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성취의 비법

 

독일 출신으로 보수적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폴 틸리히는 ‘문화 신학자’라고 불린다. 그는 평생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학방법론은 ‘상관’이란 단어로 정의되는데, 철학과 신학, 문화와 종교를 이분법으로 나누기 보다 양측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 베를린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유대인 탄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나치정권에 해직된 뒤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경향인지도 모른다.

 

 틸리히가 쓴 책 ‘문화의 신학’은 현대 교회에 만연해 있는 가치관을 직격한다. 세속문화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거나 또는 종교를 특수한 영역, 거룩한 것으로만 여기고 세상과 구별하려는 태도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교회가 문화 안에 있으며, 오히려 세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소통’을 다루고 있다. 결국 복음을 소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참된 결단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속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며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다. ‘종교로서’ 기독교와 세상은 뼈에 살이 붙어 있는 것처럼 한 몸이다.

이것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한국 기독교 일각의 움직임, 소위 ‘보수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유통일’ 또는 ‘기독교 입국론’을 외치는 세력이다.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북한 김정은 정권 해제 등을 주장한다. 종교를 정치화해서, 또는 정치를 종교화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이라는 정치, 국가체제를 한국기독교와 분리하지 말고 양측의 조정과 중재를 통해 한국사회가 복음화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끌어내 김정은 정권 아래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북한으로 복음이 흘러가는 길을 열자는 뜻이다.

 

복음은 북한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

단, 사람들이 ‘자유’나 ‘민주주의’, ‘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복음을 들먹일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평안과 육신의 안달을 위한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초대교회를 돌아보고, 현재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보수’만 그런가. 소위 기독교 안에 진보라는 세력은 세상과 아예 잡탕, 짬뽕이 됐다. 다원주의니, 통합이니 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스스로 허물어 버렸다. 

 

틸리히는 종교의 정의를 ‘인간 정신생활의 한 차원’이라고 한 다음 그것은 ‘감정’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틸리히가 말한 그 감정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한 몸이 된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나 자신을 신으로 떠받드는’ 소원성취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야기 중에서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등을 “역사적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명확한 전설”이라고 치부했다. 성경을 누군가 꾸며낸 전설 같은 이야기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명한 신학자가 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20층이 넘는 사옥의 4층에는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하루는 1층 로비까지 들릴 정도로 짝짝짝짝 박수 리듬에 맞춘 찬송가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건물 입구에서부터 행사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들려온 찬송가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이단사이비 신도들이었다.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틸리히가 말했던 복음은 어떤 것이고, 소위 기독교가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들먹이고, 신학의 각종 교리를 그럴 듯하게 읊어대도, 신학자라는,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도, 그들이 외치는 것이 진짜 복음인가에 대한 고민은 도저히 중단할 수 없다.

틸리히는 복음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인간의 결단’으로 보았다. 인간에게 복음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부자 이야기’를 했는데, 틸리히도 그런 면에서 부자 청년이었고, 소출을 많이 낸 어리석은 부자였다. ‘하나님께서 흘린 피’가 아닌 ‘자신의 결심과 노력’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런 기독교는 진짜 기독교가 아니다. 진짜 교회는 세상에서 뽑혀져 나온 자들이다. 인간의 결단이 아니다.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에 힘입어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머물게 되는 자들이 진짜 기독교다. 그들은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살이 뼈에서 발라지는 것 같은,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종교인)은 표적을 바라고, 헬라인(철학자)은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고린도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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