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퀘벡 만세(Vive le Quebec libre!)

 

1492년 8월3일, 콜롬버스는 스페인을 떠나 대서양을 서쪽 방향으로 항해하여 10월12일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로부터 43년 후 1535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는 대서양의 넓은 하구로부터 세인트 로렌스강을 타고 내륙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바다를 건너온 범선으로 항해 하던 중 강 한복판에 있는 섬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는 급류의 목에 닿게 된다.

 

그 지점이 지금의 몬트리올이다. 그 곳에서 배를 내리는데 카르티에는 선원들과 함께 소수의 인디언들과 만나게 된다.  당연히 그는 프랑스말로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것이고, 인디언들에 의해 “Kanata"라는 현재 캐나다(Canada) 국가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Kana:ta"의 의미는 토지의 개념으로서 모악(Mohawk) 언어로 ‘서로의 책임지어야 할 공동체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몬트리올에서 서쪽 외곽지역에 ‘타운 오브 몬트리올 웨스트’라는 지역이 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영어권으로 퀘벡주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주민 비율이 가장 높다. 그곳에서 이민 초기인 1976년부터 4년여 간 친형님과 함께 "Fruit Bowl"이란 상호명의 청과업을 경영한 적이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해이며, 정치적으로는 캐나다와 분리하여 독립하려는 르네 레베크(Rene Le`vegue)가 이끄는 퀘벡당이 입법부 110개의 의석 중 71석을 차지하면서 집권당이 되었던 때였다. 당시는 프랑스어만 공용어로 사용이 허용되었던 때라 “Fruit Bowl”이라는 상호명이 도마에 오르게 된다. 등록된 상호명인데 왜 바꿔야 만 하느냐고 물으니까 영어는 무조건 불어로 번역해서 간판을 다시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이다. 할 수 없이 간판을 내렸더니 오히려 영어권 주민들이 반색하며 간판을 달지 말라고까지 후원해 주며 뜻밖에 성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르네 레베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CBC, 라디오캐나다 종군기자로 참전해 한국과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1492년 8월3일 콜롬버스는 스페인 까디즈를 떠나 대서양을 서쪽방향으로 항해하여 10월12일 지금의 바하마제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새로 발견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의견이 엇갈리게 된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교황칙서(Papal Bull)이다. 이 칙서를 등에 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새로 발견한 땅들을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이러한 언어도단의 작태는 이교도와 타인종을 자신들과 같은 크리스챤에 기반을 둔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남미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각축전이었다면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아메리카대륙은 영국과 프랑스의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1543년, 퀘벡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뉴프랑스"라는 이름으로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러나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진행되었던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1763년 파리강화조약에서 퀘벡을 포함한 캐나다의 통치권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먼저 캐나다를 발견하여 이주한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나중에 이주한 영국계 캐나다인들 사이에는 끊임 없는 갈등의 불꽃이 피어나게 된다.

 

1960년대부터는 퀘벡주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분리 독립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고, 1968년에는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나섰던 르네 레베크를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한 퀘벡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러한 분리독립의 열기를 막기 위해 1969년 당시 연방 총리였던 피엘 트뤼도는 프랑스어를 영어의 지위와 똑같이 격상시키는 공용어법을 제정하게 된다.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가 열리던 당시, 시청앞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은 발코니에 나서 연설을 했다.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관중을 보면서 마치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입성할 때를 연상할 수 있었던 말로 시작된 연설은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자유로운 퀘벡 만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로 길고 긴 만세 열창 후, 열광적인 환호로 끝을 맺게 된다.

하지만, 퀘벡의 캐나다 자국 문제를 세계에 널리 알리게 한 이 사건으로 인해 캐나다와 프랑스의 외교는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후 "자유 퀘벡 만세" 구호는 퀘벡 분리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구호가 된다.

 

카르티에가 500여 년 전 만난 인디언은 생전 처음 본 유럽인의 물음에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은 "카,나,타"(Kanata)라고 되풀이해서 말하였다. 누구에게 딱히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땅을 알고 책임질 수 있는 모든 정착자의 꿈의 토지(Dreamland)라 하였다.

미국은 미국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문화를 용광로와 같이 한 덩어리로 용해시켜 미국권 문화로 만드는 용광로 사회라 할 수 있다.

반면 캐나다는 모자이크 사회인 복합문화주의 국가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척 초기부터 다문화 구성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국계와 프랑스계 사이의 식민지 쟁탈격전지였다. 복합문화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전쟁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모자이크사회인 복합문화주의가 근래 들어 위협을 받고 있다.

 

퀘벡주정부는 지난 10월13일, 퀘벡주의 영어권 대학인 맥길, 콩코르디아, 비숍 등에 퀘벡주가 아닌 타주의 학생들이 등록하는 경우 2024년 가을학기부터 기존 등록금 $8,992에서 거의 두 배인 $17,000로 인상한다고 발표하였다.      

온타리오를 포함하여 타주의 학생들이 영어권 대학인 맥길, 콩코르디아, 비숍에 등록하는 경우 학비를 2배로 올린다는 이와 같은 조치는 몬트리올 시장을 비롯한 많은 프랑스계 지식인들마저 반감을 갖는 근시안적인 입법조치라 할 수 있다. 프랑스어 사용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이유를 내걸지만 우물 안 개구리의 안목이라 할 수 있다.

 

퀘벡 분리운동이 활성화 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몬트리올은 토론토를 제치고 캐나다의 최대도시였다. 올림픽은 물론 메이저리그야구팀인 ‘몬트리올 엑스포스’도 ‘토론토 블루제이스’보다 먼저 창단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퀘벡 방문 후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한 분리운동은 퀘벡주를 온타리오주보다 낙후하게 만들었다.

 

드골 대통령의 역사적인 역할은 2차 대전 프랑스 자유군의 후신인 임시정부의 수반으로서 파리 입성 승리의 행진을 하여 전후 승전국의 발판을 쌓게 했다지만, 거기까지다. 이미 캐나다라는 나라의 퀘벡주에서 잘 살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자유 퀘벡 만세"라는 구호로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 왜 맥아더 장군이 고별 연설의 끝말을 이 표현으로 대신하였는지 알 것 같다. (군인은 군인으로)

2023년 10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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