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이 전투 (Battle of Cannae,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는 군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술로 평가되며, 병력 수에서 로마군이 약 8만 명으로 카르타고군 약 5만 명보다 훨씬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로 알려젔다. 1. 전술 배치와 로마군의 의도 로마군의 의도: 로마군은 병력 수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앙에 보병을 두텁게 배치하여 카르타고 전열을 힘으로 돌파(Punch Through)하여 섬멸하려 했다. 한니발의 함정 배치: 한니발은 로마군의 이러한 생각을 역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열을 배치했다. 중앙: 전투력이 비교적 약한 갈리아-히스파니아 보병을 초승달 모양(돌출된 형태)으로 전진 배치했다. 이들에게는 서서히 후퇴하며 로마군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임무가 주어졌다. 양익 보병: 중앙군 양옆에는 최정예 아프리카 보병을 배치하여 로마군이 중앙으로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꿈쩍 않고 버티게 했다 (이들이 포위의 '정지 축' 역할을 했다). 양익 기병: 좌익에는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에스파냐-갈리아 중기병을 배치해 로마 기병을 분쇄하는 임무를, 우익에는 경량의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다. 2. 전투 과정 (이중 포위의 완성) 기병전 승리: 전투가 시작되자 한니발의 좌익 기병대가 로마의 기병을 빠르게 격파하고 전장을 이탈시켰다. 이후 이들은 로마 보병의 후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열을 재정비하고 우익 기병과 합류했다. 중앙 돌파 유도: 로마군 중앙의 중장 보병은 수적 우위를 믿고 한니발의 중앙군(초승달 대형)을 맹렬히 공격했다. 카르타고의 중앙군이 계획적으로 후퇴하자 로마군은 승리에 도취되어 중앙으로 점점 더 깊숙이, 밀집하여 전진했다. (이때 로마군은 밀집도로 인해 공격과 후퇴이동이 모두 어려워졌다.) 포위망 완성: 로마군이 충분히 깊숙이 들어와 양옆의 아프리카 정예 보병 대열에 도달했을 때, 이 정예 부대들이 양옆에서 방향을 틀어 로마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후방 봉쇄와 섬멸: 결정적인 순간, 전장 이탈 후 우회했던 카르타고의 기병대가 로마군의 후방으로 돌입하면서 포위망을 완전히 봉쇄했다. 8만 명의 로마군은 사방이 막힌 채 밀집된 대형 속에서 무력하게 학살되었으며, 약 7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과 동맹군이 전사했다. 칸나이 전투는 단순히 날개를 펼치는 고전적 포위 전술인 학익진을 넘어선다. 학익진은 일렬행대로 배치된 진영을 전진하며 학의 양날개모양으로 적을 포위하는 전술로 알려젔다. 한니발 전술의 핵심은의도된 중앙 후퇴와 강력한 기병의 완벽한 측면 돌파 후 후방 봉쇄라는 세련된 메커니즘을 결합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위 섬멸전(Annihilation)의 교본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자마 전투 (Battle of Zama,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한니발의 생애에서 유일한 대규모 패전이다. 한니발의 군사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새로운 전술과 카르타고 군대의 질적 열세가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1. 전술 배치와 전력 차이 카르타고군 배치: 한니발은 세 개의 대열을 배치했다. 선봉: 약 80마리의 전투 코끼리 배치. 2선: 전력이 약한 용병과 카르타고 시민병(질적 열세). 3선: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정예 베테랑 부대 (후방에 배치하여 마지막 일격을 준비). 기병 열세: 누미디아 기병의 배신으로 기병 전력에서 로마군에 압도적으로 밀렸다. 로마군 배치 (스키피오의 혁신):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강점과 코끼리 전술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진형을 짰다. 기병 우위: 누미디아의 지도자 마시니사의 기병 연합으로 압도적인 기병 우위를 확보하고 양익에 배치. 코끼리 대응 진형: 보병 대열을 통상적인 빽빽한 형태 대신 소대 간격을 넓게 벌린 열형태로 배치했다. 이 빈 공간을 경장 보병이 채우고, 코끼리가 돌격해 오면 경장 보병이 뒤로 빠지면서 코끼리가 대열 사이의 통로로 지나가게 유도했다. 2. 전투 과정과 한니발의 패배 코끼리 전술 무력화: 코끼리 부대가 돌격했으나, 스키피오의 통로 진형(Corridors) 전술에 의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측면으로 유도되어 무력화되거나 로마군의 투창 세례를 받았다. 기병전 패배: 수적 우위를 가진 로마-누미디아 연합 기병대가 카르타고 기병대를 쉽게 격파하고, 칸나이 전투와 마찬가지로 적 보병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전장을 우회했습니다. 이로써 한니발은 결정적인 기병 지원을 잃었다. 보병전 돌파: 로마 보병이 카르타고의 2선과 3선을 격파하며 한니발의 정예 4선 부대와 마주쳤다. 한니발의 베테랑 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이때 스키피오의 기병대가 후방으로 돌아와 한니발의 정예 부대를 포위 공격했다. 최후의 패배: 기병의 완벽한 포위로 인해 한니발의 정예 부대는 붕괴되었고, 한니발은 유일하게 패배한 이 전투를 끝으로 로마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기병을 이용한 포위 섬멸)을 연구하고 그대로 활용하여 한니발을 격파하는 역설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자마 전투(Battle of Zama, 기원전 202년)에서 한니발이 패배한 이유는 단순히 전술적인 실수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누적된 카르타고의 전략적, 구조적 경제적 취약점과 경제강대국 로마의 전격적인 지지로 정예병 훈련을 가능하게 할수 있었던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대응 전술이 결합된 결과다.
