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홍성철

 

홍성철/전 문협회장

 

 

토론토 동물원 옆 루즈 리버 숲길을 자주 걷는다. 기운차게 흐르던 강물이 차분해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다는 소리다. 곱게 물든 단풍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더 적막해지면 찬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떨군다. 그리고 쌓이는 낙엽의 두께만큼 가을이 깊어 간다. 날이 차가워지기에 잎이 지지만, 떨어지는 나뭇잎은 기온의 하강보다 더 깊이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봄과 여름 내내 나무를 성장시키는 동력을 만들던 나뭇잎이 이제 더는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고 말라 간다. 햇볕만 비치면 태양광 발전을 하듯 생동하던 잎사귀가 마치 폐기된 태양전지 패널처럼 야적되었다. 가을이라는 말이 '갓다-끊어내다'라는 어원에서 나온 거라 하니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는 그야말로 가을다운 모습이다.

 

낙엽 지는 계절이 오면 마음 한구석이 막연한 그리움과 쓸쓸함으로 차오른다. 한여름의 화려한 정열이 사라지고 차분한 고독과 소담스러운 아련함,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찾아와 마음을 적신다. 푸릇한 청춘이 지나고 불타오르는 단풍을 거쳐 암갈색으로 내려앉은 한 장의 낙엽이 인생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갈색 낙엽은 떨어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같은 색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되듯이 나의 젊은 시절은 지나가고 조용하게 머무는 삶의 단계에 이르렀다. 청춘과 체력을 아쉬워하지만, 약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마음이 머물 곳을 몰라 불안하기도 했다. 나이 든 내 모습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줄어서 일 것이다. 지난여름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긴 세월 지나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서로 갈색으로 머무는 것을 알기에 지난 시절을 더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빈 가지처럼 쓸쓸하면서도 편안해지는 일인 것 같다.

 

지난 주말에 뒷마당 낙엽을 치웠다. 작은 마당이지만 큰 나무가 두 그루 있어 모은 낙엽이 여러 부대에 담겼다. 구석구석을 갈퀴로 긁다 보니 추워진 날씨임에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낙엽을 쓸면서 예쁜 모양의 잎사귀를 골라 모았다. 아직 짙푸른 색인 것도 있고, 주황색과 빨간색이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재미있는 모양으로 굽은 것도 있었다. 말끔해진 잔디 위에 골라낸 낙엽으로 이리저리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모자이크처럼, 콜라주처럼 형상도 의미도 내 마음대로 갖다 붙이며 크레파스를 처음 잡은 아이처럼 낙엽 그림을 그렸다. 놀이 삼아 그리면서 늦가을의 햇살과 여유를 즐겼다. 내 눈에 비치는 주변의 모습과 계절의 변화가 내게 주는 느낌을 나타내고 싶었다. 작품 아닌 작품에 가을 엽서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자음과 모음을 모아 단어를 찾고 문장으로 쓰는 일이 그림을 그려 형상으로 표현하는 작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로 쓸어 모은 글자로 느낌과 생각을 이어 가면서 글을 써나가는 작업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화폭에 스케치하는 것과 닮아 보였다. "언어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논리를 설명하려고 한 말이지만, 나는 그 말을 그냥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 정도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 사이에는 밀접한 공통점이 있다 그리려는 대상을 미리 정하지만, 그것에 대한 내 느낌, 표현하고 싶은 감정은 그리면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다 그리고 나서야 내 마음속에 담겨 있던 것을 내가 보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소재를 정하고 쓰기 시작하지만 다 쓰고 나서야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심지어 주제가 다른 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쓰기 전에는 흐릿하던 내 느낌이 문장의 마침표를 찍어가면서 차츰 또렷해진다. 글과 그림은 모두 내가 나를 알아가는 작업일 것이다. 나의 주관을 얼마나 보편적으로 펼쳐내느냐는 역량의 문제겠지만, 내 느낌과 생각을 가을 하늘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자세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들여다볼 줄 안다면 내가 짧은 글을 쓰면서 이렇게 서성이지는 않을 것 같다. 
생각이 흩날리는 이 가을에 편지를 쓴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에게 써야 할 것이다. 쓰기 전에는 잡히지 않던 느낌 한 조각을 나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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