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은 이렇게 피는 거란다/문협/장정숙

    

할미꽃! 어느 잡지에 실린 한 줄의 글, “우리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의 뼛가루를 우리 집 뒷산에 뿌렸다. 이듬해 봄 그 자리에 할미꽃이 돋아난 걸 보았다…”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할미꽃이 내 가슴에 돌아왔다.   
내 유모, 그분이 바로 할미꽃이었다. 나는 유모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다. 늘 그림자처럼 내 곁에 있어 주었기에 이름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유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언제나 묵주를 돌리며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말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40 나이에 첫 아기를 낳은 유모는 석 달 만에 딸이었던 아기를 잃고 비탄에 잠겼다가 나를 만났다. 탱탱 부른 젖가슴을 내게 물리면서 늦게 찾은 모성애를 나에게 쏟아 부었다. 나의 어머니는 늙은 유모가 싫었다. 젊은 유모를 찾고 있는 사이 유모와 나는 이미 떼어 놓을 수 없는 정으로 묶여 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모르는 나는 세상의 첫발을 그렇게 출발한 셈이었다. 

 

아마도 내가 세 살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유모는 나를 데리고 성당 묘지에 묻힌 딸을 찾아갔다. 거기엔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유모가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주변을 돌다가 할미꽃을 만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이 이상했던지 손가락으로 고개를 받혀 올려주었다. 손가락을 떼었더니 할미꽃은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시 고개를 올려주었으나 손가락을 떼면 고개는 또 떨어졌다. 나는 무서워졌다. 할미꽃의 그런 모습이 내 탓인 것 같아 다시 들어 올린 꽃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할미꽃이란다. 할미꽃은 이렇게 피는 거란다.” 달려온 유모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랬다. 

 

6.25 전쟁 중 나는 피난처에서 결혼했다. 휴전을 맞으면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아직 전쟁의 참화에서 회복되지 못한 서울은 셋방 하나 얻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겨우 상도동 꼭대기에 방 한 칸을 얻었으나 교통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상도동은 한강교를 경계로 남쪽에 있으면서 조금은 외진 곳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서울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려면 한강 다리를 건너야 했다. 전쟁으로 폭파되었던 한강교는 임시로 복구되어 있었으나 이전의 그 우람한 철교는 아니었다. 철판 대신 나무판자로 엮은 다리는 사람만 왕래가 가능했다. 걷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좁은 판자 사이 사이로 시퍼런 물결이 널름거리는 게 나를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유모와 같이 그 다리를 걷게 되었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었고 유모는 큰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는데 60이 넘은 유모는 발을 자주 멈추었다. “왜 그렇게 못 걸어” 짜증이 난 나는 그때 평생 지울 수 없는 말을 해버렸다. 

 

유모는 내가 결혼한 것조차 알지 못했는데 아기 엄마가 돼서 돌아온 나를 고맙다고 또 고맙다며 기뻐했다.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나의 결혼에는 전쟁의 논리나 배경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만 첫 출산 산후조리를 못한 게 유감인 듯 나의 두 번째 산후조리에 힘을 다했다. 유모는 새벽같이 내 집에 왔다.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또박또박 찾아왔다. 유모가 살고 있는 효자동에서 용산까지는 전차를 탔다. 그 다음엔 강을 건너야 했다. 편두통으로 머리에 수건을 졸라매고 살아야 하는 노인이 12월 삭풍이 불어대는 다리를 걸었다. 짧지도 않은 한강 다리인데 얼마나 부들부들 떨며 걸었을까. 그리고 넘어가야 할 명수대 고개. 이어 상도동까지. 친 자식도 아닌 나에게 젖을 물린 인연은 평생 괴로운 죄를 나에게 남겨준 셈이 되었다. 

 

“할미꽃은 이렇게 피는 거란다” 하던 유모, 과연, 유모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당신의 인생을 피웠다. 20대 초반에 있던 내 어머니가 왜 나를 유모에게 맡겨야 헸을까…? 사치, 허영,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런 단어들이 내 머리를 스치면서 한때 나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유아시절부터 나는 유모와의 나들이를 어머니에게 비밀로 하는 것을 배웠다. 두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한 편으로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다른 편으로는 핏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났으나 어려서부터 마음에 새겨진 정서적 갈등과 혼란은 지워지지 않은 것 같다.  
할미꽃은 꽃대가 부드러워 제 머리를 지탱하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나는 부드러운 꽃대가 아닌 기가 센 아이였다. 다분히 오만했던 내 어머니와 유모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나 사이에서 유모의 머리는 가벼워질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한 알 한 알 손가락 끝으로 묵주 알을 돌리면서 신의 경지로 몰입하고 있던 유모의 머리는 할미꽃처럼 자꾸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할미꽃은 이렇게 피는 거란다”라고 했던 유모는 자신이 할미꽃이라는 걸 알기나 했을까. 한강 다리에서 “왜 못 걸어” 하던 나는 지금 지팡이를 끼고 살면서 걷지 못하는 다리에 “왜 못 걸어” 하며 자신을 책한다. 행여 이 땅에서 할미꽃을 만난다 할지라도 나는 감히 그 꽃을 만지지 못할 것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것이다. 나를 달래줄 사람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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