현충일은 감사표시의 날 빨란 리본에 뜨거운 열기를 얹는다 Updated -- Nov 11 2025 03:30 PM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mail protected]) 한국전 전몰 캐나다용사 516명 기리는 기회 임정남(전 무궁화사랑모임 회장) 2022년 무궁화사랑모임 회원들이 제임스가든 이상온동산에서 무궁화나무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매년 11월이 오면 가슴이 설레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 바로 무궁화사랑모임에서 열고 있는 현충일 행사입니다 토론토에서 유명한 제임스가든에는 2010년 무궁화 50그루를 심은 이상온 무궁화동산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유명 공원에 무궁화동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벅차고 신나는지 모릅니다. 매년 캐나다 현충일(11월11일)이 찾아오면 한국전에서 전사한 캐나다 군인 516분의 영혼을 기리는 리본 516개를 무궁화나무에 달아 놓고 기념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빨간 리본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또한 교민들이 참여하여 리본을 다는 모습 또한 매우 흐뭇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공원을 찾는 방문객들은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한국전 참전 회생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는 행사라고 설명하면 모두 놀라고 감탄하며 ‘땡큐, 땡큐’를 연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캐네디언 중년 여인이 무궁화동산 앞에 서더니 마구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것입니다. 영문을 몰라 "왜 그러세요?“라고 물으니 “우리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고맙기도 하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그 소리를 듣자 반가움과 고마움으로 저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순간 나는 그녀를 포옹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해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또 한번은 할머니 두 분이 행사장 앞에 와서 이상히 여기기에 “한국전에 희생하신 캐다나군 516명의 영혼을 기리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땡큐, 땡큐”를 반복하며 저를 꼭 껴안아주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현충일 행사 시설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지나던 두 여인이 다가와 “무얼 하세요?”라고 묻기에 “한국전에서 희생된 캐나다 참전용사들을 위해 516개의 리본을 달았는데 오늘 치우는 중입니다”라고 답했더니 “고맙다”며 일을 거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고마움이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무궁화사랑모임의 현충일 행사는 올해로 15주년을 맞습니다. 공원에서 행사를 하려면 우선 신고를 해야 하는데 미리 알리는 일도 어렵고 너무 와도 큰 걱정이었습니다. 30명 이상 모이면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잘못돼 행사 불허를 당할까 그간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무사히 잘 해왔고 이제는 공원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성원해줍니다. 그런데 아주 가슴을 태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토론토 많은 공원에 무궁화동산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김병선 전 회장의 발품으로 이뤄졌습니다. 무궁화가 한국의 국화라는 것이 알려지자 토론토 공원국에서 큰 문제가 돼 토론이 열렸다고 했을 때 정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한국의 국화이지만 한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묵인해주었다는 소식에 다행으로 여겨졌습니다. 2회 때는 가족 캠핑장에서 새벽에 몰래 빠져나오다 들켜 혼쭐이 났습니다. 그 당시 리본을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없으면 행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일을 생각하면 진땀이 납니다. 작은 행사이지만 한인회장, 국회의원, 노인회장, 총영사관, 평통 등 각계의 인사들이 참석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참여 인원이 40명 내외에 그쳐 허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14회 때는 70여 명을 기록, 기쁘기도 했지만 올해는 100명을 넘어 500명, 1천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봅니다. 그동안 참여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편집자 주: 무궁화사랑모임의 현충일 행사는 10일 이토비코 제임스가든(99 Edenbridge Dr.) 내 이상온 무궁화동산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폭설, 도로사정 악화 등으로 취소됐다.】
