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의 추억
(지난 호에 이어)
그 칠흑 같은 밤에, 한번 설명을 듣고는 그 높은 산을 혼자 로프에 매달려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적이었습니다. 아마도 깜깜한 밤, 아득히 이어진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았기에 가능하였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였던 친구들도 기적같이 내려왔다는 말들을 하였었으니까요.
허벅지까지 빠지도록 깊은 계곡의 눈을 헤치며 백운장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도 백운장에 거하던 분이 놀라며 문을 열어준 후 끓여준 더운 물과 건빵 몇 봉지로 모두 허기를 달랜 후 하산을 하다가 우이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 경찰서로 불려 들어갔지요. 그때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거든요.
우리를 바닥에 꿇어 앉게 하며 “병선이가 어떤 새끼야?” 제 이름을 부릅니다.
그동안 집에서 산에 갔다가 안 돌아온다고 실종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꿀밤 한 대를 맞은 후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파출소에 잡혀 있다가 첫 버스를 타고 모두가 무사히 귀가를 할 수가 있었지요.
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학교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면서도 내게는 겸연쩍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 후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 관여하며 YKA(Young Korean Academy)라는 조직에서 매월 하는 산행을 따라다니며 조금 더 산 사람을 배울 수가 있었지만 그도 잠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가족이 이민을 떠나 1967년 3월25일에 Toronto로 온 후, 국외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 언제인가 캄캄한 밤, 외진 바위산 꼭대기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함께 하였던 친구들을 기억하지 못한 나는 탕아(蕩兒), 한 평생 집 나간 탕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이 그리워지니 그 때의 그 친구들이 생각나지만 이제는 다 잃어버린 그 얼굴과 이름들!
참 구제불능의 탕아(蕩兒), 아니 탕노(湯老)가 되어버린 요즈음인가 봅니다.
이름을 잊어버린 친구들에게 외쳐 봅니다.
“친구들아! 참 고마웠다! 그 때 그 동아줄이 오늘까지의 나를 있게 하여 주었구나!”
Ps: 혹여 어디에서 이 글을 읽으며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내게 연락해 올 수 있는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인왕산에서 울려온 메아리
“인수봉의 아픈 추억”을 올리고 보니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기를 바란다며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비록 60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일 자체가 여간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날에,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시간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분명 함께 하였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리라고 기대를 하며 저의 고등학교 동창들의 카톡 방에 글을 올렸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첫 회신이 왔습니다.
김대성형으로부터 온 짤막한 카톡 메시지였습니다.
“전병선형과 같이 인수봉 오른 게 딱 60년이네. 그때 지금 카나다에 사는 이성환도 있었을 걸.”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이성환은 이 곳에서 자주 만나는 동기이기에 마침 얼마 전 만난 기회에 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인수봉 이야기를 했을 때 “너도 아주 혹독하게 입산식을 치루었구나!”라고 말하던 산을 사랑하는 동기였습니다.
당장 전화를 걸었더니 “아마 나도 그 때 거기 있었을꺼야. 그러면서 그날 우리를 리드한 친구는 지금 미국, LA에 사는 이종기일꺼야”라는 답을 주었습니다.
참, 그 생사의 기로에 함께 하였던 친구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꺼야”라는 대답에 좀 당황스럽기도 하였었지요.
그러나 “그 때의 리더는 산악반의 이종기 일거야”라는 말에 미국에 있다는 “이종기”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LA에서 Radio Korea 를 오랫동안 운영하며 미국통인 고등학교 때의 문예신문반 친구 최영호에게 카톡을 날렸지요.
그 친구로부터 돌아온 카톡, “아마 이종기가 맞을겜니다. 그 애가 산악반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LA에 살지 않고 동부쪽 같은데, 내일 회사 나가서 찾아 볼께요”라는 긍정적인 답변이 왔습니다.
미국 동부에 사는 친구에게 동부의 동창들 현황을 물어봄과 동시에 한국의 동기회 카톡방에 협조부탁 글을 올린 후 미국의 “최인호”로부터 두 사람의 “이종기”라는 이름이 있다면서 두 사람의 15년 전 기록이라며 아마도 위에 있는 동기일 것이라는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주소를 보니 San Jose 에 있으며 전화 번호가 있기에 “동부일꺼라 하였는데…?” 미심쩍어 하며 믿져야 본전이라고, 전화를 걸어 보니 answering machine 이 답하는데….
아무래도 미국 “hello”소리가 아닌 듯해 자초지종 이야기를 한국말로 남기었지요. ㅎㅎㅎ
만약 아니면 못 알아들었을 터이지만 그래도 “Sorry” 소리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았지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요즈음 하도 광고와 스팸전화가 많아 모르는 번호는 잘 안 받았었는데도 왠지 손이 가서 전화를 받으니 “혹시 전병선씨인가요?” 하는 첫 마디에 “이 종기?”라는 대답과 물음이 섞인 말이 절로 튀어나왔지요.
드디어 연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 둘은 60년 전의 그 시간, 그 산 속에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를 인도한 산악반의 베테랑 산악인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60년만의 해후가 아쉽게도 전화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이젠 모두가 70이 넘어 망팔을 하는 나이에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있었던 추억을 되 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IBM 회사에서 은퇴를 한 후 건강히 평안한 여생을 San Jose 에서 지내고 있는, 산악인과는 또 다른, 멋진 컴퓨터계통의 전공자였습니다.
함께 늙어가는 우리들이기에 서로 건강히 살며 한번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자며 아쉬운 전화를 끊었지요.
“고마웠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던, 참으로 멋진 “인수봉 동기들의 환갑연”이 된 2023년 3월인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은 2023년 초에 계산을 잘 못하여 오가게 된 글이 되어 귀한 친구들을 1년 일찍 찾을 수가 있었지만 다시 자초지종을 찾아보니 2024년 3월이었기에 결국 2023년의 내 운세가 틀려졌던 모양입니다. ㅎㅎㅎ
그날 밤, 별빛과 눈빛 속에 손으로 더듬으며 로프 걸쇠 있는 곳으로 무사히 인도하여 준 이종기형께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인수봉이 솟아오른 후로 밤 12시경에 별빛과 눈빛만 의지한 채 자일을 타고 내려온 사람은 몇 안될 것 입니다.
더군다나 그 것이 생애 최초의 로프 타기였던 사람에겐. ㅎㅎㅎ
지금이야 웃지만.
그럼 2024년의 내 운세는 기적적으로 그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났었던 그 때의 나의 운세가 되풀이될까요?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2024년을 맞으시는 분들도 한번 1964년의 운세를 되 집어 보시면 어떨까요?
좋은 기억들이 많으셨다면 다시 한번 기대를 해 보시고, 혹시라도 언짢은 일들이 있으셨다면 새로 오는 50년이니 이번에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고 믿으시며….
모든 분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립니다. -천천히, 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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