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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토의 아름다운 세상

    반갑습니다. 먼타향에서 산지가 벌써 26년이상이 되었군요....

    오늘 어느분의 글을 읽으면서 ........

    말이란 늘 조심해야 한다♡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반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털어놓는 사람은 화를 당하기 쉽다.말을 잘하면 유익하나 잘못하면 화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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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이제 두고 보시요. 2백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고 5백년 뒤에는 흉년이 들어  온 백성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에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움을 벌인 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힘 겨루기였다. 무학은 한양 정도의 정확한 위치 문제를 놓고 정도전에게 젔으나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하였다. 무학의 예언은 확실하게 적중하였다.  이성계가 개국을 한 것이 1392년이었는데 정확히 200년 뒤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저서 왜군이 한양을 유린하였고 그 전쟁은 7년간이나 계속되였다. 그리고 500년 뒤인 한말에는 백성들이 굶거나 배가 고파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드디어 나라까지 망했다. 무학의 눈은 정확하였다.


   경복궁 자리는 학의 등에 해당되는 곳이라 궁궐을 지으면 이내 기둥이 쓰러지는 자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무학은 정도전과 몇번을 우기다가 거듭되는 실패에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한양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용문사로 가는 도중 지금의 전농동을 지나 가는데 소를 몰고 받갈이를 하는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소를 보고  “이 놈의 소가 무학이처럼 미련한 놈이구나.”했다.



  이 소리를 듣고 무학은 농부에게 다가가서  “왜 무학을 미련하다 하시요?”하고 물으니 농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을 해 보시오. 이 바닥에는 한양터가 학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무학이 하나만 모르고 학의 등에다가 궁궐을 짓고 있으니 학이 날개를 펴고 퍼득거리면 집이 무너지고 마는거요” 라고 하였다.



  무학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물으니 농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이 양반아! 그걸 몰라요? 먼저 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학이 날개를 펴고 날 수가 없게 된다 그 말입니다.” 하는 것이였다. 이 말을 하고 잠시 후에 뒤를 돌아다 보니 그 농부는 아니 보였다고 한다. 이 농부는 사람이 아니라 둔갑을 한 삼각산의 산신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궁궐을 지으면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삼각산이 노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삼각산과 목멱산(南山)에 국사당을 짓고 서울의 안녕질서를 빌게 되였다고 한다. 국사당은 일제에 의해 헐린채 지금까지 복원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 때에 무학은 농부의 말을 듣고 서울로 되돌아 섰다. 그리고 즉각 도성부터 쌓고 궁궐을 후에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려의 國師가 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王師가 된 풍운의 사나이. 무학은 현실정치의 중심에 서있는 듯 아니면 비켜 가는 듯, 시대의 일대 변환기 한가운데서 특이한 역정을 걸어 나갔다. TV 역사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조 이성계를 돕고 다시 태종 이방원을 돕는 무학대사. 정권교체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처세 잘못으로 화를 입고 끝을 맺었지만 무학대사는 양보적이고 신중한 처세술로 두 임금에게 모두 사랑을 받고 생애를 마감할 수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는 무학의 겸손이었고 대화법의 귀감이었다.
 

  무학대사.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라 했다. 朴自超. 좀 이상한 이름이다. 無學이라는 僧名 또한 특이하다. 고향은 경상도 삼기군 삼가면(오늘의 합천읍)이었고,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아버지 朴仁一과 어머니 蔡씨 사이에서 태여 났다.  태조 이성계보다  8살 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출생의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설이 전국적으로 퍼저 있다. 금강산의 어느 절에서 내려 오는 전설에 의하면 무학은 부모없이 자란 고아였다고 한다. 사연인즉 한 늙은 선비가 장가 든 아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 청상과부 며느리와 한 집에서 살게 되였다. 어떻게 하면 손자를 볼 수가 있을가 하고 생각을 하던 이 선비는 며느리에게 절에 가서 100일 기도를 드림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시아버지의 말대로 절에 들어가서 백일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 왔다. 먹음직 스러운 천도 복숭아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집어 먹었는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동네에 망칙스러운 소문이 났다. 시애비를 붙어서 낳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아이를 몰래 버리기로 하였는데 아이를 버린 이튼날 현장에 가 보니 학이 날아 오르고 그 밑에 아이가 방긋이 웃고 있더라는 것이다.  시아비와 며느리는 더 이상 아이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생설화 말고도 무학에게는 너무도 많은 전설이 따라 다닌다.


