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긴 아무것도 아닌 이름 없는 곳이지, 카.나.다

 

당신이 무슨 500불이나 갖고 있었어, 300불이었지. 그리고 그 당시 1974년에는 국내인이 외국에 나갈 때 소지할 수 있는 한도액이 미화 삼백 불이었지. 안심해,

자기 돈 가진것이 300불 밖에 안 된다는 것 내가 입다물면 아무도 알 수 없게 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친절한 안나씨는 고맙게도 내게 면죄부까지 주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지난주 내가 쓴 글 서두에 내가 500불만 소지한 채 김포공항을 떠났다는 글을 흘끗 보고 남긴 코멘트였다.

 안나는 내 처의 이름이다. 우리는 1974년 3월 4일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다음날 나는 예쁜 색시를 뒤에 남겨두고 캐나다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캐나다 비자는 싱글로 되어 있었고 비록 결혼식은 올렸다 해도 법적으로 미혼상태라 내가 먼저 가서 약혼자로 초청하기로 하였었다. 비자 만기일도 며칠 남지 않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 후 내 처 안나는 3개월 후에 캐나다로 오게 되며 두 젊은 연인은 토론토 공항에서 상봉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세기 말경 유럽인들은 대서양 서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인도나 중국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492년 콜롬버스가 지금의 큐바에서 원주민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 인디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많은 탐험가들이 바다를 건너 북미 대륙에 오게 되는데 그 중에 프랑스인 쟉 가르치에(Jacques Cartier)가 있다. 그는 바다를 가로질러 1535년 대서양 연안에서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내륙으로 거슬러 올라오게 된다.

바다를 건너온 범선을 탄 채로 강을 거슬러 오던 그는 강 한복판에 있는 섬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는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그는 이 급류를 중국 급류(Lachine Rapide)라 불렀다. 아마도 이 강을 더 거슬러가면 중국 땅까지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나 보다.

그 지점이 바로 현재의 몬트리올이다. 그와 선원들은 그곳에서 조그마한 옥수수 밭을 가꾸고 있던 원주민 인디언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카르치에는 한 언덕에 올라가 단풍나무 숲을 바라보며 "여기가 도대체 어디요"라고 원주민들에게 묻게 된다.

묻는 이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이 땅의 주인은 "카,나,타,"라고 대답하였다. 캐나다란 본래 의미는 "어디긴 어디야 아무데도 아니지"라는 뜻이라 한다. (영어로는 "No where"라 표현된다”)

아무튼 카르치에가 쓴 그의 일지에 따라서 아직 정복도 하지 못한 이 땅을 후세의 사람들은 캐나다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은 영국의 경험론 철학의 대가 존 로크(John Rocke)의 자연법에 근거를 둔 ”각 사람은 모두 평등하며 독립인이며,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침범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각 사람의 평등에는 흑인은 제외 되어야만 하였다.

1차 대전 후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는 한민족의 삼일운동의 절규는 제외되어 있었다. 결국 승전국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대한민국은 방관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강자들 만에 의해 쓰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작은 물살이었다 하더라도 거센 급류에 대항한 인류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노예해방을 위한 비공식 네트워크가 있었다.

"Underground Railroad”라 불려지던 노예 폐지 주의 자들의 비밀 결사단체이다. 목적은 미국 남부에서 탈주한 흑인들을 무사히 캐나다나 미국 북부 안전 지역으로 탈출시키는 데에 있었다. 점 조직으로 운영되었던 이 운동에 의해 거의 4만 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이 캐나다 등 안전 지역에서 정착하게 된다.

비록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실패 하였지만 1919년 3월1일에 터진 슬픈 민족의 절규는 그 후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디딤돌로써 연결된다.

 단기와 서기가 있다. 단기는 고조선의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운 해부터 내려온 햇수이다. 금년이 서기 2022년이면 단기로는 4355년이 된다. 결국 같은 언어와 풍습을 가진 단일민족이 같은 장소에서 4천년 이상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비록 지금은 작은 한반도 땅덩어리마저 남북으로 갈라져있지만 한 때는 부여, 발해, 고구려 등 만주 벌판이 우리 땅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민족은 1970년대 후반부터 불어온 디지털 혁명으로 20년 후에는 IT강국으로 발돋움 삼아 경제 10대국이 된다. 기적이다. 아니 한국인 만이 해낼 수 있는 저력이다.

캐나다의 한국인 이민역사는 1967년 이후 야심의 젊은 정치가 피엘 트루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 긴 역사라 할 수는 없다. 애니메이션 영화 Frozen

의 겨울왕국 만큼 춥지는 않더라도 이 추운 지방에서 이민 1세대는 잘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조국 대한민국에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우리가 고국에 무엇인가를 보여줄 때이다. 조국 대한민국은 거기 그렇게 우리의 자긍심으로 있어만 주면 된다.

자 이곳 이름 없는 땅(No Where)이라는 의미로 불려졌던 캐나다에 씨알을 뿌려 꿈나무를 심자. 그 꿈나무는 멀리가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당신들의 2세, 3세 그리고 앞으로 계속 있을 세대(Generation)들이 우리들의 희망의 꿈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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