적갈색 쳇바퀴 같은 트랙 위를 달리고 있자니, 달리기라는 행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트렉은 달린다는 행위를 따로 떼어내 현미경으로 보게 했다. 트랙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신비하지도 않고 외려 잔인할만큼 정직했다. 결국 달린다는 건 다리를 번갈아 가며 움직여 발을 하나씩 내딛는 것을 끝 없이 반복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산다는 게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일을 끝 없이 반복하는 것이듯. 부수적인 즐거움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은 트랙을 달리며 나는 내 인생의 알몸을 본다. 다양한 장소와 여러 직장을 지나쳐 왔지만 삶은 결국 달리기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그 날의 하루를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어디에서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있든 간에 결국 중요한 건 달린다는 행위 자체였고, 바깥으로 멀리 달려나간다고 해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을 향해 돌아가는 길. 아무리 많은 밤을 보내도 여행자처럼 느껴지는 이 곳 생활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이 모든 발걸음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황이였을까. 하지만 신정도 구정도 쇠지 않게 된 내게, 과연 집이란 게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도 내가 떠난 그 집은 이제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돌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어디에 있건 지금 내 두 발을 디딘 땅 위에서 하루를 또 달린다면 그 곳을 나의 집이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 자체가, 오늘을 살아가는 바로 그 곳이 나의 집이 되었다.

그것이 달리기가 나에게 가르쳐 준 첫 번째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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