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꾸는 사람/ 최문애숙/문협광장

 

최문애숙/문협회원

 

세상에는 꿈꾸는 사람이 참 많아 살 만한 곳이다.
나는 3살 반 때 일어났던 몇 가지 일을 분명히 기억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하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삶에서 사라지셨기 때문이다. “곧 돌아오실 게다”라며 어머니께서 위로를 주셨지만, 나는 이해가 안 돼서 자꾸 보채다가 결국 울보가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막을 쳤던 폭격기와 사이렌 소리가 아직도 귀에 경보음처럼 쟁쟁하다. 동생을 등에 둘러메고 엄마는 나의 등을 밀치며 깜깜한 동굴 속으로 데려가서 숨겼다. 그래서 우박처럼 쏟아지던 폭탄에 엄마의 잽싼 기지로 우리 식구는 모두 살았다. 밤이 오면 빨간 완장을 두른 옆집 아저씨가 무서운 얼굴로 ‘네 아방 어데 갔네! 빨리 내 노우라야’ 고함을 치며 부릅떴던 그 눈을 기억한다. 한두 해가 지나서 5살이 되었을 때쯤 비로소 아버지가 왜 우리를 남겨두고 급히 남한으로 피신했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밤이었던가! 어마무시한 큰 불꽃놀이가 앞산에서 벌어졌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연합군이 철수하기 직전에 탄약고를 제거하는 작업이었단다. 

 

그리고 며칠 뒤에 꿈에 그리던 아버지가 우리를 구하시러 2년 만에 서울에서 평양까지 달려오시어 훌쩍이는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가친척에게 남한으로 피신해야 산다고 설득하셨다. 그리고 간단히 짐을 꾸려 정든 집과 조상이 묻힌 산천에서 죽겠다며 설득이 안 되셨던 할머니를 남겨놓고 우리는 떠났다. 한 손에 동생을, 다른 한 손에 나를 잡고 우리는 대동강 다리가 폭파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극적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사선은 넘었으나 남한은 참으로 눈비 바람 피할 곳 하나 없는 차디찬 곳이었다. 또한 따뜻한 음식물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암담하고 생소한 그런 곳이었다. 우리가 남가주에 처음 학생으로 왔을 때 느꼈던 그런 막막함이 한동안 우리를 숨 막히게 했었다. 같은 처지의 피난민들이 공터에 천막을 치고 모여 살았다. 주일이 되면 근처에 있던 피난민 교회에 참석하여 소망의 말씀으로 위안을 받곤 했었다. 행여 동향 사람이라도 만나면 피난 오다 잃어버린 식구라도 찾을까 하여 한동안 헛된 희망에 들뜨곤 했었다. 서로 재능과 관습 그리고 사투리가 달라도 같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노래하고, 위로받으며,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해 가는 유용한 시간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사는 북미주에 옮겨 심은 나무처럼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반세기 전에 비해 지금은 한국인의 위상이 좀 높아졌다 해도 동서양의 언어나 문화 및 생활 습관 등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적응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다. 어떤 친구는 아예 이곳의 삶을 포기하고 역이민하는 일도 종종 보았다. 따지고 보면 어떤 인종이든지 인간이란 공통점과 그리고 같은 종교인이라는 믿음 안에 언어소통이라도 원활하면 문화적 차이는 별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함께 어울리다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꼭 알아야 할 예의범절이나 규칙 등 생활 규범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공동체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있어서 우리가 필요한 멘토를 아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때로 그들의 역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를 제공해 주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래지향적 성향을 보여서 현재 시각에 미래의 관점을 도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 멘토는 활기가 넘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꿈 꾸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북미대륙이란 미래에 대한 꿈을 갖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곳 같다. 꿈꾸는 사람들이 이룩한 이곳에 우리는 모두 꿈을 꾸며 산다. 나의 아버지도 나도 항상 미래의 꿈을 꾸며 살았다. 아무리 어려운 때를 만나도 곧 지나가리란 긍정적 확신을 가졌다. 
헬렌 켈러의 말처럼, “앞을 못 보는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미래를 설계하며 꿈을 꾸셨다.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의 말대로, “미래 마인드”로 사셨다. 북한에 사는 식구들을 남한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밤낮으로 꿈꾸고 계획하셨다.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일생에 단 한 번의 기회가 오자마자 바로 용감히 실천에 옮기셨다. 맥아더 장군의 성공 확률 5000:1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북괴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낼 때 군인도 아닌 민간인이셨던 아버지는 통역자로 합류하여 자연스럽게 평양까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꿈이란 그냥 마음에 있다고 하면, 생생한 꿈이란 자신이 스스로 꿈과 하나가 되어 꿈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일을 성취하여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오직 꿈꾸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리인가!

 

 코비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나는 노인들이 쉬어 가는 공간을 십수년간 운영해 왔다.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면 많은 노인들이 참석하여 좋은 혜택을 얻었다. 그때 그곳에는 연세가 80에서 90이 넘는 노인분들이 열심히 참석했다. 아마 지금은 대부분 사망하셨겠지만, 이분들은 여러 자손이 함께 살기를 원해도 홀로 독립하여 사는 것이 꿈이었다. 또한 규칙이 엄한 요양원 생활보다 외롭지만, 꿈꾸어 온대로 혼자서 멋지게 사는 삶을 선호하셨던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이런 노인들에게 재밌는 소일거리를 만들어 주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돕는 일은 큰 보람이었다. 더욱이 이들의 영적 생활을 도우려고 90이 넘은 노구의 L이라는 목사님은 90이 되어오는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복 3시간이 넘는 먼 길을 사명감을 느끼며 오셨다 가셨다. 평생 헌신적인 삶을 꿈꾸어 오셨던 이분의 삶은 인생의 경주가 끝나는 그 날까지 쉼이 없었다. 흰 수염과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호탕한 유머로 멋진 삶을 사시고는 다음 달 눈 오는 날 조용히 영면하셨다. 
 세상에는 이렇게 멋지고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 정말로 살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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