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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천천히 열리는 사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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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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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5
2017-07-15
두물머리 팔당

 

 

 팔당 댐이 생기면서 조성된 ‘두물머리 공원’은 아침이면 물안개를 찍으려는 사람에서부터 저녁의 석양을 찍으려는 사진사들과, 젊은 연인들끼리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혹은 오래 전에 만들었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하여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오는 젊은 부부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다. 거기에다 나와 같이 오래 전 옛 추억을 더듬는다면서 온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항상 붐비는 곳이 되었다. 

 

 

 


 산골짜기마다 여울져 흐르던 물이 내가 되고, 조금 더 합하여져 강이 되는 것이 물의 흐르는 이치일진대, 시냇물 같은 내가 합하여 질 때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 제법 강처럼 물줄기가 커진 다음에 합하여 지는 지점에 이르면 두 갈래의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고 하여 ‘양수리’ 혹은 ‘두물머리’라고 부른다. 


 55년 전 즈음인 옛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하여지는 이곳에 왔을 때에는 지명이 한문으로 양수리(兩水里)라고 하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한자 교육을 폐지하고 한글로 말을 많이 다듬어 “두물머리”로 바뀐 모양이다.

 

 

 


 서울에서 과히 멀지 않은 경기도 양평이지만 요즈음에는 워낙 많은 자동차들이 모이다 보니 생기는 교통체증에 시간을 잘못 잡으면 길에서 귀한 시간을 다 허비하고 마는 곳이 되었단다.


 그 옛날, 여름 한 달 간을 이곳에 묵으면서 책과 씨름할 때에는 한가한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을 오던 시골길이었는데….

 

 

 


 강산이 다섯 번 반을 변하는 동안 나는 칠순을 넘기었고, 양수리는 이렇게 두물머리로 바뀌어 많은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동안 국민소득은 또 얼마나 많이 신장 되었는가!


 잔뜩 흐린 하늘에 간간히 오는 가벼운 세우(細雨)로 삼라만상이 뽀얗게 보이는데, 이제는 댐에 막혀 호수가 된 조용한 수면 위로 흐릿하게 녹아드는 주변의 아담한 산세와 멀리 떠있는 자그마한 섬의 정경은 마치 내가 운계(雲界)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젖게 했다.

 

 

 


 이런 날씨인데도 많은 인파로 인하여 배경을 고려하며 사진 한 장을 찍으려 해도 오랜 시간 기다리며 기회를 보아야만 하게 만든다.

 

 

 


 전에는 못 보았는데 어느새 수령 400년이 되는 느티나무가 있는 강가도, 그리고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도 분주하였지만 희미한 세우 속에 펼쳐지는 강폭의 경치는 아름다워 멋진 방문이 되었다.


 수도권 최대 연꽃 정원이라는 세미원에는 철지난 연 잎들이 색을 바래며 처량한 모습이지만, 인생의 철도 지나 이렇게 늦게 찾아 온 나의 탓이니 탓해 무엇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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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60035
10275
2017-07-07
강화도(5)-제적봉 평화전망대

 

 

 바다라기보다는 염하라고 불리는 좁은 바닷길 저쪽에 보이는 이북 땅. 바다 같지도 않은 바다 건너로 시선을 고정 시키며, 시름 겨워하는 개성이 고향인 친구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러고 보니 함께한 4명 모두가 다 실향민들이다. 우리 생전에 고향 땅을 밟아 볼 수가 있을까? 허긴 말이 고향이지 5살배기들이 무얼 그리 많이 기억을 하겠는가!

 

 

 


 그러나 북녘을 바라보는 감회는 참으로 묘한 심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민통선 안의 군사작전 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기에 신분증을 지참하고 검문소를 거쳐야 들어 갈 수 있다.

 


 전망대 정면에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2.3km이며 해창리 돌출부에서의 최단거리는 1.8.km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그 거리가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먼거리로 된 나라가 우리나라 아닌가?

 

 

 


 뽀얀 해무인지, 아님 미세먼지인지, 그리 청명하지 않은 날씨 덕분에 개성의 송악산은 아주 흐리게 보이고 북녘 땅에 지어진 몇 채의 집들이 장난감처럼 조용하다. 


