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으로 시작하여 자명한 원리를 추구하였던 철학자가 있었다.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그렇게 의심하여 보았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하며 자명한 원리에 도달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표현하였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철학자 파스칼(Pascal, 1623-1662)이 있다.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제로 인간의 연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명구에 인간의 존엄성을 첨부하여 표현한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이 항상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인간이 과연 언제 생각하게 되는 지를 연구하였던 철학자가 있다. 하이데커(1889-1976)이다.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평소와는 달리 어떤 익숙지 않은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사고가 깨어나 활동하는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서로를 잘 이해하며 사랑하던 맞벌이 부부가 있었다. 평상시 주중에는 부부가 제각기 직장에 가느라 집에서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해 팬데믹 기간 중 둘 다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자연히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상치 않았던 트러블이 생기게 된다.

 별것도 아닌 것에 많아진 남편의 좀스러운 잔소리를 들으며 어떤 익숙지 않은 낯섦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 부인은 생각하게 된다. ”이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아?”

 분명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예기치 않은 사건과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일상생활의 하루를 돌이켜 보자. 아침에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화장실에 가 물을 틀고 치약 칫솔을 찾아 양치질을 한다. 그때 수돗물이 안 나오면 “어, 웬일이지. 수도꼭지가 고장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때 그 순간이 하이데커가 말하려 하는 익숙지 않은 낯섦이 찾아오는 순간이며 생각을 하게 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커가 44세에 집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에는 돌, 꽃, 동물 등 만물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생각같은 것을 하며 고민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 않는다.

 단지 인간만이 사유 즉 생각을 하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자 곧 ‘현존재자’(Dasein)라고 하였다. 따라서 존재를 밝히려면 존재를 알고 있는 현존재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의 인간은 일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실현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해가며 사는 것은 아니다. 남이 하기 때문에 자기도 한다는, 유행에 휩쓸려 사는 것과 같은 생활방식을 그는 비본래적 삶이라 하였다.

 그는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최종 도착지인 죽음을 직시하는 본래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이런 말이다.

 사형수가 내일 죽을 운명이라 매순간 남아있는 시간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심정과 같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나은 기회는 없다. 무엇인가를 얻고 싶다면 기다리지 말고 지금 시작하라. 익숙지 않은 낯섦이 찾아오는 그 순간이 죽음이라는 절망에 의해 오히려 삶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된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물쭈물 살다가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알려진 말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그 묘비명은 한국에서 워낙 널리 알려져 수필 같은 글에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문에는 우물쭈물 이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번역하여 보면 "오래 살다 보면 이와 같은 일이 생길 줄 나는 알고 있었지" 물론 이와 같은 일은 죽음을 의미한다.

 번역은 잘해야 반역이라 하였다. 여기서 우물쭈물은 대단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버나드 쇼가 직역과 의역을 함께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연 우물쭈물이란 번역을 선호하리라 생각해 본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나 하이데커의 현존재의 의미함은 죽음을 직시하여 그 절망에서 삶에 대한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낱말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때 노예 한 명을 장군 옆에 태워 끊임없이 이 말을 외치게 했다 한다.

 그 이유는, 오늘은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지만 언제인가는 당신도 죽는다는 경고의 의미였다(영화 쿼바디스에 이 장면이 나온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니체의 책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파티(Fati)는 운영이란 뜻이니 ”운명을 사랑하라“로 번역된다.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는 하이데커에게 있어선 불가분의 관계로 쓰인 동격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무엇인가를 얻고 싶다면 지금 행동해야 한다. 오늘의 태양이 그대에게 마지막 태양일수도 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팔십 즈음을 눈여겨 보는 내가 되새겨본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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