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한 마지막 겨울-고길자 (문협회원)

 

팔십 평생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았던 남편에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와 투병을 시작했고 나 역시 무릎이 좋지 않아 간병하는데 힘이 들어 아파트로 이사했다. 늘 주택에만 살다가 아파트 생활이 처음인 우리에게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울어대는 알람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코로나 때문에 두 명 이상 탈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길게는 십여 분 이상을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남편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서 작은 일 하나에도 크게 불편해했다. 그는 긴 겨울 동안 아파트에 갇혀 꼼짝 못 하고 지내야 할 시간들을 걱정하며 답답해했다. 아무리 추워도 햇볕을 쪼이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궁리 끝에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면 무조건 차를 몰고 공원으로 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Ross 공원에 들어서면 곳곳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 제일 마지막 주차장 한 편에 차를 세우고 따끈한 커피나 차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워낙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이라 그런지 넓은 주차장엔 고작 대여섯 대의 차가 띄엄띄엄 서 있을 뿐 아주 한적하였다. 그 중에 수풀 가까이에 늘 옆으로 세워져 있는 대형 검은색 밴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선을 무시하고 옆으로 차를 세우는 까닭이 무엇일까? 가끔씩 차체 밑을 통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의 두 다리를 보면서 의문이 일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우리의 시선은 먼 하늘과 수풀 속의 나무들을 향한 곳에 머물렀다.

 

차가 휘청일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심하게 흔들리는 나무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행여 가지라도 부러질까 걱정하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바람이 자고 햇살이 눈 부신 어느 날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소복소복 피어난 눈꽃을 바라보면서 그 경이로운 모습에 가슴 떨리는 기쁨을 맛보았던 순간도 있었다.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하던 저 숲속에 꽃과 잎이 풍성한 계절에도 볼 수 없는 순백의 찬란한 눈꽃나무들의 향연을 보면서 가늠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 설레는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나는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추위가 조금씩 풀려가면서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부드러워지던 어느 날 병원 치료를 받고 좀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들 앞에 드디어 검은색 밴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약간의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오십 대 후반이나 육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체격이 크고 긴 머리의 그 남자는 원주민을 연상케 하는 넙데데한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정수리 부분에 둥글게 머리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팬데믹으로 이발을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젊은 남자 두 명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치아가 인상적이었다.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맴도는 사이 그 남자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우리는 그 남자가 자리를 뜨자 곧바로 그가 있던 곳으로 차를 옮겼다.

 

아 이럴 수가! 주차장과 수풀 사이에는 옆으로 길게 잔디가 깔린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온갖 새들과 다람쥐들이 먹이를 쪼고 있었다. 빨간 새, 파랑새, 검정 새 자그마한 참새들까지 수십 마리의 새들과 몸집이 큰 검정 다람쥐와 회색 다람쥐, 한국에서 보았던 작고 예쁜 갈색 다람쥐까지 수많은 생명체들이 한데 어울려 먹이를 취하고 있었다. 다람쥐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열심히 자기 몫을 챙기고 있었으며 새들은 먹이를 쪼다가 창공을 날기도 하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따스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샘이나 갈등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검정 밴의 차체 밑으로 보았던 그 남자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겨우내 숲속의 생명체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생 동물에게 음식물을 주지 말라는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저 새들과 다람쥐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땅을 딛고 사는 이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커다란 인연의 그물 속에서 하나하나의 그물코를 이루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남편과 나는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새들, 피어나는 꽃망울들 그리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눈부신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Ross 공원의 봄은 시작되었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생의 소박한 기쁨으로 다가오면서 무겁고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속에도 서서히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날의 추억을 안고 얼마 후 남편은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와 내가 함께한 마지막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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