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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토의 아름다운 세상

    반갑습니다. 먼타향에서 산지가 벌써 26년이상이 되었군요....

    오늘 어느분의 글을 읽으면서 ........

    말이란 늘 조심해야 한다♡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반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털어놓는 사람은 화를 당하기 쉽다.말을 잘하면 유익하나 잘못하면 화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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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홀씨 사이(상) ~[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뿌리와 홀씨 사이(상)

일러스트: AI 생성.

*이 글은 토론토 양경춘 씨가 한국 재외동포청이 주관한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상><하> 2번으로 나눠서 싣는다.

 

새벽 두 시. 나는 또 눈이 떠졌다.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불을 젖히고 살며시 일어나 거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의료용 침대 위 장모님의 몸을 천천히 돌려 방향을 바꿨다. 그 순간 장모님이 눈을 떴다. 말씀은 없으셨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이불을 여며 드리고 다시 조용히 침실로 돌아왔다.

문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쉽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거짓은 아니지만 전부도 아니었다. 의무라고 말하면 더 정직하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민자로 살아온 사반세기 동안, 이 집 안이 내가 유일하게 완전히 속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민자에게 ‘속한다’는 것은 국적이나 주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곳에 있을 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 문제다. 캐나다에서 나는 늘 설명해야 했다. 내 이름의 발음을, 내 나라의 위치를, 내 경력이 왜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지를. 그러나 이 집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사위’였고, 그걸로 충분했다.

장모님 가족이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1990년 가을이었다. 단풍이 절정이던 계절, 장인어른과 장모님, 처남들이 토론토 공항에 내렸다.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가족이 함께 편의점을 시작했다. 장모님은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면서도 자식들 도시락만큼은 한 번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 1·4 후퇴 때 빈손으로 이북을 떠나 낯선 남쪽 땅에 뿌리를 내리셨고, 쉰 중반의 나이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셨다. 낯선 땅에서 살아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은 이미 몸으로 알고 계셨다.

1997년 겨울, IMF 외환 위기의 한복판에서 나는 가족의 손을 잡고 토론토에 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열한 살 아들이 물었다.

“아빠, 우리 언제 다시 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있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부서장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그 경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백 장의 이력서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Canadian experience required.”

캐나다 경험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경험이 생기는 진퇴양난. 나는 그 앞에서 매일 조금씩 낯선 사람이 되어 갔다. 결국 한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헬퍼 일을 시작했다. 자정까지 계산대를 지키고, 음료 박스를 나르고, 새벽에 진열대를 채웠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계산하고, 영어로 웃었다.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그 첫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거리마다 불빛은 화려했지만 우리 아파트는 조용했다. 한국이었다면 친척들이 모여 북적였을 시간, 우리는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김치찌개를 먹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렸고, 아들은 말없이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 이민이란 화려한 나라로 온 것이 아니라, 낯선 조용함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던 1월 어느 날, 처음으로 장모님의 된장국을 먹었다. 빙판길에 두 시간이나 막혀 늦게 돌아온 나를 보시더니, 장모님은 말없이 냉장고를 여셨다. 따뜻한 된장국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김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어, 능력, 존재. 그러나 장모님의 밥상 앞에서는 그 어떤 증명도 필요 없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내가 있어도 되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그것이 내가 이 집에 속한 이유였다.

토론토의 봄은 늦게 온다. 긴 겨울 끝에야 얼어붙은 땅이 조금씩 숨을 돌리고, 무릎 높이까지 쌓였던 눈더미가 녹아내린 자리마다 작은 연둣빛 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낮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것은 늘 민들레였다.

봄이 오면 주말 오후, 옆집의 다니엘과 말라 부부는 자기네 앞마당에 퍼진 민들레를 부지런히 뽑아냈다. 캐나다 사람들에게 민들레는 잔디를 망치는 잡초였다. 그러나 장모님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못내 아까워하셨다.

“이 귀한 걸 왜 뽑아 버리나?”

장모님은 낡은 호미를 들고 민들레를 캐셨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표정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바구니에 민들레를 가득 담으며 환하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나는 오래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캐 온 민들레는 김치가 되어 식탁에 올랐다. 쌉싸름한 맛 속에 봄의 기운이 배어 있었고, 우리는 그 맛을 나누며 함께 웃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그 봄날의 풍경이 훗날 내가 가장 오래 붙잡게 될 기억이 될 줄은.

그 웃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이었다. 했던 질문을 다시 하고, 물건을 엉뚱한 곳에 두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2년 후 어느 날. 산책을 나간 장모님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큰 처남이 운영하는 11킬로미터 떨어진 리치먼드힐의 호텔이었다. 장모님은 몇 번 차를 타고 가 본 기억만으로 그 먼 길을 걸어가셨다. 호텔 로비에서 아들을 보자 환하게 웃으셨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길 잃음이 아니었다. 기억이 만들어 낸 선명한 현실을 향해 걸어가신 것이었다.

진단명은 알츠하이머성 치매였다.

처남들과 우리 부부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래 침묵했다. 한국어만 쓰는 어머니를 영어권 요양 시설에 보내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기억을 잃어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여보, 우리가 모셔야 할 것 같아.”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사위였다. 그 말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이미 선택은 되어 있었다. 이 집이 이 나라에서 내가 유일하게 속한 곳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이 12년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장모님의 몸을 직접 돌보아야 했던 날을 기억한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오후였다. 나는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맞는가. 이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나왔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나는 이 집에서 조금 더 편안해졌다. 마지막 경계가 사라진 사람만이 느끼는 그 편안함이었다.

한국의 관습에서 사위는 백년손님이다. 딸의 남편이 장모의 환부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두 시간마다 체위를 바꾸는 일은 그 어떤 예절 책에도 나오지 않는 항목이었다. 캐나다에도 이 역할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son-in-law caregiver’라는 조합은 사전에 없었고,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의 지인들은 “장하다”고 했고, 캐나다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문화 어디에도 내가 하는 일을 딱 맞는 언어로 설명할 자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나는 이 12년을 아름답게만 기억하지 않는다.

두려웠다. 회의실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가 전화기가 울리면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다. ‘엄마가 또 나가셨어.’ ‘찾았어.’ 문자 두 줄이 하루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발표를 마치고 복도로 나와 벽에 기대는 때, 나는 내가 어느 쪽의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섭섭하기도 했다. 처남들은 각자의 삶이 있었다. 나는 사위였지만 주된 돌봄을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어디선가 만들어졌다. 그것에 대해 한 번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때로 무거웠다.

짜증이 난 적도 있었다. 장모님이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실 때, 새벽 두 시에 또 현관 앞에 서 계실 때, 그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이 연민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누를 때마다 죄책감이 따라왔다. 치매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은 출장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장모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흘 동안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안도감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어느 날 장모님이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당신 누구요?”

그 말이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주 잠깐,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뒤로 오래 나를 괴롭혔다.

<하>편으로 계속.

양경춘/토론토

출처 : https://torontokjournal.com/news/4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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