더글러스 A. 어윈 약력 어윈 교수는 현재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의 경제학 교수이자 정치경제 프로젝트의 공동 이사직을 맡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에서 무역 정책 담당 스태프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의 전문 분야는 국제 무역, 특히 무역 정책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 Clashing over Commerce 외에도 Against the Tide: An Intellectual History of Free Trade와 Free Trade Under Fire 등 다수의 책을 저술. Clashing over Commerce 줄거리 이 책은 미국의 건국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역 정책의 복잡한 역사를 상세히 분석한다. 어윈 교수는 무역이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 사회, 외교에 깊이 연관된 문제였음을 강조한다.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국 초기: 독립 이후 보호무역을 둘러싼 논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의 무역 금수 조치나 남북전쟁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관세 관련 분쟁 등 초기 무역 정책의 주요 사건들을 다룬다.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남북전쟁 이후19세기 후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이후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세력과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세력 간의 치열한 논쟁을 보여준다. 스무트-홀리 관세법: 1930년대 대공황을 악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제정 과정과 파급 효과를 심도 있게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형성과 자유무역의 확산을 설명하면서도,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보호무역의 목소리를 함께 조명한다. 현대의 무역 갈등: 최근의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을 포함해 현대의 무역 갈등이 과거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무역 정책이 어떻게 국내 정치적 힘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분석한다. 결론 어윈 교수는 방대한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역 정책이 항상 미국 내에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며 갈등의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디. 이 책은 관세에 대한 기술적인 세부 사항보다는 미국 무역 정책의 역사적 흐름과 그 배경에 있는 정치, 경제적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미국의 무역 정책 역사 (시대별 주요 사건) 건국 초기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국가의 산업 육성을 위해 강력한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그는 관세 부과를 통해 미북부의 신생 제조업을 보호하고, 영국산 상품의 수입을 억제하여 국내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공산품이 높은 관세로 비싸지고 영국이 보복관세로 미남부 농산품의 수입을 억제하여 남부 농업산품의 판로가 막혀지는 이유로 당시 남부 농업 기반 경제와 충돌하며 무역 정책이 정당 간의 주요 쟁점이 되는 시초가 되었고 후에 남북전쟁 발발의 경제적인 이유가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남북전쟁을 거치며 북부의 공업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고, 미국의 무역 정책은 장기간 고율의 보호관세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지만,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농업 기반의 남부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 1930년대 대공황 (스무트-홀리 관세법): 1929년 대공황 이후, 후버 행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 농산물과 공산품의 수입을 대폭 줄였으나, 각국의 보복 관세를 초래하여 국제 무역량을 급감시켰다. 이는 전 세계적인 경제 블록화를 가속화하고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의 패권국으로서 자유무역을 주도해왔다. GATT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와 WTO (1955년 세계무역기구) 체제를 구축하여 관세 장벽을 낮추고 글로벌 교역을 확대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시기의 무역 정책은 국제 협력과 경제 통합을 목표로 했다. 21세기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중국, 유럽, 캐나다 등에 관세 폭탄을 부과했다. 이는 과거의 자유무역 기조를 뒤집는 조치였으며, 특히 중국과의 무역 전쟁은 전 세계 공급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관세가 단순히 경제적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협상 카드이자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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