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길자(문협회원)
이른 아침 창문을 활짝 열고 싱그러운 5월의 봄 향기를 집안 가득 받아들이면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벽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7 시35분, 이 시각에 누구일까 궁금히 여기며 집어 든 수화기 너머로 처음 듣는 걸쭉한 남자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서예하는 고 선생이시죠? 붓글씨 한 장 써 달라고 전화했습니다”로 시작된 그분의 이야기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계속되었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하고 조금은 무례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여든 살이 넘어서 얻은 귀한 손자에게 며칠을 밤낮으로 연구하여 좋은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서양 며느리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뿐더러 아들마저도 서양 이름만 고집한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큰소리로 손자 이름을 부르며 아기에게 가까이 갈라치면 며느리가 놀라서 애를 안고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단다.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상실감 속에서 어쩌면 영원히 묻히고야 말 손자의 이름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고심 끝에 아이의 생일잔치에 붓글씨를 써서 벽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을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가로 80센티, 세로 40센티 크기의 화선지에 ‘축 김동현의 첫 돌’이라는 문구를 써달라고 했다. 꼭 해야 할 일들이 밀려 있는 데다가 다리수술로 활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나로서는 쉽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떻게 하면 이 노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거절을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순간, “저 세상에 간 집사람이 너무 그립다”며 감정이 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그 노인의 흐느낌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거절 대신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침에 받은 전화가 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른 낯선 땅에서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노인이 겪는 소외감과 고독의 부피가 묵직하게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루고 서예 도구를 챙겼다. 화선지를 마름질하고 먹을 갈았다 오랫동안 멀리했던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써보았다. 손이 떨리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사오 년 동안 평생 겪어도 될 만큼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던 탓에 소중한 나의 친구인 붓을 가까이하지 않은 결과였다. ‘앞으로는 늘 붓과 함께 하리라’ 다짐하면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쓰고 또 쓰고를 반복하였다. 몸은 비록 서양에 있으나 정신은 한국인임을 잊지 않으려는 한 노인의 염원을 담아 흡족하지는 않지만 글씨 크기가 고르고 간격이 적당한 한 점을 완성하였다. 뻣뻣해진 다리와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면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맞춰, “말씀하신 재료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동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저의 선물입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서예품을 경비실에 맡기고 밀린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진 내 어깨 위로 한낮의 눈부신 빛이 바람결에 내려앉고 있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