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윤봉길-

 

1932년 4월29일, 상해 임시정부

윤봉길: 선생님, 이 시계는 제가 어제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과 바꾸시지요. 제게 이 시계는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김구 선생: 윤 동지, 훗날 지하에서 다시 만납시다.(김구 주석은 시계를 교환한 후 목쉰 목소리로 이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날 오전 11시 40분,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수뇌부가 도열해 있는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여 폭음과 함께 식장을 아수라 장으로 만들 수 있었다. 폭탄은 그대로 폭발하여 일본군 수뇌부들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게 된다. 사망자 중엔 사령관 백천 대장도 있었다.

13년 후 1945년 4월 29일, 중경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시계를 다시 꺼내게 된다.

많은 대한민국의 학도병들이 징집되어 대 동아전쟁, 태평양 전쟁에 일본 군인으로 연합군과의 전쟁에 투입되게 된다. 그 중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의 독립군으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도달한 30여 명의 학도병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전략 첩보부대(OSS)의 일원이 되어 특수한 훈련을 받기 위해 "서안"으로 떠나기 위해 모여 있던 “대한의 남아들"이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훈련 목적은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의 예비 공작대원들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후방교란의 발판지를 조성하여 상륙부대와의 유대를 위해 사지로 가는 결사대를 자원한 젊은이들이었다.

김구 선생: 이 시계는 13년 전 4월29일 오늘과 같은 날, 윤봉길 의사를 적지에 보낼 때 의사께서 저와 바꿔가진 시계입니다. 다시 저는 여러분들을 죽음의 장소로 보내는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작별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윤의사의 눈망울이 이제 여러분들의 눈동자로 변모하여 내게 빛나고 있소.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이 정한 뜻인가 보오. 저 작열하는 아시아의 태양 아래에서 여러분들로부터 애국의 젊음을 배웁니다.

과묵한 김구 주석이었지만 노 혁명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침투 작전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경 무기로 무장된 우리 대원들이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첩보활동, 정보송신 그리고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 공작을 수행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또한, 국내 교란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은 공중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작전계획은 1944년 겨울에 이미 “연합군 중국 전구 사령부"를 거쳐 미 국방성의 승인을 받은 작전이었다. 1945년 8월 여름 그 당시는, 지옥과 같은 100여 일에 걸친 훈련을 완수한 한국 OSS 대원들은 출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던 때였다. 한국군 정진대 사령관은 이범석 장군이었으며 그 대원 중에는 장준하, 김준협, 나능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1945년 8월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조건 없이 받아 들인다는 발표가 있은 후 극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따라서 8월14일 중국 거주 미군 사령부는 미군 포로 인수 등 인수 진주를 위한 기초작업의 선발대를 결성하게 된다. 미군 22명과 한국 특수부대 이범석 장군을 필두로 김준혁, 장준하, 노능서 등 28명은 중국 서안기지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같은 날 아침 동경만에 진입하던 미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상부의 귀환 명령으로 그 기수를 돌려서 "서안"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그래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8일 새벽, 일본 천황의 완전 항복 굴복 선언이 있은 3일 후 한국 정진대 사령관 이범석 장군과 김준혁, 장준하, 노능서 등 4명과 미군을 포함한 22명은 다시 "서안 기지"를 떠나 11시경 서울 여의도에 안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직 무장해제가 안된 일군들의 소동이 있어 막중한 임무를 착수하지도 못하고 중국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민족 자결주의는 1918년 1월8일,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1차 대전 종결을 앞두고 의회에서 발표한 평화 원칙에서 제시되었다. 하지만, 그 주장이 명시하는 바가 세계 평화적이고 좋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할지라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 및 중동에서 여러 나라들이 독립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나 대한민국은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 자결주의”라는 마력같은 메세지는 이씨 조선 오백여 년 잠들어있던 독특한 한국인만의 이성과 야성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충분한 자극제가 될 수 있었다. 1919년 3월1일, 합방된 지 9년 만에 망국의 설음에 잠겨있던 국민들은 삼일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비록 자주 독립의 성과는 얻지 못하였지만 그 운동은 상해 임시정부 설립으로 직결될 수 있었다.

불과 36시간 정도 윤봉길 의사의 품 안에 있던 회중시계는 이제 "의사"의 유품이기도 하며 “김구 선생"의 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두 개(?)의 시계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자주 독립으로 향하는 염원이었다!

비록 분단된 조국이지만 순국 선열의 울부짖음은 우리들의 귓가에서 한 울음이 되어 맴돌고 있다. (2023년 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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