  18세 때에 천재소년 무학은 홀연히 집을 나가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다.  이곳에서 혜명국사의 사사를 받은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어느날 새볔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닫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20세 때 부터는 높은 스승을 찾아 산사를 돌아 다녔는데 별로 존경스러운 스승을 만나지 못하여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작심하였다.  그 때에 중국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였다. 26세가 되었을 때에, 1353년 공민왕 2년, 무학은 원나라에 들어가서 뜻밖에 조선의 유학생 나옹선사를 만났다. 그는 무학을 한눈에 알아 보고 장차 큰 일을 할 인물로 점 찍었다.



  나옹은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전남 승주의 송광사에서 자리잡게 되였고 무학은 귀국하여 경기도 여주 고달산에 들어가서 조그마한 암자에 머물렀다. 그 당시 나옹은 경기도 양주에 크게 회암사를 짓고 낙성식에서 무학을 초대하여 고려의 국사가 되여 달라고 청하였으나 무학은 이를 거절하였다.
고려의 멸망을 알아 차렸기 때문인지, 무학은 고려국사를 사양하고 후에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가 된 것이다.



  60세가 훨씬 넘은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 11일 왕사로 임명되였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하였다. 그렇지만 무학이 이성계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 된 일이었다. 여기에서  또 전설같은 이야기 몇을 더 소개한다.


   이성계가 20세 때에 아버지 환조가 죽었는데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에 마침 중 두 사람이 함흥땅을 지나가게 되였는데 뛰어난 산세를 보고 임금이 난다는 흥왕지지(興王之地)의 명당자리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 대화를 이성계의 집종이 듣고 있다가 급히 집에 가서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어서 빨리 가서 그 두 스님을 모셔 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환조의 묘를 쓰게 되였는데 이 두 분이 바로 스승 나옹과 제자 무학대사였든 것이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무학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서 살고 있을 때에, 이성계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일만 마리가 넘는 닭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일천여호가  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 찧는 소리가 쿵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저 가는 집에 들어 가서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젔다는 것이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성계는 먼저 이웃 마을의 점쟁이 노파를 찾아 갔다. 노파는 “여인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그 꿈을 해몽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설봉산 토굴에서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神僧 무학에게 가시면 풀이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무학은 “당신이 찾아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고는예견을 했다는 듯이 해몽을 시작하였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일만여호에서 닭이 울고, 일천여호에서 방아소리가 난 것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 집에서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온 것은 바로 귀하신 임금 왕(王)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짐은 곧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지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젔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이야기 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오. 큰 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대로 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무학의 예언에 큰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집권을 한 후에 숭유억불정책을 썼다. 정도전과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는 일로 마찰이 있었지만 무학은 늘 겸손으로 화를 빗겨 갔다. 또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과의 불화로 소위 “함흥차사” 사건이 일어 났을 때에도 무학은 그의 지혜로 두 임금의 매듭을 잘 풀어 갔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태조가 실망하여 함흥으로 떠났다. 그 때에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모셔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보내는 사신마다 죽어서 돌아왔다. 그때에 누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무학대사를 보내면 능히 태상왕을 모셔 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했다.


  무학은 태종의 부탁을 받고 함흥에 갔다. 태조는 무학을 보자 진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왕사까지 이러십니까? 방원이란 놈의 부탁을 받고 나를 보러 왔지요?” 무학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다지도 이 소승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빈도(貧道)가 전하를 한 두 해 모셨습니까? 전하와 혜여진지가 너무 오래다 보니 그리운 마음 그지 없기에 전하를 위로하러 머나먼 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용안을 뵈오니 저의 마음이 한없이 기쁩니다”  그제서야 태조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함께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지혜로 무학은 태조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고 함흥차사의 고리를 풀었다.


   1405년, 78세, 법랍 62세로 무학대사는 금강산 금강암 에서 입적하였다.  무학의 입적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하였다. 회암사에는 앞서 태조가 무학을 위하여 세워둔 부도가 있다(보물 388호).  지금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는 넓고 큰 절터만이 그 옛날 태조와 무학의 고사를 증언하며 고승 지공과 나옹스님의 석탑이 무성한 절터의 잡초에 싸여 있다.*

(강신봉 역사이야기18)

[캐나다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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