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철도, 철마 이야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였던 36년간 많은 혜택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특히, 철도건설에 있어서 일본이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말한다. 시기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와 겹치는 점이 있기는 하나, 일본제국은 절대 한반도의 한민족을 위해 철도를 건설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전쟁은 보급이라는 구호 아래 철도가 보급에 최우선책이라는 것을 각성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 덕분에 일제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여러 곳에 철도를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물자보급과 더불어 호남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들이 많이 생겼으며, 호남선의 주된 목적은 호남지방의 곡물들을 빠르게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제일 목표였다.

 

1887년, 주미공사 박정양이 워싱톤 D.C에 부임하여 근무한 이후 고종과 한반도 철도산업을 논의한다. 1887년 2월9일에는 조선왕조가 임명한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E.Frazer)가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신설 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내고 이에 1888년 10월 경인선 설치를 미국에 제안하였다. 1892년 3월 고종은 주한 미국전권공사였던 제임스 모스(James R.Moss)와 철도창설 조약을 체결했으나, 일본정부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게 된다. 그 결과, 일본은 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려워 철도 대금을 회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을 유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투자자들이 투자하였던 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제임스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된다. 1898년 5월10일, 경인선은 당시 1백만 달러(170만 52원75전)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돼 버린다. 뒤이어 경부선과 경의선의 부설권도 일본에게 넘어가며 일본의 의도대로 철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비록 무능한 통치자로 각인되어 있는 고종의 조선이었지만 그래도 철도산업을 시도한 1887년은 절대 늦은 출발이라 할 수 없다.  

 

서부개척시대(Wild West Period)는 1850년대부터 1890년경까지 미국이 서부지역 프론티어를 개척하던 시기를 말한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러시(Gold Rush)가 그 개척을 부채질하며, 1869년에는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된다. 이 철도의 개통이야말로 서부 개척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주민들이 황금을 찾아 나서거나 정착을 위해 자리 잡으려고 하던 땅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던 주인이 있는 땅이었다. 백인들이 정착한 초기부터 미합중국의 기틀이 튼튼해지기까지의 시간은 미국 원주민들의 공동체가 소멸해 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결정적인 쐐기를 박은 것은 철도건설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있어서 자연은 그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삶의 방편이었다. 당연히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의 충돌은 필연적인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미국의 원주민들은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강탈하는 야만인들이 아니었으나 그 점이 그들의 약점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링컨은 젊은 시절 가게점원, 뱃사공, 우체국 일까지 온갖 고생을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변호사를 했는데 변변한 학벌이 없는 상황에서 2류 변호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기회가 오게 된다. 1857년 한 건설회사가 미시시피강을 건너는 철교를 건설했는데 증기선이 철교의 교각을 들이받아 불에 타 가라앉는 사건이 발생했다. 증기선 선장은 철도회사를 고소했고 이 재판에서 철도회사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링컨 변호사였다. 강물의 속도와 교각의 각도를 면밀히 조사한 뒤 배가 충돌한 이유는 조타수의 실수라는 그의 주장과, 또한 운하의 배를 위해 철교를 해체하게 되면 국가의 손실이라는 그의 주장이 배심원들에게 받아들여져 링컨이 변호한 철도회사가 승소하게 된다.
링컨은 철도가 신생국 아메리카를 세우는 가장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859년8월14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링컨은 아이오와주 블러프스에서 ‘닷지’라는 성을 가진 한 청년을 만나게 되고, 서부로 가는 철로는 위도 42도 그곳 블러프스에서 출발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안전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사후 4년, 1869년,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된다.

 

일본의 남만철도는 만주를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지나가고, 러시아의 동청철도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나갔다. 이 두 노선이 만나는 지점이 하얼빈역이었다. 이곳에서 1905년 초대 조선통감을 지내다가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었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 체프를 만나 만주지역에서 세력권을 분할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철도 문제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 회담은 시작하기도 전에 무산된다. 왜냐 하면, 그는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아령지구 안중근 특파대장’에게 사살당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대한의군참모총장은 작전이 성공한 후 적군에 회부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그 날은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 아래에 있던 상태였다. 안중근 의사는 이 때 조선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등박문을 제거함으로써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불법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서구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과 일본이 한국에 가한 차이점은,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여 사회, 경제적 수탈과 함께 지구상에서 한국민족을 말살시키려 하였던 점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어느 국가도 요구하지 않았던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한국어 사용을 억제하였다. 
일본은, 달리는 철도, 철마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무참히 짓밟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잊지 말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을!
2024년 2월11일.

 

참조: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저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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