 지하1층 지상4층 규모의 전망대는 잘 준비되어 있었다. 1층에는 통일 염원소, 게스트 룸, 식당,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를 전시한 전시관과 시간에 맞추어 북한의 현황을 설명하는 간단한 안보교육을 받고나서 전망대에 설치된 고성능 망원경으로 강너머를 살펴볼 수가 있지만 뿌연 공기가 뚜렷한 상을 만들어 주지를 못하는 오후였다.

 

 

 


 3층에는 야외전망대를 비롯해서 흐린 날씨에도 영상으로 북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스크린룸, 옥상휴게실이 설치되어 있다. 지하1층과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이 되지 않는 곳이고…

 

 

 


 전망대를 나와 탱크를 전시한 야외전시장 철조망 앞에 서면 발밑을 흐르는 예성강이 있고, 그 너머에 바로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으로 육안으로도 사람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지척의 거리에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 길이 그렇게 먼 길이 되어야만 하는지…!

 

 


 바로 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자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총부리로 방어하는 저 북녘에 인도주의라며 돈을 주고, 양식을 주고, 배움을 주는 정치는 과연 어떤 정치일까? 그래서 그들은 지금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고, 컴퓨터 해킹으로 우리 사회의 불안과 불신을 조장하고 있는데……

 

 

 


 야외 전시장으로 나오니 제적봉비 앞이 한산하였다. 적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한자로 쓰면 제적봉이 되는데 주적의 정의가 모호해지도록 6.25를 모르는 세대들이 사회의 주역들이 되어서인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야외 망배단 옆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뒤로 멀리 북쪽 땅을 바라보는 실향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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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59902
10275
2017-06-30
강화도(4) -전등사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도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고즈넉한 산사가 아닌 전등사에서 옛날에는 없던 죽림 다원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나누는 대화 속에 되살아나는 인생 여정!


참 멀리도 돌아왔나 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고려 충렬왕의 부인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을 시주한데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기에, 현존하는 사찰 중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된 절인 셈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년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비장하고 있으려는지… 1,7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는가?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1678년 숙종 때에는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기도 하였다.


 현재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보물 179호인 약사전과 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 등 17점의 문화재가 있는 고찰이다.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민족 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지붕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눈이 맞아 돈과 재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재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단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인의 형상을 본뜬 나체상을 만들어 추녀를 받치게끔 하였단다. 그 곳에서 매일 불경 소리를 들으며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해진다.

 

 

 

 


 추녀는 순 한글로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를 일컫는다. 그런데 못생긴 여자와 발음이 똑같다. 왜 일까? 아마도 여기 전등사에서 추녀(醜女)가 받치고 있어서인가 보다!

 

 

 

 

 

전등사 (고은)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 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은 효봉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하여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전등사 주지를 역임하셨다 한다. 1957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시와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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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59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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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3
강화도(3) -광성보(廣城堡)

 

(편집자 주 위치에) 효종 9년(1658)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1679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당시 성문도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 호에 이어) 
 덕진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는 광성보를 수륙 양면으로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현대화 된 미군의 함포사격과 덕진진으로부터 올라 온 해병대의 배후 협공으로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기에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 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결국 퇴각이 아닌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일이 신미양요인 것이며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신미양요때의 처절한 전투로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 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봉행된다. 


 이 광성보에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곽들이 잘 보수되어 있어 굳이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가족들이 나들이 하며 자녀들에게 안내판에 쓰인 설명문만 읽게 하더라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견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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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59523
10275
2017-06-17
강화도(2) -덕진진(德津鎭)

 

 서기 2017년은 한국이 개천한 단기로는 4,350년이 되는 해이다. 반만년의 세월 속에 3국으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통일이 되면서 왕조가 바뀌었던 그 시간에 우리 주변국들도 수많은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문명이 발달하고 국력이 부강해 지다 보니 대륙 끝에 붙은 조선은 자연 침략의 대상이 되곤 하였었다.


