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있어 가평전투의 의미

 

 올해는 6.25 전쟁이 휴전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일곱 번 변한 시점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북한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으며 갈수록 긴장의 속도가 더해지고 있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로서는 6.25 전쟁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한 캐나다군의 가평전투(1951년 4월23~25)를 기억하고, 그들의 용감성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가평전투란?

가평전투는 1951년 4월23일부터 25일까지 가평일대 677고지에서 중공군 1개 사단과 싸워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캐나다군은 영연방 제 27여단의 소속으로 캐나다 PPCLI 대대가 이 일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영연방 제 27여단은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영연방군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계속 북으로 퇴거만 하던 중공군은 4월에 접어들자 다시 춘계 대공세를 강행하면서 침공의 양상이 뚜렷해졌다. 그 당시 이 지역 방어를 맡고 있던 한국군 제6사단은 적군에게 밀려 후퇴하고 있었으며, 결국 영연방 제27여단이 방어를 하게 되었다.

여단장인 BUKE 준장(영)은 뉴질랜드 포병대대를 가평 10Km 북쪽인 794 고지(수덕산) 부근으로 급파하는 동시에 영국 Middlesex 보병대도 794고지로 이동시켜 뉴질랜드 포대를 엄호토록 배치하였다. 그리고 잔여 보병대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 하였다.

가평 6km 북쪽 504고지(죽순리 동쪽) 일대에 호주대대를, 좌측 가평천 건너 677고지(내촌 2km 남쪽) 일대에 캐나다 PPCLI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전방의 상황이 악화되자 794고지에 주둔한 영국 Middlesex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를 여단지역으로 철수시킨다.

이리하여 일선 대대는 우측에 호주 대대가, 좌측 677고지 일대는 캐나다 대대가 담당한다. 캐나다 대대는 방공호를 파고 화기를 배치하는 등 방어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 지역은 방어지형으로서는 최적지였다. 23일 밤 10시경부터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일대 혼전이 전개 되었다.

날이 밝자 뉴질랜드 포대와 미 공군 지원에 힘입어 전투가 다소 호전되는 기세가 보였으나 중공군은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대를 크게 위협하였다. BUKE준장은 이 상황 속에서 현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 오후 5시를 기해 호주군 대대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캐나다 PPCLI 대대장 Stone 중령은 677고지 정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4개 중대 중 B중대를 전면 배치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캐나다 대대가 처음으로 적들과 접하게 된 것은 24일 아침 7시였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날 야간 8시부터였다. 밤 11시가 되자 적들의 집중공세가 시작되었고 수적으로 증가되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적들은 의외로 강하였으며, 이에 맞선 B중대는 결국 최 전면의 일부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B중대는 주 전지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한 다음 격렬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잃었던 진지를 다시 회복하였다. 적들의 시도를 재빨리 간파한 대대장 Stone 중령은 적들에게 집중강타를 명령하였다. 적들은 중화기의 적시 맹타에 놀랐고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적은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일시에 가평까지 침공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25일을 기하여 산세가 험악한 677고지의 D중대 진지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 전면 포위를 시도하였다. 이때 중대장 Mills 대위가 대대장에게 일단 후퇴하여 재공격 태세로 대처함이 어떠한지 보고하였다.

이에 Stone 중령의 답변은 "NO! 절대불가, 한 명도 후퇴불가, 모두 끝까지 항전하라"였다. 25일 날이 밝자 중공군은 수적으로 많은 인원으로 두 차례 공격을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25일 이후부터는 적은 완전히 공격을 체념한 듯이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만 3일에 걸쳐 가평일대를 피로 물들인 혈전은 영연방 제27여단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가평전투에서 가평을 침공하고 서울-춘천을 장악하려던 적들은 UN군의 정연한 방어와 막강한 화력의 집중 발휘로 그 공세는 무너지기 시작하여 4월말 경에 완전히 격퇴되어 후퇴하고 말았다.

가평전투는 영연방 27여단 및 한국전에 참가한 모둔 UN군 부대에게 가장 모범적인 전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인 대통령 부대표창이 캐나다의 PPCLI 대대와 호주 대대에게 수여되었다.

PPCLI부대는 캐나다군에게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유일한 부대이다. 캐나다 대대의 전투요원 손실은 전사자 10명, 부상자 23명 계 33명 이었으나 중공군은 1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결론

비극적인 6.25전쟁이 휴전된 지 70년이 지났다. 세월이 흘러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50년 당시 캐나다 군의 숫자는 5만명 가량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밖에 안되어 군 병력이 절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캐나다군은 2만6791명을 파병하여 UN군에서 미국, 영국 다음으로 3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다.

온타리오 브램턴 Meadowvale cemetery에 가보면 한국전에서 전사한 516명 전사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많은 전사자가 20세 전후의 꽃 같은 나이의 젊은이 들이다. 이 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이번 가평전투 72주년 4월을 맞이하여 그분들의 고마움과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 2021년, 2022년 2년에 걸쳐 온타리오 브램턴 Meadowvale cemetery와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무명용사 묘지(Fairview Cemetery)에 가평전투 승전비를 건립했으며,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도 없습니다. We will remember them forever(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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