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에서 만난 현자(賢者)(2)

 

(지난 호에 이어)

바로 그때 가까이에 먼저 도착한 젊은 남녀 커플이 모래밭에 앉아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들어 선한 미소와 목례를 보내 오는데 특히 그 남자의 눈빛이 어찌나 맑고 깊고 그윽하던지,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와 마음의 안정이 가져다 주는 내면의 열락(悅樂)이 나에게 스르르 다가오는 듯 참으로 나의 영혼을 안개처럼 촉촉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두 젊은이들의 미소와 환대를 받으며 우리도 그들에게 가벼운 인사와 답례를

남기고 그들로부터 수십 미터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눈앞에 펼쳐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비취색의 바닷바람을 한껏 즐기며 조금 전의 그 젊은이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두 사람이 동양계의 사람들 같기는 한데 딱히 한국계 같지도 중국계도 아닌 것 같고 일본계 같지도 않은… 그러나 한가지 나의 뇌리에 일순간 스며든 그의 모습은 그 옛날 유대 땅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던 *예수님*의 그 눈빛, 많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과 연민이 담긴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눈빛만 같아 보였다.

그런 인물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평화와 자애로움이 가득한 이미지의 그 젊은이가, 오늘 나와 함께 유람선에서 내려 같은 해변을 거닐게 되다니. 이 메마르고 각박한 자기 중심적인 시대에 이곳 아이티섬 한 귀퉁이에서 짧은 순간 이나마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행복으로 달아오르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끝없는 궁금증이 피어 오르게 되었다.

섬에서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배에 올라서도, 그리고 배가 다음 기항지로 이동 중에도, 또한 침실에 들어서도 심지어는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에 나가서도 그 청년이 어느 나라에서 온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될 뿐이었다.

그런 생각에 골똘한 채 다음날 아침 함께하던 두 가정 분들과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대화 중 Dr. C 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여행은 자신의 아들내외 그리고 딸네 내외와 동반여행이라 하시며 지금까지 거의 20여 차례나 크루즈 여행을 즐기셨다고 말씀을 하셨다.

옆에 계시던 은퇴하신 Dr. K 도 말씀하셨는데 자신은 마이애미에 있는(현지에 있는 대학교수) 아들 집엘 들렸더니 아들부부가 크루즈 탑승권을 끊어주어 이번 여행에 나섰다고 말씀을 받으셨다.

나도 간단히 토론토에서 왔노라 소개를 드리며 크루즈 여행이 너무 근사하고 재미있다고 하니 Dr. C 께선 자신들은 가족생일을 맞으면 언제나 크루즈에 오르신다며 유람선 여행의 예찬론을 펼쳐 나가셨다. 이어서 또 말씀하시길 이번에도 가족생일에 맞추어 오셨다며 다른 자리를 가리키시더니 아들내외가 저쪽에 있다고 손으로 가리키시고 그 옆에 있던 딸 내외도 알려 주셨다.

그 순간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 그것은 Dr. C 께서 가리키신 아들내외가 어제 아이티섬에서 만났던 그 젊은이들이 아닌가? 내가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청년 나사렛 동네의 *예수 그리스도* 처럼 자비와 긍휼의 눈길을 주던 그 젊은이, 그리고 바로 옆의 그의 아내! 아, 그들이 이분의 아들과 며느리였다니… 아~ 아. 이럴 수가 하고 나는 기쁨과 놀라움의 짧은 외마디 비명을 흘리고 말았다. (슬프거나 공포의 비명이 아닌 기쁨의 한도가 극에 달했을 때 터지는 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C 박사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좌중은 점점 숙연해지게 되었다.

그의 아들에 관한 스토리로 지금은 아들이 미국의 유명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으며, 며느리도 유명 도서관에서 중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수년 전 아들이 로스쿨을 마치고 일찍이 명망 있는 로펌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제안을 물리치고 태국에 있는 미자립마을 한 달동네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돕는 봉사자의 삶을 최소한 한두 해는 해보겠다는 본인의 계획을 전화로 아버지 되는 자신에게 알려 왔다고 하였다.

C 박사는 아들의 갑작스런 제안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큰소리로 일성대갈 하였다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여 모두들 갈망하는 자리에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바보같이 그걸 헌신짝 버리듯 뿌리치고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느냐며 불같이 화를 뿜어냈었다고… 옛일을 회상하며 우리에게 과거를 털어 놓았다. (십 수년 전인 그때에도 초임연봉이 미화 십만 불이 넘는 자리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며칠이 지나도 아들의 회심이 없었노라고 고백하며 화를 누르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는 아들이 돌아설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자신의 고집을 꺾고 마침내는 자식의 결정을 수용하여 이윽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며 그때의 아비로서의 비통했던 심경을 소상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허락은 했지만 네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시는 내가 먼저 너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며 아들에게도 그 뜻을 통보하였었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아들이 떠난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의 지난날 아들에게 하였던 모든 말과 행동이, 자신 스스로도 예수님의 자녀로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론 부끄럽고 자신보다 수십 년 인생의 후배가 되는 아들 앞에서 참 면목없는 짓이었구나 후회하며 일말의 수치스러움과 자괴감에 진실된 회개를 하였었노라 우리 앞에서 웃으며 옛이야길 들려주었다.

아들이 떠나고 나서 한참이 지나 자신의 휴가를 이용해 태국의 아들 사역지로 찾아가보니 아들이 어느 빈촌에서 그곳 아이들과 리어카를 끌고 비탈진 언덕을 오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엔 땟물 자국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과 마주치게 되었었다고 말하며, 그 표정이 안쓰럽기도, 한편으론 대견스러우며 존경스럽기까지도 하였었다는 아비로서 복잡했던 그때의 느낌을 담담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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