 통일신라까지 반도 안에서 우리끼리 지지고 볶던 세월이 흐르다 고려시대부터 이조왕조에 이르기까지 그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들을 괴롭혀 남쪽에서는 일본이, 북쪽으로부터는 중국이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 전란의 참상이야 여기서 거론할 내용이 아니지만 오늘 보는 덕진진은 병자호란 뒤 숙종 5년(1679)에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12진보 중 가장 강력한 포대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지이다.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 되었지만 후일에 한번 요긴하게 사용하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며 세계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넓히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닐 때 신흥강국이 된 불란서와 미국은 아직 아무에게도 속국이 되지 않은 한국에 눈독을 드리며 집적대기 시작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에서는 쇄국정책으로 이들을 막기 급급하였다. 현대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가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1866에 강화도에 침공한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이때에는 재래식 무기 밖에 없었던 조선의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같은 해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에 정박했다.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측은 제너럴 셔먼호에 퇴거를 경고했으나, 그들은 약탈을 자행하며 대동강 상류 만경대 부근에 정박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배에 접근했던 이현익쪾박치영쪾유순원이 붙잡혔고, 조선측은 석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월 22일 조선은 화공 포격을 실시하였고, 결국 24일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소위 셔먼호 사건이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1871년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 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갔다. 결국 남장포대가 육지로 침공해 오는 배후의 적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인가 보다. (다음호, 광성보에서 이어진다.)


 신미양요 때 무너진 성곽과 돈대, 포대 등을 1976년 복원하고 대포도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현재 덕진진에 가면 남장포대를 볼 수 있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해상에서 적에 노출되지 않은 반월형 천연 요새를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제 226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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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
전병선의 大대 街가 里리(제1회)-강화도(1) - 초지진

 

(본보는 이번 호부터 사진 칼럼니스트 전병선 님의 한국 및 세계 기행문을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과 의견개진을 당부드립니다)

 


    

 


 강화도에는 마니산이 있다. 정상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전해오는 참성단이 있어 요즈음에도 전국 체전의 봉화를 채화하기도 하고, 10월 3일 개천절에는 강화 개천 대축제를 거행하는 산이다.


 고도 469m 밖에 안 되는 과히 높지 않은 산이지만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산의 정상에서 남쪽의 한라산과 북쪽의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각각 같단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보면 그 중앙이요, 또 그 중앙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그 또한 세계의 중앙이 아니겠는가?
 세계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고, 또 그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 문화의 유산들도 참 많다. 세계의 꼭지, 강화도에서부터 천천히 길 따라가며 보이는 세상들을 보기로 하자.

 

 


 육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는 고려의 개경은 물론 조선의 한양과도 가까웠고, 바다에 떠있는 섬이었던 관계로 여러 차례 천도(遷都)와 몽진(蒙塵)의 땅이 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바다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오히려 외침을 제일 먼저 받는 격전지가 되기도 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강화도 곳곳에 진, 보와 돈대를 설치하였는데, 근래에 복원하여 관광지 구실을 하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 돈대 같은 군사 시설을 볼 수가 있다.

 

 

 


 진과 보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명칭으로 군사들이 주둔하던 성곽이나 군사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다. 진은 보보다 규모가 조금 더 컸으며, 돈대는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로 그곳에 대포를 배치하였던 곳을 이른다. 


 내가 한국을 떠났던 50년 전만 하여도 인천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강화도가 이제는 강화대교가 생겨 더 이상 섬이 아닌 번화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 본 초지진(草芝鎭)은 강화해협을 사수하는 12개의 진, 보 중에 외세의 첫 번째 침공 루트가 되었던 곳이다.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그 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병인양요)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미국의 아세아 함대(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빈약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1875년 9월 20일부터 일본의 운요호와의 싸움은 결국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고, 일본 무역을 위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조일수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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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헤네랄리페

 

2015-03-13

스페인, 알람브라 헤네랄리페

 

 일반적으로 궁전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싸인 "헤네랄리페 정원 (Generalife Gardens)"이다. 쓰여 있는 대로 영어로 읽으면 제네랄라이프(Generalife), 즉 "일반적인 생활" 비슷한데 실제로는 헤네랄리페라고 읽으며 뜻은 아랍어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라고 한다. 결국 만인지상인 왕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떤 설명에는 "여름궁전"이라고도 하였지만 건물들의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볼 때, 그리고 정설에 가까운 자료에 의하면 여름동안 피서를 위하여 머무는 곳이 아니라, 슐탄이 궁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러나 유사시에는 즉시 환궁할 수 있도록 나스르궁전에서 지척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이다. 


