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을 살아가는 내게는 ‘홀로’라는 그림자가 따른다. ’홀로’, 흔한 말이다. 그런데 그 실체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무거움을 껴안고 오늘도 창가에 앉았다. 하늘로 떠도는 흰 구름이 따뜻해 보인다. 그 구름 아래 내가 앉아 있다는 게 새삼 새롭다. 오래 살았구나, 나도 모를 90이 내 것이라 하는데.
습관처럼 오늘의 일상도 기억을 더듬어간다. 한 단계, 두 단계 숫자를 줄여가며 젊음의 영토로 내려가다가 만난 나의 20대, 그 20대에 나는 전쟁을 만났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내게 던져졌던 한 병사의 말, “외롭지 않으세요”가 지금 내 삶의 주제가 되었다.
9.18을 계기로 서울 시민들은 선택 없는 피난을 가고 있었다.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구겨진 짐짝처럼 기차에 실렸다. 나도 그 어느 날 그렇게 기차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울을 탈출한다는 일념뿐,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막연한 남행길에서 오직 확실한 건 ‘덜컥덜컥’ 무거운 차바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차가 대구역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대구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을 코 앞에 두고 보니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기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도 싫어졌고, 대구에 있는 오빠를 보고 가도 되겠다는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오빠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의과대학생이었다. 6.25가 돌발하면서 수업 중이었던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군의관으로 임관되어 지체 없이 임지로 파견되었고, 오빠는 대구에 있는 제27 육군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은 대구역 바로 앞에 있는 공회당이었다. 전시 중 완행열차는 잠시 들려도 될만한 여유가 있었기에 오빠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거기서 6개월을 머물게 되었다. 병원에 손이 모자라니 도와 달라는 오빠의 권유가 있었고, 나 역시 학교 졸업을 앞둔 막막한 처지어서 일단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업무는 약국에서 처방하는 일을 돕는 일이라 하였다. 동상 환자를 주로 취급하는 그 병동에서 필요한 약품은 간단했다. 그 당시 만병통치약이라고 알려진 ‘페니실린’과 복통에 쓰는 ‘구아노진’, 그리고 ‘다이어진’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막연하게 기억한다. 군의관은 치료에 바쁘고, 간호장교는 영어를 잘 알지 못하여 대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 내가 임시 약사가 된 꼴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어제도 오늘도 단가에 실려 오는 환자는 병원의 마룻바닥까지 차지했다. 전쟁에 말려든 국민의 목숨도 하루를 사는 게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군복을 입었다. 그리고 지체할 수 없는 다급한 처지에 군의관과 한 팀이 되어 치료에 나서는 일도 잦았다. 군대 병원의 계급서열은 그 자체가 엄연한 권력이었다. 나는 간호장교와는 달리 취급되었다. 그들은 장교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잤다. 나는 콩나물 대가리가 동동 떠다니는 소금국을 먹는 식탁에 앉았고 침구로 주어진 담요 석 장으로 추운 잠을 잤다.
국가의 흥망이 엎어졌다 일어섰다 하는 절박한 현실에서 싫고 좋고의 선택은 없었다. 피와 고름으로 썩어가는 젊은 육체를 보는 일상은 그 자체가 혼돈이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북전쟁은 같은 민족이라는 기이한 운명만큼 기약 없는 방향으로 밀려가면서 나도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병실을 돌고 있는 나를 부르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돌아보니 유난히 맑은 눈이 인상적인 병사였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그럼 왜?. ” “외롭지 않으세요?”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외롭다는 말,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연약한 호소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의 명찰을 보았다. 장씨 성을 가진 이등병이었다. 같은 장 씨라는 우연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를 간호장교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 아. 얼마나 그리웠던 나의 정체성 회복이었던가. “저어…” 라는 호칭으로 그는 나를 불러주었다. 군모를 쓰지 않으면서 군복을 입어야 했던 여자는 장교 배지가 달린 모자의 챙을 깊이 내려쓰고 위세를 부리는 무리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병사를 기억했다. 동국대학에 재학 중인 신분과 그의 맑은 눈, 그리고 그의 발가락으로. 그의 얼굴처럼 흰 발가락은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된 채 엄지발가락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 병사는 나날이 회복세를 보였고 그즈음 나는 그 병동을 떠나 나의 길로 돌아갔다.
나는 백발노인이 되었다. 흔들의자를 흔들며 ‘삐걱삐걱’ 의자가 만들어내는 마른 소리를 벗 삼아 그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간다. ‘너도 늙었구나, 내 육향(肉香)이 배어 매끈하게 낡은 안락의자는 같이 지내온 세월의 감촉으로 나를 맞지만 내 안에 응축된 ‘나 홀로’의 감성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70년 전 무심하게 들었던 그 한 토막 말이 이제 내 생활의 주격이 되었다. 기약 없는 전쟁에 목숨을 맡겨야 했던 한 병사의 말, “외롭지 않으세요”. 그 물음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적법이었던 그 시대,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에 그도 나도 모두는 국방색 일색으로 뛰어야만 했다. 작은 쇠붙이 한 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부조리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었고 호소하고 항변하는 자는 배신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젊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허망과 절박한 심정을 병사는 그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 외롭습니다”. 미루었던 답을 나는 지금 한다. 이방의 땅과 하늘 사이에 앉아 있는 90 인생의 실상이다. “당신의 외로움은 젊음이었고요. 나는 외로움을 벗 삼아 늙고 있습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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