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를 실험하는 장면 같았다. 같은 숲을 보여주었는데도 응답자들의 묘사는 세부적인 사항일수록 일치하지 않았고, 같은 사람에게 전해 들은 내용 역시 응답자들 간에 서로 달랐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도 자기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 저장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원하는 주관적인 방향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여 기억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옆을 돌아보지 않아 독단에 빠지는 경향이 컸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사진을 보여주자 민망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수긍하기보다는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게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다시 가보았을 때였다. 내 기억 속의 광경은 평화롭고 정갈하며 무엇보다 아주 커다란 기와집들이 서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그곳에는 조그마한 한옥들이 조금은 추레한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있을 따름이었다. 추억 속의 집은 이미 내 머릿속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의 옛집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여기가 아닌데 아닌데, 하며 같은 골목을 몇 번씩 돌며 찾았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그때는 어릴 때여서 몸집이 작았을 테고 협소한 집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져 뇌 속에 그렇게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철모르고 뛰어 놀던 유아적 추억이 세월이 흐르면서 한껏 미화되기도 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기억 속에 여고시절의 P가 보인다. 그녀는 말을 참 잘했다. 급우들에게 연속극 내용을 전할 때면 자기가 그 드라마 작가나 되는 것처럼 실감나게 이야기 했다. 실감날 정도가 아니라 어떤 부분은 덧붙이고 어떤 부분은 잘라내어 새것처럼 지어내면서도 망설임 한 점 없이 당당했다. 실제로 본 것보다도 더 재미있을 만큼 그녀의 화술은 뛰어났고 사람을 홀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학급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다루는 능력과 수완이 뛰어나서 같은 나이인데도 언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당연히 그녀 주위에는 늘 아이들이 북적거렸고 인기도 최고였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사춘기 고개를 넘으며 힘들 때마다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를 바라보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기댈 곳을 찾은 듯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사십 즈음에 다시 만났을 때 세월의 잔인함 때문인지 놀랍게도 그녀는 누구나 한번쯤 겪는 시련에도 저항 한 번 못하고 그대로 무릎이 꺾여버린 그런 모습이었다. 짙은 화장으로 감추었어도 함부로 늙은 주름을 어쩌지 못했다. 기분 좋게 늙는 세월은 주름도 차분하고 곱게 다져놓을 것이라 여기던 나는, 세상없어도 그녀만큼은 언제 만나도 주위에 명랑하고 가벼운 공기가 출렁일 것 같았었다. 그녀의 자신감 있고 당당하던 모습은 다 어딜 갔는지 삶의 기준조차 온통 타인의 잣대에 달린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정신적인 버팀목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혹시 그것 역시 기억의 오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의 뇌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 중의 극히 단편을 전체인양 확대해서 저장했을 수 있고, 꺼내어볼 당시의 내 기분에 따라 그것이 조금씩 변형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진실 자체를’ 듣기 보다는 ‘진실이었으면’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했어도 제각각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더욱 다르게 바뀔 개연성은 커진다. 문제는, 뇌의 주인도 모르게 잠자는 동안 교묘하게 윤색되고 각색된 기억을, 본인은 정확하다고 믿는다는 점일 것이다.
어떤 기억은 무거우면서 아프고 어떤 기억은 공기처럼 가볍고도 즐겁다. 기억의 경중(輕重)에 따라 시간은 스스로의 길이를 조절한다. 그래서 우리 기억 속에는 유난히 길고 느린 시간과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짧았던 시간들이 공존한다. 누구라고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붙잡고 싶어도 아득히 멀어져 가는 그 기억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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