 네바다산맥에서부터 수로를 이용하여 끌어 온 물이 쉬임없이 솟아나 "알람브라에는 고인 물이 없다!"고 하도록 궁전 안의 곳곳으로 계속 흐르면서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고, 기도시간에는 세정을 하게 하는 다목적 수로의 시발점이기도 한 Spanish-Muslim Garden이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잘 조경되어 담장을 이루기도 하고, 아치형 문을 만들기도 하며 이어지는 커다란 정원 안에는 많은 분수와 연못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 건축물 앞에 아름다운 분수가 연못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아세키야 정원"(Patio de los Acequia)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정원에서 분수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타레가가 "알람브라의 추억"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라고 평가받으며, 타레가가 발전시킨 독특한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서정적인 선율의 애절함이 마치 줄지어 영롱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처럼 일품인 기타곡이다.


 알알이 가득 담긴 사연들마저 떨어지는 대로 부서지며 물에 흩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는,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이룰 수 없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며 애잔하게 연주되는 알람브라의 추억!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찌 타레가만이 느끼었던 감정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데… 그리고 즐겨 듣는 음률인데…


 물이 귀한 땅, 아프리카, 중동에서 살아온 이슬람교도들의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물이 풍부한 스페인과 만나면서 아라베스크 무늬의 조각과 물 그리고 꽃이 어우러져 이국적 향취가 가득하게 조성한 알람브라궁전! 

 

 

 


 꼬불꼬불 돌아 나온 길이 엄청 긴 길이지만 놀램과 탄성으로 이어진 길이기에 피곤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나간다는 아쉬움이 더 큰 아름다운 "알람브라"였다. 언제 다시한번 와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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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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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알카사바

 

2015-03-06

스페인, 알람브라 알카사바

 

 
 "붉은 성"이라는 뜻의 요새 알카사바(Alcazaba). 


 이슬람들이 장악하였던 이베리아반도에서 레콩키스타(그리스도교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스페인 전역의 영역을 잃어가다가 마지막 남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를 한눈으로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운 붉은 요새다.


 그러나 결국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 부부 왕에 의하여 1492년 그 운명을 다한 채 지금은 스페인 사람들이 당시의 승리를 기념한 종이 그 종탑에 걸려있게 되었다. 이 종이 울리면서부터 이베리아반도에 남겨진 아랍인의 유물과 문화는 기독교 문화로 덧칠하여지게 된다. 

 

 


 현재의 스페인 지역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이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된 후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까지도 노렸으나 732년의 "투르 푸아티에"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물러나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8세기 동안 피레네산맥 북쪽의 서유럽을 능가하였던 이슬람의 문화와 과학기술은 이베리아반도의 문화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어 많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였다. 


 이미 10세기에 코르도바 도서관은 60만 권의 서적을 소장하며 그리스철학을 연구하고 있었고, 11세기에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톨레도에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한 연금술의 발전으로 질 좋은 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모든 권력과 문명에는 흥망성쇠가 있음"을 기록하여 주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그 자취를 보며 그때를 회상할 수밖에…


 알카사바는 지정학적으로도 높은 언덕위에 세워진 견고한 난공불락의 성채였으나 이슬람세력이 약해져 그 명운을 다한 것을 알게 된 마지막 왕, 나스르 왕조의 보아브딜은 이 성에서 수성하며 항전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궁전을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궁전 아래 계곡 건너편의 작은 산인 사크로몬테 지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한다. 보아브딜은 격렬하게 저항하다 결국 항복을 하게 되었으니 이 알카사바는 아름다운 궁전을 품고있다는 이유로 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는 못한 셈이 되나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싸움터였던 그라나다! 그 싸움에 패한 이슬람이 떠난 후, 잠시 스페인의 왕궁으로 쓰이다가 방치되면서 폐허가 되어가는 오랜 세월동안, 집시들이 모여 살며 퍼트리는 무어 왕들의 이야기와 신비스러운 건축들이 어우러져 있으니 신화와 전설이 가득할 수밖에...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폐허가 된 궁전에 머물며 이야기들을 모아 알람브라 이야기를 집필했다. 1832년 그의 소설이 발간되자 큰 인기를 끌며 알람브라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에스파냐 정부에서 궁전을 복원했다. 덕분에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인 알람브라궁전을 우리 같은 여행객이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성터는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을까? 아직도 그 싸움은 중동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번영했던 이슬람 도시 그라나다. 무슬림 왕조의 지배는 1492년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면서 과거가 됐지만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은 현재도 유럽에 세워진 아랍 최고의 유적으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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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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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파르탈정원

