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9)

 

(지난 호에 이어)

 걸으면서 졸았다고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온밤을 새운 바람에 정말 졸면서 걸었다. 아니, 걸으면서 잤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걸음은 갈지자 모양으로 이리저리 휘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이 돌부리에 걸려서 깜짝 놀라 눈을 떳는데 내 발이 바로 낭떠러지 끝을 디디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한 발 짝만 더 앞으로 디디면 나는 낭떠러지로 바로 추락할 뻔한 순간이었다.

 30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깊은 낭떠러지에는 큰 바윗돌들이 수없이 깔려 있 어 추락하 면 그대로 죽음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여진 느낌이 들어서 정신차려 보니 눈앞에 낭떠러지 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안확인용 지금도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바로 그 찰나에 정신을 차렸는 지 정말 신이 도운 것 같다. 아마도 신이 나를 살려주려고 일부러 돌이 발에 걸리게 게 만 들었다고 믿었다. 아니 먼저 간 아들이 엄마를 도와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등골이 다 서늘하다.

 정말 나는 천운이었다. 죽을 뻔한 고비를 이렇게 또 한번 넘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다리에 맥이 풀려 그만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나는 일단 활랑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직 외통길인 이곳을 빨리 지나지 않으면 아침이 되면서 수많은 차들에 바로 노출이 될 것이다.

 밤새 걸은 거리는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학교 때 “배움의 천리길”을 걸었을 때의 경험으로 보아 8시간 넘게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으니 90리 길은 훨씬 넘는 것 같다.

시안확인용 드디어 외통길이 끝나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어떤 한족 농부 가 어깨에 바구니를 매고 걸어왔는데 나는 땅바닥에 13을 써 놓고 13도구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양팔을 길게 벌려 보이면 서 아직도 한참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가 14도구라고 한다.

 나는 빨리 걸음을 재촉하여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이 마을을 벗어날 마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마을을 벗어난다는 것이 오히려 마을 중심에 들어서고 있었고 집집마 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을 한복판을 지나오면서 어쩔 수 없이 노출되었고 동네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젠 피할 곳도 없는데 벌써 동네사람들 몇몇이 모여서 나를 가리키며 북조선 여자라고 수군거리는 것이 귓가에 들려왔다. 중국 발음으로 조선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아줌마가 대문을 막 열고 나왔는데 어쩐지 조선족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부탁했다. “아주머니, 혹시 찬밥 이라도 있으면 좀 주세요. 밤새 걸었더니 배도 고프고 여길 벗 어나고 나면 산에 숨어야 해서요.”

 그러자 그 아줌마는 차가운 눈길로 훑어보더니 쌀쌀하게 말했다. “이제 일어나서 아직 아침 을 하기 전이라 먹을 것이 하나도 없네. 딴 집에 가보지?”

 사실 나는 먹을 것보다는 당장 은신처가 필요했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어 빨리 어디론가 숨고 싶었고 또 누군가 공안에 고발하지 않고 숨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미련없이 빨리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마을은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마을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두 집을 남 겨두고 지나가는데 바로 끝집 대문이 열리면서 머리가 희슥한 여인이 나왔다.

시안확인용 모양새만 봐도 한족임을 알았지만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먹을 것 있으면 좀 주세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포기하고 또다시 발걸음을 옮 겼다.

 그런데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내가 향하는 곳은 바로 동네가 끝나고 압록강이 바로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반대 방향 아니, 북한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시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 주인 여자 가 갑자기 크게 나를 부르며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갑자기 태도를 바꾼 그가 너무 이상하여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마디 조선어만 겨우 했다.

 ”여기 온나. 빨리 온나” 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주면서 조용조용 말했다.

“빨리 온나” 나는 왠지 그리로 가야만 할 것 같은 예감에 주저 없이 그를 따라 집안에 들어갔다. 아직 미처 일어나지 않은 식구들이 급하게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치우고 부랴부랴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유창한 조선어로 물어봤다.

 “어디서 왔소?”

 너무나 깜짝 놀란 나는 아차 내가 함정에 빠졌구나 싶었다. “함경도에서 왔어요.”

 나는 그가 조선족인 줄 알고 얘기했는데 조선말을 중간정도 할 줄 아는 한족이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조선할머니가 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한 10분 정도 지나 바로 옆집에 사는 조선족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통역을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그 할머니는 이집 여주인의 사촌동생이 산동성에 살고 있는 데 아직 신부가 없다고, 그래서 혹시 그리로 시집가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나는 고민이고 뭐고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안확인용 이곳을 벗어나는 길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 막연하게 13도구에 가서 일자리나 찾아볼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갈 기회가 생겼으니 차라리 잘된 것 아닌가? 그러다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나를 팔아넘기는 건 아닌 지,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아닌지, 믿어도 괜찮은건지, 중국땅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또다시 사기를 당하거나 그러면 난 어떻게 하면 좋냐고 말이다.

 조선족 할머니는 이 집 주인 내외가 워낙 고지식하고 거짓말을 잘할 줄 모르고 선량한 사람들이니 아마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귀뜀해주었다.

 그들은 커다란 지도를 내 앞에 펼쳐보였다. 현재 있던 장백현 과 기차를 타고 2~3천 킬로그램 정도(5일 걸렸음) 달리면 산동성인데 국경과 멀리 떨어져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일단 2~3천Km 떨어진 곳이라 마음이 놓였다. 나는 망 설임 없이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리저리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통역을 하던 조선족 할머니는 마지막에 이 말을 했다. “우리집 대문이나 두드리지. 그럼 우리 조카한테 시집보낼 건데 너무 아쉽 다.”

시안확인용사실 나는 시집이라는 단어가 영 반갑지 않았지만 안전한 곳 어 느 곳이라도 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럼 나 그리로 갈래 요. 아무래도 한족보다는 조선족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이젠 늦었어. 이 집에서 벌써 자기 사촌한테 보낸다고 말을 뗐는데 내가 중간에 가로챈 걸 알면 이웃 사이가 나빠져. 한족 들은 한번 당하면 꼭 복수를 해. 주인들이 좋은 사람들이니 사 기는 아닐 거야. 가서 열심히 살고 돈을 잘 모아서 나중에 부모 들도 데려오고 형제들도 다 데려와서 중국에서 잘 살아. 그리고 내 집주소를 알려줄테니 가끔 조선말로 편지를 보내면 내가 이 부부 내외에게 통역해줄게”

 너무 고마운 할머니의 말을 들어 보니 정말 내가 부모님들을 중국에 데려올 수 있는 길이 당장 열린 것 같아 너무 기뻤다.

나는 갑자기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산에서 농사를 돕거나 벌목하는 곳에서 일하면 서 다른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다. 중국은 남자보다 여자 비율이 적어 장가 못 간 남자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북한 여자들은 그런 나이 많은 홀아비한테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강제로 인신매 매를 당해 팔려간다. 다행히도 나는 주인의 사촌동생이라고 하 니 마음이 좀 놓였다.

시안확인용 처음에는 그날 하루 자고 다음날 떠나기로 했는데 워낙 공안이 수시로 들이 닥쳐 언제 잡힐지 모르기 때문에 아침 먹고 바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주인여자는 장에 나가서 새 옷 여러 벌과 신발을 사주었다.

 내가 나이 26살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보기보다 많이 어리다며 모두 깜짝 놀랬다. 그 집에는 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 6개를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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