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8)

 

(지난 호에 이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집 아파트 창문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들이 나를 미행하여 내 집을 알아내고 무언의 협박을 한 것으로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나는 두려움이 앞섰고 우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협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회사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상 나에게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을 주고 있던 회사를 드디어 떠나기로 결심했다.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그곳에는 4성급 호텔이 한 곳 있었는데 가격도 비쌌을 뿐 아니라 말이 4성급이지 샤워 시설도 불편하고 더운물도 잘 안 나왔으며 특히 대부분 중국음식이었고 한국어 서비스가 없어 한국에서 출장을 온 사업가들은 많은 불편을 느껴야 했다.

통역을 다니면서 많은 남한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불편한 문제들을 잘 알게 된 나는 바로 호텔 뒤에 방 3개짜리 고급아파트를 렌트했다. 그리고 호텔의 절반 가격으로 한식과 통역을 제공하였으며 중국에 사업하러 오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사항을 잘 파고들어 그들을 위한 맞춤 공략을 펼쳤다.

또한 이미 알고 지내던, 특히 회사 사장님들이 지인들에게 홍보를 해주셔서 나 혼자 정말 바쁠 정도로 고객들이 많이 생겼다. 2박 3일 사업차로 방문하는 사람들과 퇴직을 하고 친구들과 중국여행을 하러 온 동아리들도 있고, 장사한다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소상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점은 삼시세끼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였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중국음식에 냄새만 맡아도 거부감을 느껴 불편해 하였는데 나는 음식만은 아낌없이 정성을 쏟아 그들의 만족도를 높였다. 사업, 박람회, 여행 등 다양한 이유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식과 통역이 제공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장점이었다.

한 번은 80세 가까이 되신 친구 3명이 함께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공자의 생가와 태산을 구경하고 싶어했다.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하고 드디어 고속도로를 5시간 째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분이 배고 고프다며 여기 어디 한식당 있으면 가자고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분들이 고속도로에서 뭘 먹는 걸 찾냐며 그 친구 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사실 그 주변에 한식당은 고사하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멈출 데가 없었다. 중간에 멈출 계획을 세우지 않아 많이 당황해진 나는 그래도 배고프다는 어르신을 그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지역 식당에 일단 차를 멈추고 나 혼자 먼저 들어갔다. 그들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도저히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나는 그곳 식당을 몇 군데 돌면서 메뉴판을 확인하고 그 중 우리 음식과 비슷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메뉴에 없는 한식 비슷한 해물 볶음밥을 주문했다.

비록 한식은 아니었지만 새우와 오징어를 많이 넣고 볶은 볶음밥은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들 만족해하며 많이들 드셨다. 그렇게 혼자 너무 바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객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몇 배의 수입을 얻게 되었다.

또한 한국문화는 자연스럽게 내 몸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면서 나는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다. 2개 이상의 언어를 할 줄만 안다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나는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어느덧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나는 그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야겠다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국경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 오고 있지 않은가? 언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차려질 것이다. 일단 아들에게 우리말부터 가르치자.

우리 집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조선족 학교가 있었는데 그곳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해야 했고 매주 월요일에 데리러 오고 금요일 오후에 데려다 준다. 학비가 많이 비쌌는데 한 학기에 4천 위안을 내야 했다.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4천 위안을 내고 그 학교에 등록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아까운 돈만 날린 격이 되어버렸다.

 

제8장 뿌리 내린 나무

 

1. 또다시 국경을 넘어

 

때는 바로 2007년 가을에 접어들었다. 남한 돈 100만 원이면 8천 위안 정도 했는데 그래서 더 남한 사람들이 중국에 사업한다고 몰려들었던 것 같다. 나는 고객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들을 수없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절대 중국에 사업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중국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외국기업에 대한 규제와 제한으로 인해 특히 소규모의 기업들도 사실 살아남기가 힘들다. 남한의 많은 중소기업들이 중국에서 망하거나 파산해서 사장들이 야반도주를 하는 일들을 많이 보아왔다. 내가 다녔던 선풍기 만드는 회사도 그렇고 그 주변의 다른 회사들도 꽤 많이 문 닫고 철수해 버렸다.

그들은 모든 설비를 그대로 둔 채 몸만 빠져나갔다. 파산 당한 회사 정문 앞에는 노동자들이 밀린 월급을 달라며 남한 사장이 도주할 수 없게 지키고 있었고 설비들은 손도 댈 수 없게 했다. 그러니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야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갑자기 환율이 폭락했다. 100만 원에 8천 위안 하던 것이 겨우 5천 위안에 불과했고 그러다 보니 사업하는데 큰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여행객들도 줄어들고 사업차 방문객들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옆집에서 살던 언니 부부가 갑자기 남한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나도 남한에 가려고 한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한식을 배운다고 코리아타운에 갔을 적에 만난 조선족 통역을 통해 탈북자들을 남한에 보내주는 브로커와 만나서 갈 생각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때는 고향에 부모님들과 동생이 살아계시는 줄 알고 언젠가는 북한으로 몰래 넘어가 부모님들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절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북한과 대결상태인 남한으로 가면 그런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남겨두고 나 혼자 갈 수 없었다. 어떻게 생긴 아들인데… 그 애는 내게 압록강에 묻고 온 맏아들의 환생이었고, 타향만리 이역 땅에서 흔들리지 않고 간난신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기둥이었다. 아들은 내 분신이다. 그러니 절대 떨어질 수 없다.

그 언니 부부와 나는 오랫동안 남한에 갈 수 있는 길을 탐색하던 중 그들과 연락이 되었다. 심지어 나도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바닥에서부터 내 손으로 하나씩 쌓아 올린 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과연 떠날 수 있을까?

남편을 남겨두고 아이만 데리고 간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까? 또 중국 남쪽 국경을 넘어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길에 또 무슨 일이 닥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특히 탈북할 때 나의 무지한 불찰로 인해 아들을 잃어야 했던 그 악몽이 막 떠올라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까 봐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중국에서 더 이상 숨어서 오래 살 수 없게 된 그 언니 부부는 아들과 함께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함께 가자며 나를 계속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남한에 꼭 가야만 한다는 것을 예감했다.

중국에서의 나의 신분은 북한 사람이어서 언제라도 잡히면 북송될 것이다. 비록 몇 년간 오래 살았어도 말이다. 나는 이런 위험을 안고 평생 중국에서 살아가느니 남한에서 당당한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너무도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자니 차마 결심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언니네가 정작 남한을 향해 길을 떠난 후부터 나는 갑자기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남한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얼마나 또 후회를 하면서 살아갈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한 환율 폭락으로 인한 여행객 감소 문제 역시 나를 남한으로 꼭 가야 한다는 부추김을 더 해주었다.

거의 열흘 동안 입맛도 없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심리적 갈등에서 헤매던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떠나자! 중국은 내 조국이 될 수 없고, 돈은 또 벌면 되지 않는가? 아들을 데리고 떠날 거야. 아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이 있으면 어느 나라든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는가?

나는 남편에게 나의 결심을 말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아내와 아들이 자기를 떠나간다는 말에 남편은 생각했던 대로 결사 반대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떠나면 절대 자기한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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