 

 

2015-02-27

스페인, 알람브라 파르탈정원

 

 

 궁전이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중국이나 유럽의 궁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베르세이유나 오스트리아 빈의 쉔부른 궁전은 넓은 부지에 위압적인 건물 내부를 수많은 그림과 거울들, 그리고 조각상들로 장식하며 절대권력의 부와 권위를 보여주었다면, 알람브라는 규모면에서 서민적이라 할 정도로 작고 현란한 채색의 그림들이나 조각상들도 없으면서 벽면과 천정을 가득 메운 단순한 기하학적인 문양의 흐름과 정교한 석회몰딩으로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아름다움의 연속이었다.


 왕들이 즐기던 증기탕들과 여러 부속 건물을 지나 나오면 알람브라에서도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는 "파르탈정원"을 만나게 된다. 시간에 쫒기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보며 지나가지만 이에 얽힌 역사를 한번 들여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층으로 보이는 것이 Las Damas(The Tower of Ladies), 즉 여인들의 탑이다. 이 건물은 무하메드 3세 통치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알람브라의 모든 건물들보다도 더 오래된 건물이지만 나자리(Nazari)왕조 때에는 궁의 일부가 아닌 성 밖의 건물이었다. 정작 알람브라성 안에 들어선 것은 불과 100년 밖에는 안 된다.  


 당시 파르탈을 소유한 "아더 본 거위너(Arthur von Gwinner)" 씨가 1891년 3월에 스페인 정부에 기증한 이후에 알람브라에 합류 되었는데, 지금처럼 아름다운 궁전이라기보다는 평범하고 오래 된 집과 몇 그루의 나무만이 낙후된 벽과 천정을 가린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천정에 있었던 아름다운 조각은 마지막 소유자가 떼어내어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에 기증, 지금까지도 그 곳에 전시되어 있단다. 1930년대부터 스페인 정부는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예술인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뺏긴 유적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발굴하며 대대적인 조경공사를 거쳐 알람브라에 편입시킨 결과 오늘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람브라에 들어오면서 그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진 아름다움에 놀라고, 혹은 나가면서 시원한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 되었다.

 

 "알람브라의 옥의 티"라고 하는 카를로스 5세의 별 볼품없는 궁전이지만 한번 둘러보자.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hrlos V)은 알람브라의 다른 건물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반영한 로마풍의 건물이다.


1543년, 카를로스 5세가 이곳에 궁전을 짓게 된 배경에는 그의 조부모인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당시 이슬람교도들인 무어인이 최후까지 버티던 그라나다에서 항복을 받은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제스처로 이슬람이 피운 꽃인 알람브라에 새 궁전을 지어 위세를 떨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568년, 이곳에 남아 있던 무어족들의 반란으로 15년간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반란이 진압 된 후 재개되었으나 1637년, 재정부족으로 지붕이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한 공사가 연기 되었다.


 결국 아직까지도 미완인 채로 1층은 알람브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중앙의 원형광장은 가끔 공연장으로 사용이 되기도 한다. 매년 여름 그라나다 국제음악무용제가 열리며, 수년전에는 성악가 조수미씨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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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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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2)

 

 

2015-02-20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2)

 

 메수아르궁을 돌아 코마레스궁에 있는 대사의 방을 빠져 나오면 나스르궁전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코마레스 궁의 안뜰인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Arrayanes)"이 나온다. 가운데엔 이슬람 건축물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알람브라궁 안에서도 큰 연못에 해당하는 직사각형의 연못 주변에 천상의 꽃이라는 "아라야네스"가 심어져 있어 이렇게 불리는데 아직은 꽃이 필 때가 아니어서인지 그 천상의 꽃은 볼 수 없고, 하늘과 궁전이 반사되어 천상과 지상을 합쳐 주는 듯 황홀한 전경을 만들어 준다.


 어떤 안내서에서는 인도의 유명한 타지마할도 여기에서 착상을 하였다고 하는데… 허긴 이곳보다 약 300년 늦게 지어진 타지마할이고 보면 그동안 누군가가 와서 보고 차용하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타지마할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그 건축에 얽힌 이야기조차 생소한 나에게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의 정점이 어쩌면 서로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더 앞선다.


