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보다 더 빛나는 꽃/문인협회/고길자

 

 

   더위에 타 들어가던 잔디가 생기를 찾고 초가을 햇살이 살갑던 9월의 어느 날,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퀸스트릿에서 가게를 할 때 가족처럼 지냈던 단골손님 바비가 들뜬 음성으로 우리 집 주소를 물으며, 두 시간 이내에 찾아 오겠다는 것이었다. 2년 전에 가게를 정리하면서 고향집에 며칠 다녀오겠다던 바비를 보지 못하고 이사를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뜻밖의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뻤다. 나는 그때 주간지에서 본 레시피대로 라자니아를 만들어 보려고 재료를 챙기고 있었다. 이것을 본 남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지하실에서 와인 한 병을 올려다 놓고 잔디에 물을 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오븐에서 라자니아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을 때 떠들썩한 남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면서 너무도 내게 익숙한 색 바랜 푸른 점퍼에 헐렁한 갈색바지 차림의 바비가 국화 화분 하나를 들고 씩 웃으며 들어왔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듯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리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지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바비가 병중인 어머니를 뵙기 위해 퀘벡에 있는 고향집을 찾아간 지 사흘 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평생 속만 썩여 드렸다는 죄책감에 몸져 누워 한 달 가까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고향집을 팔고 주변을 정리한 다음 5개월 만에 토론토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편의점엔 낯선 사람이 장사를 하고 있었고, 그를 통하여 우리가 가게를 팔고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섭섭하고 마음이 아파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 없이 알아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가게 주인에게 묻고 또 묻고를 반복하다 번번히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항상 술에 젖어 정신이 없어 보이는 바비를 가게 주인은 무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짜증이 난 가게 주인이 "나는 네가 싫으니 우리 가게에 오지 마라"며 바비를 밀어냈고, 그 후로 바비는 두 번 다시 그 가게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인 세일즈맨이 편의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쫓아가서 그를 붙잡고 사정을 했더니 그 세일즈맨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우리 집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하나를 바비 손에 쥐어 주었단다. 바비는 곧바로 우리 집에 전화를 했고 주소를 물어서 단숨에 달려온 것이었다. 그 세월이 장장 2년이 걸렸다. 바비의 과거를 알고 있는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동안 있었던 우리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전직 소방관 출신인 바비는 화재를 진압하다가 고층 건물에서 떨어져 뇌를 크게 다쳤고 온 전신에 화상을 입어 1년 이상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잇따른 충격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 붉은색이 비슷한 50불짜리 지폐와 2불짜리 지폐를 구별 못했고 때로는 돈을 흘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그를 챙겨주었고, 가끔 맑은 정신으로 가게에 들어오면 남편이 그의 손을 잡고 술을 좀 줄이라고 애원하듯 타일렀다. 그럴 때마다 한동안 술을 자제하는 듯 보였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늘 술과 담배에 찌들어 의식조차 희미한 듯 보였으나 우리는 그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정부 돈을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감사의 마음을 담은 커피 잔을 들고 와서 밀린 외상값과 빌려간 돈을 말끔히 청산했다. 비록 없이 살아도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정이 있고 지켜야 할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그를 보면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과 소외에 적응하며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선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곤 했다.

 

   나의 삶에 그가 비치고, 그의 삶에 내가 비치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들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가 쌓여갔다. 미처 갚지 못한 외상값 11불이 마음에 걸려 2년씩이나 애를 쓰다가 20불짜리 지폐를 접어서 리본을 만들어 국화가지에 매달고 찾아온 바비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의 마음이 담긴 국화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붉은 색이 진한 그 꽃은 보석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 나는 소파에 기대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창 밖의 눈을 바라보다가 오래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나는 애틋함에 젖어 있었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된 바비가 이 세상에서의 무거웠던 짐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천국에서 편히 쉬기를 진심으로 빌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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