 고여 있는 듯 잔잔한 수면에 시간에 따라 변하는 코마레스궁과 그 대칭에 있는 코마레스탑의 반영이 보는 사람의 넋을 앗아가지만 실은 항상 흘러 움직이는 이 물이 궁전 곳곳을 돌면서 한여름 열기를 식히고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정화한다고 한다.  


 발코니 뒤로 이 아름다운 정원의 스카이라인을 망치는 건물이 "알람브라의 옥의 티"라고 하는 카를로스 5세의 별 볼품없는 궁전 지붕이다. 


 이 건물 왼쪽으로 들어가면 4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거처가 있는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으로 연결이 된다.

 

 

 

정확히 좌우대칭인 아라야네스정원의 다른 쪽에서 보는 코마레스 탑과 그 반영이다. 아라야네스를 양쪽에 두고 직사각형의 수로를 만들어 보는 곳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반영이 수면에 나타나게 설계되었다. 거대한 연못에 비치는 그 반영이 너무 아름다워 "그라나다는 물 위에 궁전을 지었다"는 격찬을 받는다. 

 

 

 


 라이온궁 중정에 12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반이 있어 물줄기를 품어내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분수 대신에 사자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옛날에는 어느 입에서 물이 나오는가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정교한 몰딩 조각에 비해 사자상의 조각은 수준미달인 것 같은 느낌이 드나,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지 않는 이슬람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돌아가면서 지어진 왕족들, 특히 후궁들의 방 가운데 정원에 사자상이 있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 


 하긴 솔로몬의 궁전에도 안채에는 그 많은 부인들이 들고 온 이방신상들이 있었다니까… 부인이 하겠다는 것을 어느 남자가 막을 수 있겠는가? ㅎㅎㅎ


 사자의 중정을 에워싸는 몇 개의 방과 시설은 왕의 사적 공간, 즉 왕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할렘이다. 알람브라의 내전인 셈이다. 중정은 124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기둥머리를 아치로 연결한 모든 벽면에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정교하고 유려한 석회 세공이 빈틈없이 입혀져 있다. 

 

 

 


 124개의 기둥마다에 새겨진 조각들의 문양이 유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을 느끼게 한다. 


 궁 안으로 들어가 위를 쳐다보면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정교한 모카라베(Mocarabes) 양식의 천정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분수 주변의 방들 중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벤세라헤스의 방"과 "두자매의 방"이 있다. 그런데 이 방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벤세라헤스"는 그라나다의 왕 보아브딜과 대립했던 강력한 북아프리카 왕족의 이름인데 이 가문의 한 젊은이가 보아브딜의 후궁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이 사실을 안 왕이 연회를 핑계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젊은이 36명을 이방으로 불러, 연회 중에 모두 다 참수하였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순식간에 그 아름다운 방은 피로 물들었고 그 핏물이 정원의 사자 입으로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벌집형상의 그 천정은 정말로 현란하여 보는 이의 넋을 놓게 만들었다.

 

 

 


 두 자매는 두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똑같은 대리석이 있어 붙여진 왕비의 방이다. 왕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달콤한 이야기를 들으며 별이 쏟아지는 듯 한 저 천정을 바라보는 왕의 기분은 어떠하였을까? 
 라이온분수를 중심으로 주위로 만들어진 많은 방들마다 가득한 이슬람 조각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정교한 모카라베(Mocarabes) 양식의 천정을 보노라니 그 옛날의 시간 속으로 공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들이...

 

 모카라베(Mocarabes) 양식: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마호멧(Mahomet)이 추격자들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니다 히라(Hira)라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코란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굴의 천정에 많은 종유석들이 천사의 광채에 빛났었다고 하여 후일 이슬람성지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종유석 모양을 벌집형태로 만들어 천정을 장식하는 방법을 모카라베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혼동을 정리하자. 지난 호(83회)에서 "카를로스 1세"라고 했다가 여기서는 "카를로스 5세"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무언가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같은 사람인데,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인 유럽의 "카를로스 5세"가 되도록 그 당시의 정치권이 혼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내서를 쓰는 사람이 어느 관점에서 쓰는가에 따라서 1세가 되기도 하고 5세가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들은 이름과 집에 와서 책을 보며 보완하다 보니 두 곳에서 다른 표기를 하게 된 것 같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카를로스는 영어로는 Charle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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